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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북샵 The Bookshop (2017)> 책에 대한 오마주와 상호텍스트성이 전한 위대한 유산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북샵 The Bookshop (2017)> 책에 대한 오마주와 상호텍스트성이 전한 위대한 유산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17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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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 압축된 주제, 서점과 책 그리고 플로렌스
포스터에 압축된 주제, 서점과 책 그리고 플로렌스

영화 <북샵>은 스페인의 이자벨 코이젯트 Isabel Coixet 감독이 퍼넬러피 피츠제럴드 Penelope Fitzgerald의 1978년 동명 소설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고 연출한 수작이다. 차분하게 톤다운한 조명과 색감은 빛 바랜 흑백사진 같은 느낌을 만들고, 잔잔한 바다 물살과 회색 바람이 재즈풍의 음악과 잘 어울려 1959년 당시의 복고적 풍미를 전한다. 이 영화의 주된 배경이자 영화 제목인 ‘고택 서점 The Old House Bookshop’과 그 속에 진열된 책은 주인공 플로렌스(모티머 Mortimer)의 추억과 사랑, 인생이 담긴 메시지며 이는 애서가 플로렌스의 외유내강한 신념과 용기를 통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애서가에서 서점주인까지

영화 <노팅힐 Notting Hill (1999)>에서의 서점이 서점 주인 휴 그랜트Hugh Grant의 로맨스에 어울리는 따뜻한 느낌의 소품에 불과했다면, <북샵>의 서점은 플로렌스와 동급이며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서가 플로렌스의 신념은 서점을 운영하고 책을 주문하는 과정을 통해 정교하게 직조되어간다. 예컨대, 플로렌스가 거미줄만 가득한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서점을 열기 위해, 변호사와 은행가, 사교계 실력자인 퇴역 장군의 부인 바이올렛(클락슨Clarkson)등을 만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책과 서점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바이올렛은 막강한 인맥과 배후를 동원하여 플로렌스가 서점을 포기하도록 하는 전형적인 안타고니스트다. 결국 플로렌스의 서점은 합법적인 기만과 술수를 모두 동원한 바이올렛의 전횡에 의해 폐쇄된다. 그러나 거대(!) 권력에 굴하지 않는 플로렌스의 용기는 어린 크리스틴에게 위대한 유산이 되었으며 훗날 크리스틴의 서점이 됐다. 아울러 영화와 소설 <북샵>이 되었으니 좌절은커녕 더 확고하고 영향력 있는 역사가 된 것이다. 마치 과거의 분서갱유나 미래의 <화씨 451>과 같이 책을 불태우는 어떤 억압에도 불구하고 책은 더 견고하게 지식을 지켜온 것처럼.

 

책에 대한 오마주: 상호텍스트성

이 영화에서 책은 매우 신중하게 장면화된다. 카메라의 느린 수평 이동과 재즈 선율로 책과 관객의 감정선을 이어 붙이거나, 책과 영화의 관계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한다. 또 책이 거론될 때는 마치 등장인물의 얼굴과 이름처럼 제목과 표지가 단호한 어조로 강조된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 이동은 작가의 의도가 보이는 엄선된 책들을 통과하여 관객을 영화<북샵>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 영화에서 책은 상호 텍스트성을 갖는다. 소설<롤리타>를 통해 롤리타와 크리스틴을 중첩시킨다. <롤리타> 출간 소식을 알리는 대화에 불쑥 크리스틴이 클로즈업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브런디시(나이Nighy)는 브론테 자매 때문에 자신이 청승맞은 홀아비로 왜곡되었다며 농담을 던진다. 플로렌스와 제인 에어도 독립적이고 지적인 여성이라는 이미지로 겹친다. 그래서인지 플로렌스와 브런디시의 미묘한 감정도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관계 부근에서 맴돈다. 둘은 책을 통해 교감하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며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플로렌스와 브런디시는 책을 통해 교감하고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플로렌스와 브런디시는 책을 통해 교감하고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들의 열정과 절제는 브런디시가 플로렌스를 돕기 위해 세상에 나오기로 한 바닷가 만남을 묘사한 섬세한 연출에서 절정에 달한다. 둘은 단지 손만 잡았지만, 화면 속 두 사람의 동선을 겹치게 함으로써 더 친밀하게 시각화했고 브런디시가 플로렌스에게 했던 손 키스에는 존경과 사랑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이후 흔히 사랑의 배경에 열정의 화염이 등장했다면 이 둘의 플라토닉한 사랑에는 차가운 바다가 놓여있다. 이는 의식을 장면화하는 영화적 매혹 장치로 작용한다. 플로렌스가 인생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캐티에게 남편이 읽어주었던 책들 즉, 피프스, 조지 엘리엇 그리고 새커리 등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장면은 책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지만 영화 내내 그녀가 맞닥뜨리는 상류사회의 허영과 권모술수에 대한 은유적 비판으로 작용한다. 이 대화 역시 바닷가에서 이루어지는데, 플로렌스는 독서 후 바닷가에서 생각을 정리할 때나 책에 대한 대화를 할 때도 바닷가를 선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불에 대한 이미지는 <화씨 451>을 통해 강조한다. 플로렌스는 브런디시에게 <화씨 451>을 소개한다. 브런디시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책 표지 태우기를 즐겼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 그는 더이상 책을 태우지 않게 됐을 뿐만 아니라 브래드버리의 모든 책을 탐독하고 싶어한다. <화씨 451도>는 가까운 미래의 지식통제사회에서 책을 태우는 직업을 가진 ‘방화사’가 주인공인 SF소설이며, <화씨 451도>는 책이 불타는 온도이기도 하다. 플로렌스는 크리스틴에게 등유 난로 다루는 법을 설명해주지만, 크리스틴은 결국 이 난로를 사용하여 서점에 화재를 일으킨다. 이는 플로렌스의 꿈이자 인생인 서점을 빼앗은 바이올렛 혹은 그녀에게 동조하는 방관자들과 동조자들에 대한 크리스틴식 당찬 작별인사이다. 여기에서 불타는 책은 항거와 복수의 불로 전환된다. 플로렌스와 브런디시를 이어준 작가 브래드버리의 <민들레 와인>은 브런디시 사후에 뒤늦게 도착한다.

 

뒤늦게 도착한 브래드버리의 책 민들레 와인
뒤늦게 도착한 브래드버리의 책 민들레 와인

<민들레 와인>과 <북샵>에도 같은 소설 다른 변주와 같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소설 모두 지방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성장 드라마이고, 어른들 못지않게 당찬 아이들의 시선으로 사회를 풍자하는 반자서전적 소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들레 와인>은 또 다른 <북샵>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북샵>에는 롤리타 같은 크리스틴이 있다. 에필로그 내레이션을 통해 어른 크리스틴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녀(플로렌스)의 용기는 아무도 뺏을 수 없다. 그녀의 용기와 책에 대한 열정이 중국 칠기와 함께 유산으로 남겨졌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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