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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개봉작 리뷰...<리멤버>, 볼 만한 연기 조화, 볼썽사나운 젠더 인식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개봉작 리뷰...<리멤버>, 볼 만한 연기 조화, 볼썽사나운 젠더 인식
  • 윤필립(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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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가 정부조직을 장악하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이어가던 80년대 중반, 국민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는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으며 상상하는 대로 모든 게 이뤄질 거라 믿는 평범한 여덟 살 어린이였다. 그러나, 이미 감을 잡았겠지만, 학령기가 되어 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국민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여덟 살 어린이의 순수한 호기심은 철저히 통제됐고, 교과목을 벗어난 상상력은 교과서 안으로만 유도된 채 박제됐으며, 누군가의 허락 없이 뭘 했다가든 범죄자처럼 칠판 한 구석에 '떠드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일쑤였다. 말만 학교였지 지금 생각해 보면 군대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학교라는 조직 사회에 갓 들어온 1학년 초, 수업을 듣다 옆에 앉은 짝이 뭘 물어보길래 늘 하던 대로 대답을 해주었을 뿐인데 당시 담임교사는 나를 교실 앞으로 불러내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왼쪽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 순간 귀에서 들렸던 이명, 물 속에 잠긴 듯 멍먹했던 귀, 무엇보다 고개를 들 수 없는 모멸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덟 살 인생의 첫 싸대기와 첫 모멸감은 그렇게 다른 누구도 아닌 학교 안 어린이들의 보호자 담임교사가 주도했다. 학교라는 곳의 생리를 알게 된 건 그때 그 순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를 비인간적으로 내리친 담임교사가 가정방문을 왔을 때에도 "안녕하세요?"라고 허리 숙여 인사하며 예의바르게 굴어야 했던 그 시절의 그 어린이. 지금의 나를 그때의 나에 대입시키면 담임교사에 대한 서슬퍼런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지혜롭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당해야만 했을까? 나는 왜 그때 거기서 담임교사에게 말 잘 듣는 아이처럼만 굴었을까? 이렇게 누구나 하나쯤 있을 법한 그 분노의 기억들. 영화 <리멤버>(이일형, 2022)는 바로 이러한 끔찍한 기억과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픔 그리고 아픔을 떨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남자의 바로 그 '기억'에 관한 작품이다. 좋은 기억은 추억이 되지만 나쁜 기억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는 <리멤버>. 한 인간의 삶을 뒤흔든 사인화(私人化)된 권력을 향한 이 복수극은, 세대가 다른 두 남자가 운명적으로 수퍼카에 동승하게 되며 폭주하기 시작한다.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생 제이슨(남주혁)과 프레디(이성민). 어느 날 프레디가 제이슨에게 수퍼카를 보여주며 한 종합병원으로 운전을 부탁한다. 평소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사이였기에 제이슨은 프레디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는데, 오늘따라 프레디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그리고 다음 날, TV를 켠 제이슨은 뉴스를 보다 믿지 못할 소식을 접한다. 공교롭게도 프레디를 데려다 준 바로 그 병원에서 간밤에 권총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설상가상으로 뉴스에서 범인이라 추정하며 공개한 사진 속에는 자신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슨은 프레디에게 자초지종을 캐묻지만 마치 족쇄라도 물린 듯 모든 상황은 둘이 함께 할 운명으로 몰아간다. 

 

역사와 이념이 삶의 전부였던 거대담론의 시대에 인간성을 말살당한 한 노인의 광기어린 복수극은 붉은 수퍼카의 엔진이 뿜어내는 굉음과 함께 폭주하며 영화적 흥미를 돋운다. 그 중심에 놓인 배우 이성민은 이번에도 역시 자신이 가 본 적 없는 시대와 세대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 놓았으며, 자칫 어색하게 재현될 경우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복수심 가득 찬 노인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덕분에 이성민의 배우로서의 탄탄한 입지는 여전히 굳건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연기에 대한 신뢰 또한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연기면에서의 놀라움은 오히려 남주혁이 선사한다. TV 드라마를 통해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가고는 있지만, 이번 작품 <리멤버>가 <안시성>(2018), <조제>(2020)에 이은 세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계에서의 남주혁은 여전히 신인에 가깝다. 그러나 <리멤버>에서 보여준 적절한 호흡법과 사소한 어조까지 살리는 대사처리 능력 등 영화배우로서의 남주혁은 분명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연기 또한 홀로 빛나는 일방적 연기가 아니라 상대 배우와의 조화가 일품인, 그런 독립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연기였기에 그야말로 남주혁의 성장이라 할 만하다.

 

서사의 측면에서, 이일형 감독은 전작 <검사외전>(2016)과 같이 <리멤버>에서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공생 관계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작이 소시민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리멤버>는 그보다 층위를 넓혀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이념이라는 거대담론을 다룬다. 영화는 연출가와 각본가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일형의 가치관 속에서는 거대담론의 설정값이 '남성의 전유물'인 것 같다. 그러한 인식은 제이슨과 프레디라는 두 남성의 우정을 통해서도 풍겨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직업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례로, 이 영화 속에서 의사는 남성이고 간호사는 여성이다. 여자 의사도 많고, 남자 간호사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21세기에 말이다. 남성주도 서사라면 의사도 남자, 간호사도 남자로 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변화한 시기에 여전히 변화하지 못한 젠더이분법적 재현을 당연시하는 것은 결국 진부하다 평가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점이 스크린에 걸린 <리멤버>를 앞에 두고 진보가 아니라 퇴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겨레신문 유선희 기자의 8월 17일자 칼럼에서는 F-등급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해당 칼럼에 따르면 F-등급은 2014년 영국 배스영화제에서 처음 도입된 것으로, 여성 연출가, 여성 각본가, 여성 캐릭터 주도 작품 등 영화 제작 과정에 미친 여성의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 F-등급은 영화의 다양성을 확립하기 위함이지 결코 어떤 족쇄를 채우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 순혈주의와 남성우월주의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지금의 한국 영화계를 돌아보면 F-등급과 같은 과감한 시도 없이는 더 이상 글로벌 시장에서의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대체 에너지 사업에 뒤늦게 뛰어들어 이제는 세계적인 현상을 뒤따라가기도 벅찬 한국의 대체 에너지 현황과 같은 것이다. 당시에는 간과했지만 언젠가는 그 중요성이 세계적 이슈로 떠오를 때, F-등급은 바로 그 때를 바라보는 선구적 혜안이다. 그 점에서 <리멤버>의 제작과정에 고스란히 반영된 젠더 인식은 매우 아쉽다.

 

 

사진: 네이버 영화(2022. 10. 26. 개봉)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며 공연기획 '최영주의 in클래식' 상임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담화분석 및 스토리 문법과 문학/서사치료 연구, 한국문화교육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영화비평 대상을 수상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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