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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창조적 뇌의 스토리-텔링이 만든 꽃분이들의 새 이야기를 위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김동령•박경태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창조적 뇌의 스토리-텔링이 만든 꽃분이들의 새 이야기를 위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김동령•박경태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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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다큐멘터리 형식의 가능성: “뇌는 스크린이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는 기지촌이라는 사라져 가는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각자 만들어온 김동령과 박경태 감독이 공동으로 만든 첫 영화 <거미의 땅>(2012) 이후 6년 만에 나온 신작 영화이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선한 문제작이라는 평가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집행위원회특별상을 받기도한 이 영화는 올해 초 극장 개봉을 통해 일반 관객들을 만났다. 이 영화는 대체로 다큐멘터리 장르로 분류되지만, 전작 <거미의 땅>에서부터 시도한 촬영 대상을 객관적인 인터뷰와 관찰로 쫓아가는 전통적 다큐멘터리 방식 대신 새로운 방식을 본격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두 감독의 협업, 그리고 촬영 대상인 기지촌 위안부 박인순과의 협업뿐 아니라 인순과 즉흥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캐스팅된 배우들과의 협업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과감하게 넘나드는 이 영화는 저승사자, 도깨비, 유령까지 등장시키는 오드 판타지(odd fantasy) 영화로도 분류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드라마,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복수 판타지를 혼성한 실험적 형식을 통해 다큐멘터리 장르 자체에 대한 재고와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로 평가될 수 있다.

40여년 기지촌 위안부로 살아온 인순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자신을 바라보는 영화”, “자신의 뇌를 펼쳐서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는 김동령 감독이 밝힌 제작 의도는 “뇌는 스크린이다”라는 들뢰즈의 영화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설명 요구에 “그냥 내 맘대로 그렸어”라는 인순의 대답은 그녀의 뇌에 자극과 사유의 분자적 미립자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그냥 그렸다는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화는 창조적 뇌의 회로를 쫓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회로와 연결은 미리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극과 미립자들이 타고 가면서 만들어진다. 영화가 바로 그 이미지를 움직이게 하거나 스스로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창조적 뇌를 스크린처럼 펼쳐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독들이 만들고자 한 것은 바로 인순이 그림을 그리면서 생성되는 자신의 창조적인 뇌를 펼쳐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순의 그림을 통한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공인된 서술 대신 공인되지 않은 서술로서 그녀의 “마인드스크린”(mindscreen)으로 보여줄 수 있다.

이 영화는 또한 들뢰즈가 예술의 창조적 역량을 의미하는 니체의 용어, “거짓의 역량”(puissance du faux)을 가진 인순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만들어낸 인순의 이야기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로서 영화가 가진 창조적 역량을 잘 보여준 들뢰즈의 현대영화로 평가될 수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글도 모르고 기억력도 떨어지지만 인순이 만들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을 피해자 또는 욕망의 대상, 오브제 쁘띠 아(a)로 자리매김하는 다수 지배적 관점을 대변하는 이미 각색된 이야기들에 저항하여 만든 꽃순이들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짓의 역량을 가진 창조적 뇌의 스토리텔러로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 “호모 사케르”로서의 인순과 꽃분이들

인순의 스토리-텔링은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일견 가장 비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겨질 수 있는 기지촌 여자의 벌거벗은 몸이 두 번 등장한다. 첫 번 째는 바로 전반부에 목욕 하는 인순의 벗은 몸이다. 두 번째는 후반부에 꽃순이 유령들이 전반부에서 미술작가가 도망가느라 두고 간 사진 자료집을 보다 찾아낸 푸티지로 삽입된 국과수가 찍은 현장 보존용 폭력 사건 피해자의 충격적인 사진 속 죽어 누워 있는 매춘부의 몸이다. 후자가 반미 감정과 여성주의적 분노를 일으킨 참담한 현실을 증언해주는 갈기갈기 찢긴 피해자의 비참한 몸이라면, 전자는 지금이라도 몸을 팔 수 있으면 기꺼이 팔겠다는 당당하고 강한 여자의 몸으로 서로 대비가 된다. 늙은 인순의 벗은 몸을 씻는 장면을 오프닝에 담은 의도는 강인한 생명감을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정동적 힘이 내재된 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툴르즈 로트렉: 검진
툴르즈 로트렉: 검진

보는 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씻는데 열중하는 인순의 벗은 몸은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 그린 의무 검진을 받기 위해 벗고 서 있는 늙은 창녀의 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르트렉의 무표정한 생기 없는 매춘부처럼 인순도 보는 자의 어떤 정서적 변용을 이끌어내는데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녀의 벗은 몸은 생명력만이 아니라 그녀의 저항과 도전의 힘 또한 감지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시작부터 비참한 피해자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뻔한 기지촌 여자 이야기에 저항하는 인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것임을 시사한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지게에 실어서 길거리에 갖다버린 인순은 본명도 모르고 주민등록번호도 없다. 산자로서 명부에 없을 뿐 아니라 그녀는 저승사자의 명부에도 누락되어 있다. 이러한 인순은 로마법이 정의한 그리고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전용한 국가의 주권 권력이 배제시킨 예외적인 존재, “벌거벗은 생명”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현대적 사례로 볼 수 있다. 무연고자 기지촌 위안부 인순은 인간 공동체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영역에서 배제된, 저승의 명부에도 없어 신의 영역에서도 배제된, 미군과 한국 정부가 계획적으로 만든 공창제가 탄생시킨 호모 사케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과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배제된 호모 사케르 인순은 국가폭력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호모 사케르는 법으로부터 내버려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순은 자신을 호모 사케르로 만든 주권 권력이 작동하는 ‘장치’(apparatus)에 저항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여기서 장치란 인순의 이야기를 비참한 피해자의 이야기로 생산, 통제, 보장하는 힘을 가진 권력이 작동하는 물리적 그리고 사유적 메커니즘 또는 체제를 가리킨다. 호모 사케르 인순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장치에 대한 저항의 이야기인 것이다.

 

3. 소멸될 기지촌 꽃분이들의 이야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 속 일상적 공간이었던 수락산 자락에 위치한 기지촌 뺏벌은 이제 미군기지 철수와 재개발사업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박경태 감독이 직접 출연해서 찍은 외부자들과 동반하여 뺏벌로 들어오는 진입 장면이 시사하듯이, 오늘날 뺏벌의 방문은 과거 어딘가에서 멈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는 체험이 되었다. 뺏벌이 더 이상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이 아닌 시공간으로 사라짐과 함께 그 죽은 잔해마저도 파헤쳐져 산업폐기물로 버려진 수많은 무연고자 기지촌 여자, 양색시, 양공주, 이 영화에선 꽃분이로 불리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이제 이야기되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사라지는 소멸에 도전하여 인순이와 꽃분이들의 “이름 모를 뼈다귀들이 있는 힘껏 서로를 부딪쳐 소리를” 내서 함께 탄생시킨 하나의 이야기에 관한 것임을 프롤로그에서부터 밝히고 있다.

 

인순이 그린 그림의 제목이자 이 영화의 제목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말해주듯이, 이 영화는 그녀가 상상하는 “판타지의 세계”를 그릴 때 그녀의 뇌의 회로와 연결이 만들어내는 스크린을 펼쳐보이고 있다. 그 세계는 매달 거듭되는 수십번의 임신과 낙태를 한 자신과 꽃분이들이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 “임신한 나무”, 이승을 헤매는 죽은 꽃분이 귀신들, 어느 기지촌 여자의 죽음과 장례식을 돕는 도깨비들, 미군 머리를 잘라서 끌고 가는 인순과 꽃분이의 괴기한 복수, 이들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들 등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들뢰즈가 설명하는 “기억과 전설 그리고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짓의 역량”을 가진 “빈자들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관한 그의 현대영화 이론을 실천한 사례의 영화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성적 학대와 착취를 견뎌온 빈자, 약자, 소수자, 호모 사케르 인순과 꽃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거짓의 역량을 발휘한 그들의 이야기 방식이다. 인순이 거짓을 꾸며내는 것은 공인된 이야기가 주장하는 진실에 상대적인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대안적 진실”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의 판단체계 자체를 와해시키는 역량을 가진 거짓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귀기와 미감이 가득한 매혹적인 우화”로 평가받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순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여준다.

 

4. 화자들과 카메라의 시각

인순은 20여년전 박경태 감독의 <나와 부엉이>(2003)에 첫 출연을 했고, <거미의 땅>에도 등장했으며, 이 영화가 그녀의 세 번째 영화로, 이제 카메라에 익숙해지고, 영화 찍는 것을 놀이처럼 생각할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인순과 꽃분이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그들의 이야기에 관한 영화이다. 다시 말해, 꽃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가 아니라 그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이야기에 관한 영화이다. 인순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판타지 드라마에 관한 영화로 그녀가 주체가 되어 그녀의 마인드스크린으로 보여주고 싶은 삶과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감독들, 배우들과 함께 즉흥적으로 나누며 촬영하는 협업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또한 3명의 화자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어 다양한 목소리로 이야기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3명의 화자 모두 스크린 상에 배역을 맡아 등장한다. 화자1(꽃분이2, 신윤숙)은 뻇벌의 지리, 산자락 아래 무연고자 무덤에 묻혀있는 꽃분이들, 인순의 목욕 장면과 일상, 저승사자 등의 소개와 다른 매체에 등장했던 씩씩하게 걸어가는 중년의 인순을 마지막 장면으로 한 프롤로그 부분과 그 마지막 장면을 다시 삽입한 짧은 에필로그 부분의 내레이션을 맡고 있다. 화자2(작가, 저승사자, 김아해)는 인순의 생애사 구술 면담과 촬영 그리고 작가의 뺏벌 엿보기로 구성되는 영화의 전반부 내레이션을 진행한다. 화자3(대장 저승사자, 김미숙)은 인순의 미국생활에 대한 파편적인 기억을 담은 짧은 숏들로 연결부로 하여 오드 판타지로 전환된 후반부의 내레이션을 맡았다.

영화 매체의 화자는 다른 매체 소설 또는 스토리의 화자의 역할과는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대체로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다른 매체의 화자의 역할을 대체하기 때문에, 화자를, 그것도 복수의 화자를 추가한 것은 다른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화자들은 카메라의 역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소설의 화자가 독자의 시각을 자신의 시각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하듯, 영화의 카메라 또한 관객의 시선을 카메라의 눈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한다. 이 영화의 화자들 또한 자신 또는 자신의 내레이션이 제공하는 관점에서 관객이 카메라의 눈이 본 것을 보도록 유도한다. 그렇다면 각 내레이션을 하는 화자의 보이스-오버 목소리가 관객의 시각을 유도하는 카메라의 눈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카메라의 눈이 본 것 또는 카메라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내레이션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잉여로 추가된 이 영화의 화자의 존재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보도록 유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그리고 카메라의 시각을 반영하고 변형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각의 존재도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영화에서는 화자와 더불어 카메라 기법과 촬영 방식 또한 보는 행위의 의식과 다른 시각의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

 

5. 공인된 이야기 만들기 시도들

이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분을 맡은 화자1은 꽃분이2 역할을 맡은 배우이다. 사실 마치 전통 연극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작중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배우들 중 아무나 맡듯이, 꽃분이2 역을 맡은 화자1은 익명의 관점으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꽃분이 역을 맡은 배우를 화자로 택한 것은 이 영화가 꽃분이들의 이야기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다.

이 영화의 전반부의 내레이션을 맡은 화자2는 다른 화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뺏벌의 외부자로 국가배상 소송 준비를 위해 방문한 교수의 면담 촬영을 도왔던 미술작가가 화자2라는 사실을 관객은 알게된다. 따라서 전반부가 전개되는 동안 관객은 보이스-오버의 내레이션이 화면 속 미술작가의 목소리임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본다.

 

화자2가 내레이션을 맡은 전반부는 인순의 이야기에 관한 두 개의 실패한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교수의 활동과 연구 자료를 위해 작성하고자 한 인순의 생애사 만들기이다. 생애사 작성이 실패한 이유로 화자2/미술작가는 인순이 글도 모르고 기억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교수의 말을 전한다. 인순의 이야기가 정확한 언어 구사와 기억에 근거한 생애사와 같은 공인된 이야기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로서 성매매의 강제성, 즉 비자발적인 성매매였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팔려오기는 했지만 자신이 원해서 몸을 팔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그녀의 이야기를 만들려는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시도가 좌절된 것이다.인순은 이들에게 항상 기지촌 은어로 “씹댄미” (Fuck, it’s up to me. 씨팔, 다 내 맘이야)를 외칠 따름이다.

 

두 번째 실패 이야기는 화자2/미술작가 자신이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이야기이다. 아무런 성과 없는 면담보다는 인순이 보여준 그림들에 더 관심을 가졌던 화자2/미술작가는 작품 소재를 위해 뺏벌의 인순 집을 다시 찾는다. 그녀의 부재로 그녀는 뺏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카메라 뷰파인더로 엿보다 들어오게 된 어메이징 클럽은 이제 모두가 떠나버리고 텅 빈, 시간이 멈춰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여기서 미술작가는 기지촌 여자들의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벽에 붙어 있는 수많은 매춘부의 사진들과 버려진 쓰레기들 속에서 다른 작가가 발견하기 전에 소재를 확보하기 위해 그녀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른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반부 시작부터 관객은 면담 촬영을 위해 화자2/미술작가가 가져온 관찰과 기록의 수단으로서의 카메라, 그리고 뺏벌을 다시 찾아올 때 가져온 엿보기와 자료수집 수단으로서의 카메라의 역할과 움직임을 의식하게 된다. 면담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전통적 다큐멘터리의 촬영 기법을 보여준다. 두 카메라 작동과 기법은 구별되지만, 모두 관찰 기록과 엿보기 수단으로서 피사체를 프레임 속에 가두어 대상으로 변환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특히 뺏벌 여기저기를 엿보는 화자2/미술작가의 반복되는 카메라 작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엿보는 자의 관점에서 주체의 대상화 작업에 공모하도록 유도한다. 그녀의 보이스-오버의 목소리 또한 엿보는 자와의 공모를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관객이 엿보는 자의 카메라와 공모하도록 강요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순간, 관객은 자신이 보도록 유도되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할 수 있다. 따라서 관객은 화자2/미술작가의 카메라가 뺏벌과 꽃분이들을 대상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클럽 내부를 엿보던 화자2/미술작가가 향한 유리 출입문에는 “성매매는 불법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법률조항, 성매매피해상담소, 여성긴급전화를 안내하는 여가부장관 명의 공고문만이 벽에 붙은 낡은 사진들과는 대조적으로 아직도 깨끗하게 붙어있다. 밖으로 나가 유리문을 통해 클럽 내부를 찍으려던 화자2/미술작가는 공고문의 뒷면 백지 앞으로 다가오며 멀리 창밖을 바라다보는 클럽 안에 있는 꽃분이 귀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화자2/미술작가의 관음증적 욕구 만족을 위한 카메라를 통한 엿보기와 사진촬영이 그녀의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잡히지 않았던 꽃분이 유령의 출현으로 중단된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의 카메라는 화자2/미술작가의 카메라의 대상화 수단으로서의 메커니즘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를 거부하는 다른 시각의 존재를 꽃순이 유령의 출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화자2/미술작가의 줄행랑은 꽃분이들의 이야기 만들기를 감당할 수 없는 엿보는 자와 작가로서의 관음증적인 시각의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녀는 후반부에 인순의 판타지 세계의 저승사자로 다시 등장한다.

 

6. 꽃분이들의 스토리-텔링: 꽃분이를 아시나요

 

이 영화의 후반부의 화자3은 대장 저승사자로 화면 속에 등장한다. 그러나 화자2와는 달리 화자3은 자신의 정체를 관객에게 밝히지 않는다. 화자3/대장 저승사자의 내레이션으로 후반부 또한 전반부처럼 두 개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명부에 없는 인순과 꽃분이를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죽음과 소멸로 그들의 이야기를 종결시키려는 저승사자들의 이야기 만들기와 이에 맞서 인순과 꽃분이가 함께 만드는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 만들기 시도가 후반부에 진행된다.

 

사실 이 두 이야기 모두 인순의 창조적 뇌가 보여주는 마인드스크린이 펼쳐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는 상호 충돌과 저항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인순과 꿏분이가 9고개를 넘어 저승길까지 가면서 만들고자 한 이야기는 저승사자가 이들을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만들고자한 이야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촬영 기법, 특히 카메라 기법은 이러한 이야기 만들기의 과정을 구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작 <거미의 땅>에서도 주로 사용된 기법이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화자2/미술작가의 카메라처럼 피사체를 따라 이동하기보다는 주로 정지된 상태에서 롱테이크로 화면을 담는다. 이러한 기법은 피사체를 프레임 속에 가두기보다는 카메라의 눈이 보고 있는 것과 그것을 반영하고 변형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각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든다. 카메라가 정지한 채 꽃분이 유령을 찾는 저승사자들, 꽃분이 유령이 어메이징 클럽 벽 앞을 일렬로 타령과 장구 장단에 맞추어 오고가는 것을 롱테이크로 담은 장면을 살펴보자. 후면 골목길 끝에 보이는 클럽의 담벼락을 스크린으로 삼아 전면에서 프로젝터가 투사한 영상을 보는 것 같은 이 장면은 관객에게 인순의 마인드스크린과 함께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으로서의 인순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정지된 카메라의 롱테이크 기법은 저승사자의 시각과 그것을 보는 인순의 시각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두 개의 이야기를 함께 연결하여 전개시키는데 매우 적절한 카메라 기법이다.

 

뉴웨이브 클럽에서 저승사자들이 명부에 이름도 없이 이승을 헤매는 유령을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이야기를 만드느라 고심하고 있을 때, 인순이 저승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 저승사자들의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찾아오는 장면 또한 두 개의 이야기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무심한 듯 화장을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인순은 뻔한 이야기에 지루함을 감추지 못한다. 저승사자들의 이야기는 유령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데려가 죽음을 완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산자를 위한 이야기이다. 비록 이들이 인순과 꽃분이 유령에게 연민을 표하며 나름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만, 결국 이들도 뺏벌의 외부인들로 무연고자라 저승에 못가는 유령들에게 “진실한” 이야기, 즉 공인될 수 있는 이야기로 그 이야기를 종결하려고 한다.

 

드디어 완성된 수의를 입은 인순은 비장하게 저승길을 떠나 이야기의 끝에 도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인순은 그녀 혼자가 아니라 꽃분이 유령과 함께 그 길을 떠난다. 그녀는 수의를 입었다기보다는 잔치에 가는 귀부인처럼 화려한 옷을 입었다. 저승 문지기에게 줄 뇌물로 꽃분이 유령과 함께 인순은 미군의 목을 칼로 썩썩 잘라 끈에 달고 질질 끌고 가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그녀를 신화와 전설의 인물로 만들어 준다. 도중에 미군의 잘린 목은 계골 얼음물에 떠내려 보내지는 장면 또한 많은 복수의 민담과 신화를 연상시키며, “기억과 전설 그리고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녀의 “거짓의 역량”을 보여준다.

 

죽음을 직면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무모하고 자신만만한 여자들”은 마침내 소멸의 위기를 맞게 된다. 저승사자의 배려로 꽃분이 유령은 우울증으로 재개발된 새 도시에 스며들어 감기처럼 퍼져 여전히 이승을 헤매게 되었다고 화자3/대장 저승사자는 말해준다. 그리고 인순에 대해서는 “이곳이나 저곳이나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죽음을 비장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라는 말로 내레이션을 끝내고 침묵을 지킨다. 화자3/대장 저승사자가 갑자기 3인칭 시점에서 1인칭 시점으로 전환하여 “나는”이란 주어를 사용한 것은 인순이 죽음을 비장하게 맞이한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녀의 이야기가 죽음으로 종결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후 후반부의 끝은 화자3/대장 저승사자의 해설을 반박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박인순 이제 마지막이다”라는 대장 저승사자의 최종 선언에 인순은 “넌 가짜잖아.”라고 대답한다. “잘 생각해 보거라 난 가짜가 아니다.”라는 그의 권위적인 설명에도 그녀는 “가짜가 아니라도 상관없어.”라고 단호하게 맞선다.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죽어라”는 그의 위압적인 명령에 인순은 이제 소리를 지르며, 괴상한 소리로 웃다 울기를 반복한다. 그녀의 선창에 소각장에 버려진 뼈다귀들이 이때다 싶어 힘껏 소리를 내 불협화음의 울음과 웃음의 합창에 가담한다. 대장 저승사자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은 이들의 그로테스크한 합창이 죽음으로 이야기를 종결시키려던 그의 의지를 꺽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롤로그의 화자1/ 꽃분이2가 내레이션을 했듯이, 이렇게 이야기가 하나가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다.

 

7. 메두사의 웃음과 끝을 다시 시작하는 인순

 

베네누토 첼리니: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베네누토 첼리니: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인순과 꽃순이가 미군 목을 잘라 끌고 가는 기괴한 장면과 인순과 꽃순이들의 죽은 자들을 깨어나게 만드는 섬뜩한 울음과 웃음 소리는 식수스(Hélène Cixous)의 「메두사의 웃음」을 연상시킨다. 여성의 글쓰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식수스가 사용한 “메두사의 웃음”은 꽃분이들이 만든 그들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 매우 적절한 은유적 표현이다. 기존 신화와는 달리, 인순이 꾸며낸 이야기에서는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린 메두사가 아니라 페르세우스의 목을 잘라 끌고 온 메두사로 그녀는 등장한다. 인순과 꽃순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목이 잘리는 대신에 목을 자른 메두사의 웃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후반부의 엔딩을 장식하는 메두사의 웃음을 웃는 인순이의 얼굴은 보는 자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무서운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인순의 벗은 몸이 아름답듯이,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다.

메두사를 보려면 정면에서 바라보면 된다. 그녀는 죽지 않는다. 그녀는 아름답고 그녀는 웃고 있다(엘렌느 식수스의 「메두사의 웃음」)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프롤로그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뺏벌에 죽어 누워 있는 꽃순이들이 부러워했던 두 다리가 튼튼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인순이가 씩씩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끝난다. 화자1/꽃분이2가 해설하듯이, 혼자 영화관에 가, 모두가 다 함께 어둠 속에서 <ET>, <드라큘라>, <엑소시스트> 같은 거대한 환영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인순은 이 영화가 만든 그녀의 이야기의 “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창조적 뇌를 가진 무모하고 당당한 아름다운 여자이다. 그리고 끝에서 다시 끝을 시작하는 용기있는 시도들이야말로 소멸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 방식인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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