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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고교 야구팀 여자 투수와 ‘거위의 꿈’-<야구소녀>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고교 야구팀 여자 투수와 ‘거위의 꿈’-<야구소녀>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2.11.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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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야구소녀' 포스터.
영화 '야구소녀' 포스터.

스포츠영화 <야구소녀>(2020·감독 최윤태)의 결말 부분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주수인의 엄마와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단장이 계약서를 작성하는 장면이다. 단장이 5,000만 원이 적힌 계약서를 내밀자 엄마는 당황한 채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엄마는 단장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한다. 한 달만 기다려 달라고, 그러면 그 돈을 마련해 보겠다고 말한다. 빚쟁이에게 애원하는 듯한 말투다. 엄마로서는 그 돈을 마련할 길이 막막하다. 공장에 다니며 남편과 두 딸을 부양하는 처지 아닌가. 5,000만 원은 아파트 담보 대출로도 빌릴 수 없는 거액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딸을 위해 그 돈을 구해보겠다고 말한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5,000만 원은 SK 구단이 주수인에게 주는 돈이다. 엄마는 프로야구의 시스템을 잘 모른다. 그래서 딸이 그 돈을 구단에 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무지는 엄마의 잘못이 아니다.

<야구소녀>에서 이 장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후렴구에 해당하는 장면이어서 서사 전개나 주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에피소드도 아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애잔하다. 전후 사정을 보면 이해가 간다. <야구소녀>의 엄마는 딸이 야구를 하는 것을 줄기차게 반대한다. 그리고 딸이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자 취직을 강권한다. 자신이 다니는 공장에 딸을 소개하고, 실제로 주수인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수인은 야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프로야구단 직원 입사 제안을 뿌리치고 험난한 도전을 거쳐 프로야구 2군 선수가 된다. 엄마는 그러한 딸을 위해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겠다고 애원하는 것이다. 엄마가 단장에게 간청하는 행위에는 생활고 때문에 딸이 운동하는 것을 반대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포함되어 있다. 계약서 장면은 딸을 향한 가난한 엄마의 진심과 속죄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영화 '야구소녀'의 어머니 스틸컷.
영화 '야구소녀'의 엄마.

<야구소녀>의 엄마는 표면적으로 ‘나쁜 엄마’이다. 이는 국내 스포츠영화의 다른 엄마들과 유사한 점이다. <말아톤>과 <4등>에서 엄마들은 자식에게 고된 훈련을 강요하고, 좋은 성적을 요구한다. 그들은 자식의 꿈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때문에 ‘나쁜 엄마’가 된다. <야구소녀>의 엄마는 <말아톤>과 <4등>의 엄마와 반대 방향에서 ‘나쁜 엄마’이다. 딸의 꿈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딸의 도전을 방해한다. 하지만 <야구소녀>의 엄마는 결국 딸의 미래를 위해 거금 5,000만 원을 구해보겠다고 결심한다. 영화에서 ‘나쁜 엄마’ 캐릭터는 자주 영웅적인 주인공의 내적 성장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야구소녀>에서 엄마가 ‘나쁜 엄마’ 캐릭터로 등장한 것도 주수인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다. 주수인은 ‘나쁜 엄마’와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성숙해지고, 나아가 꿈을 이루기 때문이다.

<야구소녀>의 서사와 캐릭터, 주제는 전형적이다. 주인공인 주수인은 스포츠영화의 핵심인 민중 영웅 캐릭터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주수인은 미천한 혈통(가난한 집의 맏딸)에 탁월한 능력(최고 구속 134km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의 소유자이다. 고교 야구팀 유일의 여자선수라는 점은 설상가상의 조건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야구소녀>는 주수인이 여자라는 점에 주목한다. 실제로 감독과 코치는 주수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수시로 강조하면서 야구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을 권한다. 그런데 감독과 코치의 말이 무책임한 것은 아니다. 주수인은 고교 야구팀 여자 투수로서는 ‘천재’이지만, 최고 구속 134km는 프로야구 투수의 최하위 그룹에 속한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130km가 안 되는 구속으로 통산 100승을 달성한 선수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확률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희귀 사례이다. 게다가 코치는 눈물 젖은 빵만을 먹어온 선수 출신이다. 그의 충고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서 진정성이 있다.

 

영화 '야구소녀'에서 주수인이 고민에 빠진 모습.
영화 '야구소녀'에서 주수인이 고민에 빠진 모습.

하지만 주수인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주수인에게 프로야구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다른 스포츠영화와 마찬가지로 <야구소녀>에서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주수인은 목표 달성에도 어느 정도 성공한다. 마침내 프로야구 2군에 입단함으로써 꿈을 이룬다. 즉 주수인은 미천한 혈통,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다. ‘승리하는 민중 영웅’이라는 스포츠영화의 새로운 흐름과 일치하는 캐릭터이다. 또 주수인은 10대 소녀가 프로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여성 인물이 남성 주인공의 조력자 혹은 수동적인 캐릭터로 등장한 이전 시기의 스포츠영화와 다른 점이다. <야구소녀>는 10대 소녀인 운동선수들이 모험과 도전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확보한다. 주수인은 <킹콩을 들다>의 영자, <걷기왕>의 만복과 유사한 캐릭터이다. 그렇다면 주수인, 영자, 만복은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장르적 특성으로 확장해서 살펴볼 여지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수인은 최고 구속의 한계, 감독과 코치의 이분법적 성 이데올로기, 가난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린다. 특히 주수인은 감독과 코치가 “넌 여자라서 안 돼.”라고 포기를 강요하자 “야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방해꾼에서 조력자로 변신한 코치의 도움으로 너클볼을 연마해 마침내 프로야구 2군에 지명된다. “난 해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라고 되풀이했던 자신의 말을 실천한 셈이다. 주수인은 꿈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주체이며, 스포츠계의 이분법적 성 이데올로기를 극복한 여성 캐릭터이다.

 

영화 '야구소녀'에서 주수인이 프로야구에 입단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고 있는 모습.
영화 '야구소녀'에서 주수인이 프로야구에 입단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고 있는 모습.

<야구소녀>는 현실의 벽을 향해 강력한 직구를 던진다. 이 직구가 울림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담백한 연출과 연기 덕분이다. <야구소녀>는 일반적으로 영화가 요구하는 극적인 서사 전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수인과 코치 혹은 주수인과 엄마의 갈등과 대립 관계에도 여유 공간을 만들어놓는다. 먹고사는 일 때문에 딸에게 신경 쓰지 못해서 야구에 무지한 엄마의 계약서 에피소드는 그래서 더 여운이 깊다, 주수인의 행적에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낭만적인 세계관이라고 비판받을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야구소녀>는 주수인의 도전을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풀어나감으로써 현실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현실을 반영하되 주제를 강요하지 않는다.

<야구소녀>는 소박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울림은 소박하지 않다. 주수인의 행적은 가수 인순이가 부른 노래 ‘거위의 꿈’의 가사와 일치한다.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주수인은 오늘도 거위처럼, 비록 뒤뚱거릴지라도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야구소녀>는 우리가 이 시대의 모든 주수인‘들’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도록 해준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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