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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여,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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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에르 부르디외 | 사회학자
  • 승인 2009.02.01 18:0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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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 신자유주의적 폭압에 저항해야 학문·노조·사회운동을 결합한 사회참여 필요

▲ 피에르 부르디외
지식인들, 신자유주의적 폭압에 저항해야
학문·노조·사회운동을 결합한 사회참여 필요

“정치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정치를 사유하기”를 원했던 피에르 부르디외는 학문과 현실참여를 이율배반적으로 보기보다는 두 가지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사회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사회를 변혁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였다. 이 글은 2001년 5월 아테네에서 유럽, 문화, 언론을 주제로 사회과학 연구자와 노동운동가와의 만남에서 발표되었다.

 

 

 

 

 

세계화 정책에 맞서기 위해선 독립적인 연구자들 중 일부라도 반세계화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나는 ‘세계화’라는 말 대신 굳이 ‘세계화 정책’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세계화’라는 용어에는 자연적이고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화 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파되는지에 대해선 그 대부분이 비밀에 붙여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정책이 실현되기 전에 이것의 실체를 간파하기 위한 연구 활동이 우선 필요합니다. 그런 다음에 사회과학의 발전 덕분에 이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내는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일반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연구결과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계화 정책의 일부분은 연구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제 문제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통해서 이 정책의 해악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과연 계속 침묵을 지킬 수 있고 지켜야하는가 입니다. 아니, 오히려 여기에서 연구자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일까요? 지구가 심각한 자연재해의 위협에 처하게 되면 이 재난을 미리 알게 된 사람은 학자들에게 전통적으로 강요되는 자기절제를 벗어날 책무가 있지는 않을까요?

 

학문과 사회참여는 분리될 수 없어

대부분의 교양인, 특히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머릿속에는 학문과 사회참여를 분리하는 이분법이 존재합니다. 즉 학문고유의 방법론에 따라 다른 학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과 사회참여를 하면서 학계의 지식을 학계 밖으로 옮기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상호 배타적인 행동으로 인식하는 일이 그 것입니다. 하지는, 나는 이를 완전한 해악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인위적입니다.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학계의 규범에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면서 얼마든지 참여적 지식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하게 참여적 학자가 되기 위해, 또 참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학문 공동체의 규범에 따른 학문연구 안에서 획득된 지식을 현장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머릿 속에 안주하면서 현실에 대한 눈을 감게 만드는 일련의 이분법적인 틀을 깨야합니다. 학문 대(對) 현실참여의 이분법은 학문연구를 구실로 사회현실에 눈을 감는 연구자의 의식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의 이러한 태도를 학문 공동체는 승인합니다. 더군다나 학자가 자신의 학문을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더욱 학자답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생물학자인 경우에는 이런 태도는 죄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범죄학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이 국가에게서 돈을 받으면서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오직 동료들에게만 보이도록 꼭꼭 숨겨야만 할까요? 물론 학자는 하나의 발견이라고 자신이 믿는 것을 우선적으로 동료집단의 비판에 맡기는 것이 절대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학계 공동으로 획득되고 통제된 지식도 학계 내부에서만 머물러야하는 것일까요?

▲ 1995년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한 부르디외(오른쪽)가 시위대에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늘날 연구자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범죄율간의 상호관계, 신자유주의 정책과 뒤르케임이 아노미라고 칭할 수 있는 모든 징후 간에 상호관계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침묵할 수가 있을까요? 이 상황에서 사회적 발언을 하는 학자를 비방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오히려 그의 용기를 칭찬해야 합니다. (여기서, 내가 나의 현재 위치에 대한 변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식인들, 반세계화 논리개발에 적극 나서야

이제 반세계화 사회운동권 내에서 연구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그는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들면 안 됩니다. 경쟁이 치열한 학계에서는 변변한 연구실적하나 없이 대중을 상대로는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파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지식인으로 행세하는 과거 일부 유기적 지식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연구자는 예언가도 아니고 거창한 사상가도 아닙니다. 연구자는 새롭고도 어려운 역할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고안해야 합니다. 무기력에 빠진 노동조합을 비롯해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저항하는 책무를 맡은 시민단체를 돕도록 노력해야합니다. 특히 다국적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전문가 그룹’이 행사하는 파괴적인 공세에 맞설 수단을 강구하도록 협력해야합니다.

연구자들은 더욱 새롭고 더욱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정치적 기획을 공동으로 고안하기 위한 조직의 기틀을 만들고 이러한 정치적 기획의 성공을 담보할 조직적 조건을 갖추는 데 공헌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제헌의회와 미국혁명 당시의 필라델피아의회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법학 지식을 갖추고 몽테스키외를 읽고 민주적 구조를 고안해내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고안해내야 합니다. 물론 혹자는 “의회, 유럽노조연맹과 같이 이런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모든 종류의 기구가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기구가 어떤 대안적인 정치적 기획을 가지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여기서 길게 논의하지는 않겠습니다. 결국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고안하고 실현하는데 있어서 가로놓인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이 장애물의 일부분은 이것을 제거해야할 임무를 띤 사회운동 안에서, 특히 노조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지식인들의 현실참여는 지금이 적기

왜 우리는 낙관적일 수 있을까요? 성공의 시기를 따진다면, 나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1995년 즈음에 했으면 우리의 호소는 제대로 먹히지도 않고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 카산드라처럼 재난을 선언하는 사람들은 비웃음을 샀습니다. 언론은 이들을 공격했고, 모욕했습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노력이 차츰 결실을 맺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9년 시애틀을 필두로 일련의 반세계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추상적으로 예견한 바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재앙적 결과들이 명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가장 근시안적이고 덜떨어진 기자들도 기업이 15% 이상 수익률을 내지 못하면 가차 없이 대량해고를 감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불행을 예언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을 뿐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재난적인 예언이 실현되기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너무 빠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무 늦은 것도 아닙니다. 이제 재난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유럽사회운동은 노조, 사회운동, 연구자, 이 3개의 구성인자가 모여야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세 요소를 단순히 병치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시켜야 합니다. 나는 어제 노동조합원들에게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사회운동과 노조사이에는 행동의 내용과 수단에 있어서 매우 차이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반세계화 사회운동은 노조와 정당이 포기했거나 잊어버린, 혹은 제쳐놓은 정치적 목표를 존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회운동은 또한 노조들이 점차 잊고, 무시하고 제쳐놓은 행동 방식도 되찾아왔습니다. 사회운동은 상징 효과를 이용합니다. 상징효과는 한편으로는 시위하는 자들의 개인적 참여와 육체적 참여를 통해 나타납니다.

 

지식인의 현실참여에는 상상력과 용기 필요

또한 위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노동절 가두집회에서 노조원들의 전통적인 몸짓처럼 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행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적극적 행동, 즉 점거농성과 같은 행위가 필요합니다. 이는 상상력과 용기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또한 ‘노조혐오증’을 갖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해하여야 할 노조 조직 특유의 논리가 있습니다. 왜 내가 노조원들 앞에서는 사회운동이 노조에 갖는 시각과 비슷한 것을 말하고 사회운동원 앞에서는 노조원들이 시민사회운동에 갖는 시각과 비슷한 말을 하는 줄 아십니까? 왜냐하면 서로가 상대방의 시각으로 자신을 봐야지 운동 내부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현재의 운동은 매우 허약한데 그 이유는 바로 내부 분열에 있습니다. 운동진영의 내부 분열은 생산하는 에너지의 80%를 열로 소비하는 엔진과 같습니다. 내부 분열만 극복하더라도 운동은 더욱 빨리, 더욱 멀리 전진할 수 있습니다.

통일된 유럽사회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언어적 장애가 있습니다. 기업가나 경영진은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합니다. 그러나 노조 간 혹은 사회운동 간의 의사소통은 상대적으로 더욱 힘듭니다. 때문에 사회운동 혹은 노동운동의 국제화가 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다음으로는 관습, 사고방식, 각국의 사회구조, 그리고 상이한 노조 조직과 관련된 애로가 있습니다. 이러한 난관에 대처하기 위한 연구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연구자들이 공동 운동 조직의 집단적 창안을 위해 노력함으로서 마침내 새로운 내용, 새로운 목표 그리고 새로운 행동의 국제적 수단을 지닌 새로운 사회운동을 탄생하는데 기여하는 일일 것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누구인가?   

2002년 71살을 일기로 삶을 마감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사르트르, 바르트, 푸코, 데리다와 함께 프랑스 사상의 보루였으며, 사회철학이 독일의 하버마스와 영국의 기든스에 의해 양분된 상황에서 가장 프랑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의 문제를 개입시킴으로써 사회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부르디외가 일생 동안 천착한 연구과제는 문화이며, 그의 대표적인 이론의 핵심은 '아비튀스'라는 개념이다. 이는 개인과 구조를 연결하는 특정한 성향의 무의식적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가족에게 배운 행위, 규칙, 취향이 내재화되고, 이렇게 체화된 성향은 지속적으로 전이되어 훗날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회적 경험의 판단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아비튀스는 환경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계급에 의해 미리 결정된 고정적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습득된 성향은 경우에 따라 창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생각이다. 사회적 관계는 경제와 문화적 요인을 동시에 살펴봤을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차이를 낳게 되고, 그것은 결국 사회적 구별짓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부르디외는 철저하게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 이후 현실참여에 가장 적극적인 프랑스 지식인으로 꼽힌다. 그런 만큼 부르디외는 국내외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개입하곤 했으며, 노동자 파업의 후원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찰적 사회학'을 주장하는 부르디외는 지식인들의 위선과 기만에 더욱더 주목한다. 그는 오늘날 지식인들이 너무나 쉽게 상업 언론에 등장해 아마추어적 견해를 남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미디어의 지면이나 화면을 사이비 지식인들이 적극 수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미디어가 요구하는 흥미위주의 단편적 지식을 제때에 제공하기 위해 임기응변식으로 지식상품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이런 사이비 지식인들과 달리, 진정한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제도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업 언론의 확산은 곧 새로운 문화체제를 등장시켰고, 이에 따른 새로운 생산과 소비에 관한 룰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지식인과 예술가들도 오로지 상업적인 가치에 따라 평가될 뿐이며, 만약 이 판단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여지없이 배제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지배그룹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부르디외는 지식인들이 전문지식 또는 문화적 자산을 소유한 지배그룹의 일당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들이 진정한 지배세력의 일원이라기보다 지배계급에 종속된 일종의 피지배그룹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부르디외는 지식인들이 이런 모습을 탈피하기 위해서 외부의 영향에 비교적 자유로운 독립적 위치에서 정치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지식 생산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내에서도 <재생산>(동문선), <구별짓기>(새물결), <남성지배>(동문선) 등 그의 저서들이 번역돼 비판적 지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2002년 71살을 일기로 삶을 마감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이 글은 그가 죽기 직전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2월호에 기고한 내용이다.

번역 김태수 asticot@ilemonde.com*

* 파리1대학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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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사는사회 2013-06-05 09:08:12
한달에 만원 아깝지 않습니다.

gmlwls 2011-11-28 19:54:05
너무도 당연한 얘길 어렵게 쓰시네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자본주의가 맘에 안들어도 말하고자 하는걸 말하려면 적어도 그 세계의 룰은 따라야 하는거 아닌지.

hunakim 2010-04-22 10:32:56
수시로 메일로 찾아드는 'diplomatique'지의 상품 광고를 접하면서도 나는 감히 그 정보를 구독할 수가 없다. 일자리를 잃은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 그독할 만한 자본이 없기 때문이다. 귀사는 내게 자본의 여유를 탓 할 것이가? 아니면 기타의 자본주의적 핑계로 정보를 파는 것이 당연한다고 할 것인가? ...... 정보의 상품화를 구실로 돈벌이로 가는 길에 선 당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나는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