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내 삶은 충만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 다큐 <모어>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내 삶은 충만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 다큐 <모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20 0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대할 때, 상대로부터 느껴지는 이질감을 감추면서도 그를 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가장 영리한 수는 걱정을 가장한 참견을 앞세우는 것이다. 슬쩍슬쩍 자신의 불편함을 내비치면서 상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보이면, 아니 정확히 말해 자신의 불편함을 들켰다는 생각이 들면 ‘네가 걱정돼서 그렇지’라는 말로 상대의 껄끄러움을 눌러버린다. 성 소수자를 대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태도는 성 소수자들이 자신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연을 필요로 한 계기가 됐을지 모른다. 현재가 아닌 과거로 회귀하고, 당시 어떤 기분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그것은 어떤 결과를 불러왔으며 어떤 고통을 낳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존재 자체를 타인에게 이해 구할 필요는 없음에도 이와 같은 서사가 반복되었다면 이는 많은 이성애자들을 등에 업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고 화려한 끼순이의 모습으로 등장한 모지민 씨에게 조차 많은 이들은 그의 극복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보여준 현재의 화려함보다 그것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것에 공감할 준비를 하는 것이 그의 이야기를 들을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가 트랜스 젠더로 드랙 퍼포먼스를 하기까지, 그리고 지금의 안정을 찾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지를 미리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그러나 <모어>는, 그리고 모지민 씨는 이같은 누군가의 지레짐작이 얼마나 우습고 쓸데없는 것인지를 작품 속에 꼭꼭 눌러 담는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걱정 따위는 필요 없이 나 스스로를 쌓아가는 데에 오롯이 쓸 수 있을 만큼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저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모지민 씨의 삶과 그의 행위로 충분히 증명되는 것이다.

 

최근 성 소수자를 그리는 작품들은 그들이 얼마나 반짝이는 삶을 꾸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는 듯하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뜻을 모아 행동하기도 하며, 가족들과의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성소수자의 모습을 찾는 일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리고 <모어>는 바로 그 경로에서 함께 빛나고 있다. 물론 <모어> 속 모지민 씨도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거나 스스로가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을 완전히 배제 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어>는 그 사건 혹은 말들이 모지민 씨가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든 동력으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현재의 모지민 씨에게 집중한다. 이 방식은 과거의 말과 일들이 얼마나 큰 폭력이고 오지랖이었는지를 역으로 증명한다. 그에게서 여성성을 버리라며 따귀를 올려붙였던 선배나 그의 정체성을 이야기했을 때 정신병원에 가두었던 군대의 폭력성은 모지민 씨의 찬란한 현재로 우스워지는 식이다.

이처럼 당당한 그의 모습은 영화가 그를 어디에 위치시켰는지를 통해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늘 자신을 챙겨주는 누군가와 그를 인정해주는 많은 이들과 함께 한다. 지민 씨에게는 자신을 운명이라 믿는 애인과 멋진 춤을 추는 아들에게 사랑을 쏟아붓는 가족이 있고, 그의 춤과 예술을 인정해주는 존 캐머런 미첼과 무대가 있다. 즉 그의 일상과 그의 일, 어느 곳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지민씨의 모습은 그의 퍼포먼스를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이면서도 기획된 퍼포먼스를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한 <모어>는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그를 사람들이 모인 지하철이나 광화문 공원 한 가운데 세운다. 이 모습은 모지민 씨 자체이자 그의 예술이고 소통의 방식으로 기능하면서 자신을 밀어내려던 ‘아, 대한민국’ 속에 자신이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굳이 극복이라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동의하고 동조할 수 있는 많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그 걱정이라는 말을 앞세워) 굳이 힘들게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의 선택이라기보다 그를 위한 제도가 없는 곳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발레리노의 전제가 남성성이라면, 그리고 이 사회가 생각하는 남성이 명확한 그 어떤 것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규정된다면 그 안에서 모지민 씨는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돌출되는 이들을 과연 개인의 문제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결국 제도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 질문은, 그리고 걱정은 모지민 씨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지니 게인스버그, 허원 역, <성소수자 지지자를 위한 동료 시민 안내서>, 현암사, 2022 에서 친절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more 일수도 毛漁일 수도 있는 그를 지칭하는 말들은 트랜스젠더, 드랙퀸, 발레리나를 바랐던 발레리노 등과 같이 기대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 친구, 애인의 이름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 녹아든다. 그의 현재는 굳이 특별한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서 걱정할 이들을 차분하게 밀어낸 자분자분한 그의 말투는 마치 관객에게 대화를 청하는 듯 하다. 또한 퍼포머로서의 앞으로를 기다려 달라는 자신감이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를 믿는 이의 삶은 다양한 헛소리를 무시한 채 아름답게 이어진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진출처 : <모어>(2022)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