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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국의 문화톡톡] 수캐-사나이 그리고 노란 스카프
[최양국의 문화톡톡] 수캐-사나이 그리고 노란 스카프
  • 최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07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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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lieve that each of us is given one sentence at birth, and we spend the rest of our life trying to read that sentence and make sense of it.”(우리 삶의 시작과 끝은 한 문장으로 표현되며, 삶이란 그 한 문장에 대해 읽고 이해하며 의미 있게 만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다.)

- Li-Young Lee (미국 시인) (1957년~) -

 

도시의 가로등이 은행나무의 꿈을 안는다. 달의 영혼이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다. 스르륵 툭툭 떨어지는 노란 혼령은 바람이 불며 흩날린다. 가지를 뻗으며 잎으로라도 만나려던 소란스럽던 손짓이 멀어져 간다. 미처 한 문장도 채우지 못한 영혼이 어린 왕자의 고향별로 떠나간 날. 은행나무는 갈바람에 꿈을 깨며 방랑의 자유를 찾아 노란 커튼을 내린다. 새롭게 태어나는 바람과 우물 속 한 문장의 꿈은 서로의 자화상 되어 마주 보며 서 있다. 1과 1의 11월은 자화상을 그리며 그렇게 익어간다.

 

시간의 / 흔적 반영 / 생명력 / 그려가고

은행나무는 달과의 만남을 위해 노란 커튼을 내린다. 바람이 남긴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며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인 서정주(1915년~2000년)의 자화상, 수캐로 다가온다.

 

* 서정주 생가-가을, Google
* 서정주 생가-가을, Google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고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자화상>(1941년), 서정주 -

 

이남호는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2003년, 열림원)에서, “~(전략)~. 이런 상황에서 어린 화자는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로 제시된다. 여기서 화자를 수식한 까만 손톱은 삶의 누추하고 비천한 성격을 드러낸다. 그다음에는 역시 집에 있지 않은 외할아버지에 대하여 진술한다. 외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화자는, 바다라는 미지의 세계로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외할아버지처럼, 고향의 삶에 안주하지 못하고 멀리 떠돌아다니게 될 운명을 지녔다. 이러한 환경과 운명의 존재이기 때문에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따스한 보살핌이나 제대로 된 교육과는 거의 무관하게 자랐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람’은 단순히 그러한 것들이 결핍된 거친 성장 환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으로 세상의 질서나 제도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이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혼돈 속에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화자는 이러한 ‘바람’에 이끌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것처럼 자라온 사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데, 이런 태도 자체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멸시하는 세상에 대한 그의 오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중략)~. 바람 속에서 성장한 삶, 세상으로부터 죄인과 천치로 멸시당하는 삶, 어쩔 수 없이 불순한 충동에 이끌리는 삶, 그래서 불순한 피가 섞인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이 화자의 자기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마지막 구절에서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을 느러트린/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라는 자기 모멸적 진술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삶을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에 비유한 것은 충격적이다. 여기에는, 불순한 피로 인하여 스스로 지치고 소외된 실존의 길을 걸어온 화자의 모습과 함께 그러한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한 화자의 오기 어린 심정이 나타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모멸적 인식을 이처럼 강렬한 언어로 당당하게 드러낸 경우는 달리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후략)~.“라고 한다.

시적 화자는 스물세 살의 어느 날에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과거를 욕되고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아픔을 후회 없이 받아들이는 미래 지향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시를 통한 삶에의 강렬한 욕구와 극복 의지를 나타낸다. ‘볕’과 ‘그늘’은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적 상황의 양면성을 대변하며, 시(詩)에 ‘이슬’을 맺히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피’를 부각한다. 이는 기회주의적 자기 합리화에 대한 원초적 죄의식의 발로 또는 혈연과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고통과 고난의 길을 상징화하며 투명한 빨강으로 다가온다. ‘볕’과 ‘그늘’의 종속변수, 그리고 ‘피’의 독립변수로 이루어진 삶의 함수는 헐떡거리는 ‘병든 수캐’라는 존재 값을 도출한다.

삶의 일상은 과거~현재~미래가 어우러지며, 대부분 같거나 유사한 문장의 반복으로 채워져 간다. ‘나-너’와 ‘우리’의 자화상이 필요한 까닭이다. 자화상은 스스로 마음을 되돌아보며 살피는 자아 성찰을 전제로 한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는 종의 아들보다는 아침 이슬의 핏방울로 헐떡거리며 온 수캐로 남고자 하는 ‘나’를 향한 자아 성찰의 창은 무엇일까? 할머니와 외할아버지~부모를 거쳐 ‘나’에게 온 시간이, 자아 성찰을 위한 내적 창은 아닌지. 시간의 내적 창은, 흙 바람벽과 함께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바람으로 인해 불을 밝힌다. 찬란히 밝아오는 어느 아침 날, ‘수캐’의 헐떡거리는 호흡은 동적인 자아 성찰을 통한 존재 욕망으로 확대되며, 바람의 음악처럼 ‘나’의 생명력으로 연결된다.

 

공간의 / 가치 추구 / 원형력을 / 표출하니

노란 커튼을 내린 은행나무는 갈증이 난다. 우물 속 자연에 머무르는 시간을 마시며 자기 모습을 그린다. 우물 속 추억을 찾은 윤동주(1917년~1945년)의 자화상, 사나이로 허리 숙인다.

 

* 윤동주 자화상과 우물, Google
* 윤동주 자화상과 우물, Google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1939년), 윤동주 -

 

김권동은 <1930년대 후반 「자화상」의 문학적 특성에 대한 연구(2008년, 한민족어문학회)>에서, “~(전략)~. 여기서 우물 밖의 어둠의 세계와 우물 속의 달빛이 비친 세계는 서로가 대비된다. 이 같은 대비를 통하여 내면 의식의 갈등을 암시하고 있는데, 시적 화자는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달빛이 비낀 우물 속이라는 빛의 공간에서 찾으려고 한다. 여기서 우물 밖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이고 현실적 자아의 세계이며, 우물 속의 세계는 잃어버린 세계이자 이상적 자아의 세계가 된다. 그것은 어둠에 휩싸인 우물 밖의 세계와는 정반대로, 우물 속의 세계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세계로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파아란 바람이 부는 우물 속의 세계는 순수하고 맑고 밝은 아름다움이 투영된 세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우물에 비껴 추억처럼 서있는 사나이는 이상적인 자아이고, 우물 밖에 찾아와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자아는 현실적 자아이다 이와같이 우물 속과 우물 밖의 대립은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적인 자아가 대립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중략)~. 들여다보다, 돌아가고, 가엾어져 도로 가 들여다보고, 다시 미워져 돌아가다. 그리워지는 그 사나이는 지속적으로 변하는 자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후략)~.”라고 한다.

시적 화자는 일제 강점기인 젊은 날의 어느 시기에 자신의 현재 삶을 성찰하면서, 부끄러운 자신에 대한 미움과 연민, 그리고 과거의 순수한 마음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고 있다. ‘사나이’는 현재의 삶에 대해 시간상으로는 과거~현재에 대해 성찰하며 미래와는 단절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시작(詩作) 중 <무서운 시간>(1941년) 속 “거 나를 부른 것이 누구요.~(중략)~.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나를 부르지 마오.”가 이에 대한 답을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공간적으로는 한정된 장소인 우물에 비친 자연과 자아를 대비하며, 유사한 문장의 반복을 통한 초라한 자아에 대한 내적 갈등을 부각한다. 미움보다는 연민에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자아의 모습을 통해, 추억처럼 서 있는 ‘사나이’로 남고자 하는 자아 성찰의 창은 무엇일까? 달~구름~하늘을 만나고 건드리는 바람은, 우물을 찾은 자아를 가을의 색깔로 일깨운다. 자아를 일어나게 하고 성찰을 잉태하도록 한 우물은, 자아 성찰을 위한 외적 창으로 작용한다. 우물이라는 외적 창은, 미움~연민~미움~그리움을 향한 반복적 독백을 통해 추억 속의 ‘사나이’를 불러내며 내적 갈증을 해소하도록 한다. 노란 달이 처연히 떠오른 어느 저녁 날, 우물 속 자아에 정지된 듯 갇혀있는 추억은 정적인 자아 성찰을 통한 존재 열망으로 확대되며, 우물 속 회화처럼 ‘사나이’의 원형력으로 되살아난다.

 

바라는 / 자아 성찰의 / 자화상은 / ‘어린 왕자‘

닫힌 창문 밖으로 속절없이 흩날리는 노란 영혼은 장미를 여름처럼 만난다. 바람과 우물 속 자연에 담겨 있는 시간을 열며 자기 모습을 그린다. 사막 속 바람과 우물을 찾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1900년~1944년?)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 1943년), 노란 스카프를 날리며 여우, 그리고 나와 얘기(YBM/THE TEXT 번역, 2007년) 한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와 노란 스카프, Google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와 노란 스카프, Google

“~(전략)~. 아니. 나는 친구를 찾고 있어. 길이 든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 “그건 사람들이 종종 잊고 사는 건데,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중략)~ “완벽한 곳은 없다니까.” 여우가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 내 생활은 지루해. 나는 닭을 사냥하고, 사람들은 나를 사냥해. 닭들은 다 똑같고, 사람들도 다 똑같아. 정말 지루해!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삶에 햇살이 가득 찰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처럼 들릴거고, 내 집 옆의 밀밭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역시 음악처럼 들릴거야. 그리고 햇빛이 비치면 밀밭에는 네 머리칼처럼 금빛이 감돌겠지. 밀을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날거야. 놀라운 일이지 않니! ~(후략)~.”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제까지의 자아를 오늘의 자화상에 남긴다. 시간이 지나간 흔적은 바람으로 일어난다. 자아 성찰을 위한 ‘나’와 ‘너’의 캔버스에, 시간의 기록과 이를 반영한 긍정의 도돌이표와 부정의 마침표가 그려진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온 ‘스물세 해의 나’는 과거의 시간이 남긴 욕망의 화석과 바람을 통한 주체적 의지를 표출하는 데 집중한다. ‘나’에 대한 획일적 합리화와 개인적 상황에만 몰두하며 주름살이 들어간 섣부른 자화상을 남기며 또 다른 자화상을 찾게 한다. ‘우리’를 반영한 ‘나’의 객체적 반성을 통한 관계 맺음의 익숙함마저 드러난 자화상이, 바람을 흔들며 음악으로 살아나게 하는 건 아닐까?

“~(전략)~.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모래의 빛나는 신비를 이해했다.~(중략)~.이건 마치 우리가 사용하도록 준비된 우물 같아. 도르래, 두레박, 그리고 밧줄까지.“ 어린 왕자는 웃으며 밧줄을 잡았다. 그러자 도르래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르래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돌아가면서 커다란 소리로 삐걱거렸다. ”들어봐! 우리가 이 우물을 깨웠더니 지금 노래하고 있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후략)~.

공간의 연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우물 밖의 자아를 우물 속의 자화상에 넘긴다. 공간이 확대되는 궤적은 밧줄로 이어진다. 자아 성찰을 위한 ‘나’와 ‘너’의 캔버스는, 공간의 연결과 이를 반영한 현실의 마침표와 이상의 도돌이표를 요구한다. 추억처럼 있는 ‘우물 속 사나이’의 우물은 외딴 자연에 있고,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는 그 길이를 알 수 없는 추상적 대상으로서의 밧줄은 숨겨져 있다. ‘사나이’에 대한 한정된 공간 속 자아 성찰은 추상적 대상으로만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은 우물 밖에서 멈추어 있다. ‘시간의 흔적’을 반영한 ‘사나이’의 주체적 의지를 통한 이상의 깨어남이 드러난 자화상이, 우물을 깨우며 노래하게 하는 건 아닐까?

노란 영혼을 떠나 보내는 도시의 스산함 속에서 피어난 장미. 우리 마음의 사막에, 육 년 전 떠난 B-612의 어린 왕자가 노란 스카프를 한 채 장미의 자화상을 들고 돌아온 듯하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미래 자화상을 해체하여 시공간을 반영한 한 문장으로 그려 본다. ”‘우리의 자화상’은 노란 스카프를 한 ‘어린 왕자’다“. 두 문장 이상은 형용사, 변명과 거짓, 그리고 지루함이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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