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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리 워넬 혹은 안전은 보장할 수 없는 SF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리 워넬 혹은 안전은 보장할 수 없는 SF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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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워넬(Leigh Whanell, 1977~)의 SF와 공학적 오컬트
〈업그레이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업그레이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공학적 오컬트,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리 워넬의 <업그레이드(Upgrade)>(2018)를 보고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1943~2011)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를 탐하는 인공지능 스템(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의 첫 문자를 모아놓은 ‘이공계’의 약자로 쓰이기도 한다)이 그레이 트레이스(로건 마샬 그린 분)의 혼과 육체를 장악하는 결말은 키틀러의 유명한 경구, “우리만이 기계를 프로그램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 역시도 우리를 프로그램한다.”(『Exploding Aesthetics』, 2001)의 현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본다면 첫인상은 단순한 표피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스템은 자발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탐냈으며, 그 목적은 인간이 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키틀러의 도도하기 이를 때 없는, ‘인간 없는’ 유물론적 관점의 매체-운명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러한 독법은 오히려 키틀러를 종종 기술결정론자라고 오해(혹은 폄하)하는 이들의 이해에 가깝다. <업그레이드>의 스템은 전지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 보이기도 하며, 나아가 그 능력을 신체강탈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오컬트적이기도 하다. 워넬이 <업그레이드>에서 보여준 감성은 우려 섞인 두려움보다도 신체강탈의 빙의 오컬트에서 유래하는 공포 감성에 첨단기술을 입힌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업그레이드>의 감성을 시도했던 영화작가가 워넬 뿐만은 아니다. 폭력의 대가로도 불리는 폴 버호벤(Paul Verhoeven, 1938~)은 <로보캅(RoboCop)>(1987)의 사이보그를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변형된 인간신체의 공포를, <토탈 리콜(Total Recall)>(1990)의 기억 이식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혼란함을 고강도 신체 훼손 액션에 엮어내기도 했으며,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1897)을 각색한 <할로우맨(Hollow Man)>(2000)에서는 투명 피부를 통해 구분되는 타자성을 관음적 광기로 잇기도 했다. 이들의 상태가 공포로 변하는 지점에는 늘 기술이 있었다. 워넬의 <인비저블맨(The Invisible Man)>(2020) 도 <할로우 맨>과 같이 투명인간이라는 기술을 소재로 다루지만, 버호벤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할로우 맨>에는, <인비저블맨>과 달리 크레딧에 H.G. 웰스의 이름이 원작자로 호명되어 있다. 대게 투명인간 소재를 다룰 때 웰스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할로우 맨>의 크레딧은 H.G 웰스를 계승했다는 선언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할로우 맨>의 주제의식은 H.G. 웰스의 주제의식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투명인간』의 주인공이 투명 피부를 통해 얻은 것은 타자성과 사회적 고립이었고, 이로 인해 폭력과 광기를 분출하게 된다는 점에서 버호벤의 <할로우 맨>에게는 어울린다. 그러나 워넬의 <인비저블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비저블맨>에도 <할로우맨>에 등장하는 고강도 폭력과 관음이 등장하지만, <인비저블맨>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의 주체가 아닌 폭력의 객체이다. 이는 버호벤과 워넬의 결정적 차이이며, 간혹 워넬을 버호벤의 후계자로 호명하려는 시도가 틀렸음을 지적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버호벤과 워넬은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발현되는 영화의 주제의식과 폭력성을 공유하긴 한다. 그러나 워넬이 구현하는 폭력에서는, 버호벤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내재적 원인을 찾기 어렵다. <할로우 맨>은 주인공 세바스찬(케빈 베이컨 분)은 투명인간으로서 관음과 폭력을 저지르는 가해 주체이지만, <인비저블맨>의 주인공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 분)는 애드리안(올리버 잭슨 코헨 분)이 저지르는 스토킹의 객체이다. 게다가 애드리안은 선천적 사이코패스로서, 세바스찬과 같은 변화를 겪지 않는다. 세실리아가 저지르는 폭력도 내재적 변화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는 되려 사이코패스의 폭력이라는 외재적 요인에 의한 반응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마지막 장면을 근거로 세실리아의 심리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들, 외재적 요인에 의한 반응으로 형성된 연쇄적 결과에 가깝다. 내재적 변화라고 보기에는 여전히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비저블맨> 한 편에서만 나타나는 차이가 아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인한 의식의 변화를 다루는 <토탈 리콜>과 <업그레이드>를 비교해도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토탈 리콜>의 아놀드 슈왈제네거라는 하나의 ‘아이콘’을 광산 노동자이자 성실한 가장 퀘이드와 폭력적이고 권력에 기생하는 하우저로 양분하는 것은 영화의 주제와 버호벤의 의도에서 멀어지는 일일 뿐, 불가능하고도 불필요한 일이다. 그에 반해 그레이는 복원기술 노동자이자 성실한 남편이지만, 그의 몸에 빙의하는 스템은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그레이의 몸을 강탈하는 비가시적 주체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그레이와 스템은 하나의 인격일 수 없다. 버호벤에게 SF가 내재한 본성을 자극하는 계기에 가까웠다면, 워넬의 SF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첨단기술을 입힌 오컬트에 가깝다. 이러한 의미에서 버호벤의 공포가 우발과 같이 안에서 밖으로의 발화를 향한다면, 워넬의 공포는 침입과 같이 밖에서 안으로 향한다. 버호벤이 환상(<토탈 리콜>)과 호기심(<할로우 맨>) 같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어두운 면을 탐구하는 인문학자에 가깝다면, 워넬은 보이지 않는 기술의 신체 침입을 다루는 공학자에 가깝다. 이 점에서 워넬의 영화는 ‘공학적 오컬트’라고 부를만하다.

 

〈쏘우〉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쏘우〉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판타즈마고리아, 빙의하는 비가시 주체

빙의에 가까운 신체강탈 오컬트에서 관객이 가장 쉽게 가질 수 있는 의문은 강탈 주체의 동기이다. 그러나 워넬은 앞서 언급했듯 주체의 동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객체의 반응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워넬의 영화는 특정한 결과를 산출하는 시스템을 묘사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그가 영화적 동지인 제임스 완(James Wan, 1977~)과 함께 처음으로 헐리우드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다루어왔던 관심사이다. 워넬이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었던 작품은 본인이 각본을 쓰고, 제임스 완이 연출했던 ‘쏘우(Saw)’ 시리즈(2004~)였다. 9번째 영화를 제작 중인 쏘우 시리즈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직쏘’라는 시리즈의 아이콘과 기계장치와 결합된 강력한 고문 슬래셔라는 두 가지 요소에 집중되어있다. 하지만 워넬이 각본에 전반적으로 참여했던 3편까지는 플롯 트위스트를 활용한 반전영화로 평가받았었다. 반전영화에서 고문 슬래셔로 시리즈 평가가 전환된 것에는 시리즈 내내 특유의 반전 플롯이 반복되어, 반전 플롯이 클리셰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하면, 쏘우의 반전 플롯이 가지는 무게감은 시리즈 내내 반복될 정도로 시리즈 자체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쏘우의 반전 플롯은 직쏘가 벌이는 살인 게임의 피해 객체와 게임을 통제하는 가해 주체가 자리바꿈을 한다는 데에 있다. 쏘우 시리즈의 중추가 되는 ‘게임’은 ‘유사죽음(고문) 혹은 살해를 통해 삶에 감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이비 철학을 기조로 설계된 ‘시험’이다. 그러나 살인 게임은 설계 주체에게만 ‘시험’이지, 객체로서는 고문일 뿐이다. 1편에서 빌 크레이머(토빈 벨 분)는 납치자들이 갇힌 방에 던져진 시체로 등장하여, 마치 직쏘 게임의 객관적인 결과이자 피해를 규정되고 있는 듯 보인다. 시체는 객체로서 게임의 실체를 증거 해야 한다. 그러나 반전은 크레이머는 사실 시체도 아니었거니와, 되려 게임을 설계한 직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객체에서 주체로 이동하는 과정은 2편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1편에서 직쏘의 피해자로 경찰에 증언했던 아만다 영(쇼니 스미스 분)은, 게임의 통해 ‘삶의 소중함’을 얻었다는 점에서 직쏘 게임의 객관적 성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2편에서 마약중독자로 ‘삶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죄명 아래 다시 게임에 소환된다. 이는 게임의 무용함을 증거 할 객체이지만, 반전을 통해 아만다 역시 직쏘의 사이비 철학을 수용한 후계였음이 드러난다. 아만다 역시 자발적인 설계 주체이자 가해자인 셈이다.

3편에서 등장하는 ‘후예’ 마크 호프만(코스타스 맨다일러 분)은 본래 직쏘를 쫓는 형사였지만,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직쏘에게 협박을 받고 그의 게임을 돕고 관전하게 된다. 그는 직쏘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직쏘를 부정하지만, 동시에 ‘정통 후계’인 아만다를 시기하여 갱생프로그램이었던 살인 게임을, 끔찍한 도륙만 반복하는 살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호프만이 직쏘의 철학을 온전히 계승하지 않은 채로 설계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직쏘 게임이 살육에 불과하다는 실체를 증거 할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직쏘의 게임은, 살인마의 광기에 불과한 객체로 증거된 뒤에도 진행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살육에 불과한 게임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직쏘의 사이비 신념은 게임을 통해 계속 번식한다는 점이다. 직쏘의 게임은 끊임없이 후계들을 양성하며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직쏘의 게임은 직쏘가 설계하고 통제했지만,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게임 그 자체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설계된 프로그램이었던 게임은 설계자를 숙주로 삼아 진화-번식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직쏘의 게임은 끝없이 또 다른 직쏘를 재생산하고 번식하는 거대한 시스템이자 기계에 가깝다.

설계자를 숙주 삼아 진화하는 프로그램이란 이야기는 <업그레이드>에서도 이어진다. 물론, <업그레이드>에서는 크레이머와 같은 미친 공학자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쏘우 시리즈의 게임처럼 프로그램이 독수독과(毒樹毒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업그레이드>에는 어린 천재 공학자의 순수한 호기심만 있었다. 세계최대 인공지능 기업 베젤의 설립자이자 스템(사이먼 메이든 목소리 분)의 설계자인 에론(해리슨 길벗슨 분)은 극 중에서 밝히듯, 호기심과 발전에 대한 욕구로 스템을 설계한다. 에론 또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극비프로젝트로 유지하며 나름의 안전환경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스템은 어느 순간 에론의 통제를 벗어나 베젤을 장악한다. 그리고 에론을 협박하여 무고한 그레이와 그의 아내 아샤(멜라니 벨레조 분)까지 살해해가며 육체에 스템을 심는다. 스템이 무고하고 인공지능과 상관없어 보이는 그레이의 육체를 노린 이유는, 그가 순수한 육체를 유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스템은 발전한 인체공학 덕에 인공지능과 결합한 육체가 놀랍지 않은 환경에서 등장한 인공지능이었다. 이 점에서 순수한 육체의 그레이는 스템의 입장에서 “Not Man. Not Machine. More.”이라는 홍보 카피를 실현해볼 환경이었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화’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진화의 필수조건은 변화이다. 무언가가 변하지 않는다면, 진화할 수도 없다. 즉, 변화 없는 진화도 없고, 새롭지 않은 진화도 없다. 그렇다면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신선함(Fresh)인가, 처음(Proto-)인가, 최신(Recent)인가. 여기서 우리는 새로움의 조건을 한 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새로움이 ‘이전에 없던 것’인 건 맞다. 그렇다면, 없던 것이 생긴다는 건 어떤 것인가. 아니, 애초에 없음에서 있음이 나올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면, 없음과 있음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형이상학의 오랜 주제이기도 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철학자마다 다르다. 플라톤은 에이도스와 이데아 사이를 이야기했고, 데카르트는 연장을 설명했으며, 베르그송은 운동이 있다고 했다. 있음을 매개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공통된 답이었다. 이렇게 관점은 매체로 바뀐다. 매체가 구체적인 형상을 잡아가고 진화가 본격화되던 19세기 후반부터 철학자들의 관심은 언어와 매체가 집중되어있는 도시(Urban)로 쏠렸다. 언어에 집중했던 이들은 소뤼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를 필두로 구조주의를 구축했고, 도시에 집중했던 이들은 사회이론을 검토했다. 그들은 도시를 배경이 아닌 일렬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마르크스(Karl Marx , 1818~1883)에게 도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구축되는 장이었으며, 베버(Max Weber, 1864~1920)에게는 개인으로 해체된 씨족 단위를 국가 단위로 넘겨주는 일종의 결속 장치였다.

그들의 관점은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즉 이전에 없던 자본주의 체제의 탄생을 설명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새로움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움을 해명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변화의 궤적과 변화 그 자체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설명은 특히 인간이 새로움에 이끌리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1892~1940)은 이를 고민하며 마르크스와 베버 사이에서 판타즈마고리아라는 환등기 기술을 재고한다. 벤야민에게 판타즈마고리아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만든 환상이었다. 도시에서 시민은 끝없이 변하는 유행을 추격하며 진화한다. 그러나 실제로 변화하는 것은 없으며,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공고히 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에게 판타즈마고리아는 마법(魔法)과 같았다. 그 마법은 우리게 보이는 무언가를 제공할 뿐, 우리의 손에 잡히는 실체는 아니었다. 판타즈마고리아는 원리상 통제자는 상을 볼 수 없되, 목격자는 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 경계에 환등기라는 기계가 있다. 워넬이 묘사하는 시스템 또한 이와 흡사하다. 직쏘가 게임에서 객체로 등장하는 순간, 게임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살육을 재생산하고 피해자를 홀린다. 에론 역시 스템을 이용하는 순간, 스템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다.

이용자가 시스템에 종속되는 이 모습은 <업그레이드>의 독특한 카메라 운용에서 형상화된다. ‘락 캠 앤 락 스탭’(Lock Cam & Lock Step)이라고 불리는 이 기법은, 배우를 향한 카메라를 배우의 몸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관찰 대상은 배우가 되고, 배경은 움직이게 되는 이 기법은 그레이의 몸에 붙은 인공지능의 시선을 대변하기도 한다. 락 캠 앤 락 스탭은 주로 그레이가 스템의 접근을 허락한 상황에저 발동하는 액션 시퀀스에 사용된다. 액션 시퀀스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액션을 휘두르는 그레이의 몸을 보지 못한다. 대신 액션으로 인해 그의 몸에 새겨지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기술의 이용이 남기는 것이란, 결국 몸에 새겨지는 갖가지 고통뿐이다. 이는 게임의 주체이자 객체였던 직쏘의 구체적인 형상과도 같다. 기술을 이용하는 순간, 생각과 몸은 주체의 것이 아니게 된다. 시스템에 의해 객체로서 관찰될 뿐이다. 워넬이 바라보는 기술이란 이렇게 이용자의 신체에 빙의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빙의한 순간, 주체는 급격히 대상화된다. 그리하여 기술의 관찰 대상이 될 뿐이다. 워넬에게 기술이란 통제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는 빙의하는 비가시 주체이다.

 

〈인비저블맨〉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인비저블맨〉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피)권력, 휘둘리는 가시적 객체

그렇다면, 워넬의 기술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누가 기술을 창조하고,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쏘우’에서 게임을 시작한 것은 크레이머였다. 인정받는 건축가였던 그는 교통사고를 계기로 게임을 설계했으며,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들을 계몽시키겠다는 목적을 퍼트렸다. 스템을 설계한 젊은 천재 공학자 에론의 본래 목적은 장애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템에게 통제권을 내어주고, 스템은 그레이를 숙주로 삼는다. 사고로 사지마비가 그레이는 생명의 위협을 받자 스템의 통제를 허용한다. 스템은 결국 로봇도 인간도 아닌, 단백질 컴퓨터라고 부를만한 디지털 생명체가 된다. 세계 최고의 광학 기술자였던 애드리안은 클로킹 기술을 이용한 투명 슈트를 만든다. 사이코패스였던 그는 슈트를 세실리아를 스토킹하는 데 사용하며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세실리아는 이 슈트를 훔쳐서 애드리안을 죽이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여기서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기술의 발명자가 나무랄 데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들은 기술로 죽었다는 것이다. ‘실력’은 당연해 보이는 요소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력은 대체로 목적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실력을 설명해야 할 때, 대부분 기술(Skill)과 역량(Capacity) 사이를 고민할 것이다. Skill의 어원은 차이(distinction), 조정(adjustment), 안목(discernment) 등을 뜻하는 게르만 고어 skil에서 왔으며, 이는 자르다(to cut)를 뜻하는 인도유럽조어(Proto-Indo-European) skel-에서 유래하였다. Capacity는 취하다(to take)를 뜻하는 라틴어 capere에서 왔는데, 이는 움켜쥐다(to grasp)를 뜻하는 인도유럽조어 kap-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무언가를 자르는 행위와 움켜쥐는 행위를 이를 단어가 필요한데, 자를 부분과 움켜쥘 부분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발견(Find)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Find는 공해(公海)를 뜻하는 그리스어 pontos에서, 우연히 마주침을 의미하는 게르만 고어 findan을 거쳐 형성된 단어(O.E.D)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르는 행위와 움켜쥔다는 행위를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 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어떤 것을 목적에 의하여 힘으로 가공한다는 권력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워넬의 모든 드라마는 권력에 의한 갈등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힘을 집행하는 것은 기계이다.

이는 맨 앞에서 언급했던 키틀러의 유물론적 관점의 매체-운명론을 떠올리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어서 언급했듯이, 이는 워넬의 영화에 대한 정확한 독법이라고 볼 순 없다. 키틀러의 매체-운명론의 중력은 진화의 과정에는 인간이 없다(혹은 사라졌다)는 데에서 온다. 그러나 <업그레이드>에서도 스템은 진화를 위해 인간을 필요로 했다. <인비저블맨>에서도 인간적이라고 볼 수 없는 애드리안이 세실리아를 원했다는 점은 의심스럽다. 이때, 모든 기술과 기계가 목적을 전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전재 목적을 향하고 있는 만큼, 실력은 결국 목적이 내건 미래상에 조응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실력은 종종 통제와 같은 권력 관계에 놓인다. 실력이란 목적이 요청하는 미래에 위협되는 요소를 발견(Find)하고 통제하는 것과 같다. 이 점에서 실력이란, 특정한 부분이 만족할만한 상황을 위해 사태를 가공하는 행동의 전개에 가깝다. 결국, 모든 실력은 베타성을 통해 목적의 안정적 확보를 전제한 행위인 셈이다. 실력은 필연적으로 구획을 통해 차별할 대상을 요청하며, 이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을 수반한다.

한편으로, 통제는 발견 없이 가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연을 거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실수가 잦은 실력’이 가능한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얼핏 들었을 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가능한 경우로 만드는 상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득점하는 야구선수는 상상할 수 있다.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초과하는 실적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들의 실력은 대체로 운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렇다 한들 그들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안정 가능한 요소를 발견해내는 셈이다. 이때 알 수 없다는 사태는 말 그대로 인지할 수 없는 사태를 뜻한다. 인지하지 못한다면 발견 또한 불가능하다. 그리고 워넬의 영화에서 기술탄생의 계기는 대체로 우연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워넬은 이 우연적인 상황을 영화 속에 잘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반전의 계기로 삼는다. 그리고 우연에 의한 결과만 묘사한다. 그의 세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역량이란, 딱 여기까지인 셈이다.

워넬의 영화에서 인물이 실패하는 원인이 되는 순간은 선명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크레이머가 마크 호프만을 죽이지 않고 제자로 삼는 순간, 우리는 그의 심중을 확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에론이 스템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순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없으며, 애드리안이 세실리아의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순간은 모두 상황이 반전되는 계기가 된다. 이 인과를 벗어나는 캐릭터가 딱 하나 있다. 그가 바로 스템이다. 스템과 에론의 차이가 있다면, 에론은 사실상 스템을 우연히 만들었다. 실력이 요구하는 통제의 기반, 즉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템은 버튼을 우연히 누르지 않았다. 스템은 수년간 천천히 상황을 쌓고, 이때가 아니라면 안된다는 필연적인 순간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에 응한다면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아니라면 배제해나간다. 그 끝에 마침내 그레이를 완벽히 지배하고 단독자로 서게 된 디지털 생명체가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이 하나 있다. 스템은 그레이를 통제했다기보다 수용했다는 점이다. <인비저블맨>에서도 세실리아는 애드리안의 클로킹 슈트를 수용한다.

기술이 인간을, 인간이 기술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스템과 세실리아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스템이 그레이를 수용하는 방식은 끝없는 유토피아를 그레이에게 제공하는 방식이면, 세실리아가 클로킹 슈트를 수용하는 방식은 디스토피아를 직시하는 방식이다. 이 대칭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아샤와 에밀리라는 안정을 확보해주는 존재의 죽음에 기초해있다. 그레이에게 아샤는 디지털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디지털을 배척하는 자신의 약점을 메워줄 존재였다. 에밀리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했던 세실리아에게 강인한 롤모델이 되어주었던 존재였다. 기술은 이들을 앗아가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스템으로 인해 그레이는 아샤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세실리아는 클로킹 슈트를 통해 자신의 강인함을 전개한다. 우연한 계기로 발견된 기술이 향하는 곳이 그레이와 세실리아라는 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레이는 삶의 주도권을 기꺼이 아샤에게 넘기는 견유주의자에 가깝고, 세실리아는 도망치면서도 반려견을 걱정하고 우연히 자신에게 도달한 500만 달러라는 힘을 사촌에게 나눈다. 이들은 권력과 통제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인물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권력 관계에 포획되고 휘둘린다. 기술의 권력이야말로 대상에 빙의하고 주체를 대상화하는 은비(Occult)한 ‘신체강탈자’이자, 숨겨진 자연인 것이다.

워넬식 SF의 인물들에게는 기술을 거부할 선택권이 없다시피 했다. 기술에 완전히 흡수된 그레이는 유토피아로 떠나고, 디스토피아에 눈 뜬 세실리아의 눈은 희번덕거린다. 그렇다고 기술을 거부하고 도달한 곳도 안전하지 않다. <업그레이드>에서 기술을 거부하거나 거부당한 이들이 도달한 곳은 게토였다. <인비저블맨>의 세실리아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이 점에서 워넬의 SF는 인간의 몰락에는 대안이 없다고 외치는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와 극단적 신러다이트주의자(Extreme New Ludditist) 테드 카잔스키(Theodore John Kaczynski, 1942~) 사이에 있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워넬의 태도는 이들처럼 진지하지 않고, 그들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오히려 그는 70년생으로서 자신을 길러냈던 당시의 B급 문화와 ‘주입’이란 TV를 둘러싸고 날뛰는 신화를, 펄프 픽션이라는 당시의 장르적 스타일로 21세기에 넘겨주려는 시도와 같다. 그의 공학적 오컬트는 고약하고도 안전은 보장할 수 없는 유령들의 서커스인 셈이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현재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 글을 쓰고, STRABASE에서 일하며,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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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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