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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간절하게 원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라-<킹콩을 들다>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간절하게 원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라-<킹콩을 들다>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2.12.05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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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을 들다' 스틸컷.
'킹콩을 들다' 스틸컷.

<킹콩을 들다>(2009)는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특징이 집약되어있는 영화다. 비인기 종목인 역도 경기의 실화를 각색했다. 무엇보다 2000년대 스포츠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이 시기에는 여성 인물이 주인공인 스포츠영화만 해도 10편가량 되는데, 이는 2000년대 이전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여성 인물의 역할과 성격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남성 주인공의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주거나(<YMCA 야구단>, <투혼>, <전설의 주먹>), 남성 인물이 정신적으로 재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글러브>, <미스터 고>). 여성이 남성 주인공을 위해 무조건 자신을 희생하거나 소극적, 수동적인 인물로 등장하던 이전 스포츠영화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여성 인물들은 대부분 ‘미천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 국가대표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사정은 별반 차이가 없다. 즉 그들은 식민지 여성, 고아,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는 ‘아줌마 3총사’, 탈북자 등이다. 심각한 부상으로 고통받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열악한 환경에 굴복해 꿈을 포기하는 인물은 없다.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여성 인물은 주체적, 진취적, 능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스포츠영화가 한국사회의 변화 양상을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영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모두 포함돼있는 작품이다.

<킹콩을 들다>는 전남 보성 지역 역도부 학생들이 2000년 제81회 부산 전국체전에서 총 15개의 금메달 중 14개를 차지하고, 출전선수 5명 가운데 4명이 3관왕에 오른 실화를 각색한 영화이다. 지도자들 가운데 정인영 감독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역도 남자 52kg급 금메달리스트인 전병관 선수를 키워내기도 했는데, 전병관 선수는 그 인연으로 <킹콩을 들다>에 헤드 코치로 출연했다. <킹콩을 들다>는 주인공 영자가 역도 문외한에서 국가대표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때 영자가 모험과 도전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킹콩을 들다' 스틸컷.
'킹콩을 들다' 스틸컷.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영웅을 두 종류로 나눈다. 여행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웅과 여행에 던져지는 영웅이다. 전자의 영웅은 모듬살이의 필요에 반응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하러 떠난다. 후자의 사례로는 징집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여행을 들 수 있다. <킹콩을 들다>에서 영자를 포함한 여중생들은 ‘여행을 스스로 선택한 영웅’이다. 주인공 영자는 위기의 탈출구로 학교에 새로 생긴 역도부를 선택한다. 영자는 쓰레기장에서 상장과 사진을 태우는 이지봉 코치에게 접근한 후, 쓰레기 포대를 번쩍 들어 옮기면서 “제가 이래봬도요. 쌀 한 가마니 거뜬 들고요. 힘도 세서 어른들이 역도 하면 잘할 거다, 잘할 거다 그랬는디.”라고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해 노력한다.

<킹콩을 들다>의 여학생들은 무엇인가를 상실했거나, 무엇인가가 결핍된 존재들이다. 테니스부원인 보영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롤러를 끌거나 경기장의 돌을 줍는 신세이며, 여순은 편모 가정의 생활보호대상자이다. ‘사차원 소녀’ 민희는 친구들의 따돌림 대상이다. 이 여중생들은 역도 관련 지식이나 경험, 정보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인 결핍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도전을 감행한다. 영자의 행동은 모험의 자발성과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수메르신화의 이난나 혹은 <단군신화>의 웅녀와 비교할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웅녀에게 벌어진 양대 사건은 변신과 출산이다. 변신은 곰에서 사람으로 재탄생한 것이고, 출산은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일이다. 변신의 출발은 웅녀가 환웅을 찾아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빈 것이다. 즉, 웅녀는 ‘원한다(願)’는 행위의 주체이다. <킹콩을 들다>의 영자와 <단군신화>의 웅녀의 행적이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웅녀와 영자의 행적은 인물의 주체성과 서사의 모티브 측면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곰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원한 행위는, 영자가 역도부원이 되기 위해 이지봉 코치 앞에서 쓰레기 포대를 번쩍 들어 올린 장면과 겹쳐진다. 그렇다면 영자는 웅녀, 이지봉 코치는 환웅에 대응하는 인물이 된다. 또 웅녀가 사람으로 재탄생한 곳은 동굴이다. 영자에게는 역도부 합숙소 ‘수능당’이 단군신화의 동굴에 해당한다. 영자는 합숙소 생활을 거쳐 자아를 지닌 성인으로 재탄생한다.

 

'킹콩을 들다' 스틸컷.
'킹콩을 들다' 스틸컷.

영자에게는 극복해야 할 고난과 시련이 끊임없이 밀려온다. 그가 역도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다. 보성여중 역도부는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역대회에 강제로 출전해 망신만 당한다. 역도부가 승승장구하자 이번에는 외부 세력의 불순한 음모로 합숙소 ‘수능당’이 폐쇄된다. 선수들은 인근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코치의 폭언과 폭행, 차별을 견디다 못해 역도를 포기할 결심까지 한다. 그 와중에 이지봉 코치는 확장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영자는 좌절하지 않고 훈련에 매진해 태극마크를 단다.

국가대표 선수는 2000년대 스포츠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이다. 운동선수인 여성 주인공은 2000년대 스포츠영화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 유형인데, 여기에 각 종목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국가대표라는 요소가 추가됐다. 국가대표 선수는 특정 종목 최고의 실력자가 영화의 프로타고니스트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스포츠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은 국가대표라고 해도 ‘민중 영웅’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역도, 핸드볼, 탁구, 아이스하키 등 비인기 종목의 선수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실제로 국가대표인 여성 주인공 중에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인물이 거의 없다. 이는 스포츠영화에서 혈통이 가난, 질병, 고아, 장애, 부상, 명예의 실추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며, 인물과 관련된 경제적·신체적·정신적 조건이나 환경까지 포함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한미숙은 올림픽 결승전 전날 밤에 남편이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혜경은 이혼한 여성이라는 편견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국가대표2>의 탈북자 리지원은 식당 일을 하면서 외롭게 생활하는 이방인이다. 그런데 영자를 포함한 ‘국가대표 여성 주인공’들은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말에서 내면의 성장과 정신적인 재탄생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킹콩을 들다' 스틸컷.
'킹콩을 들다' 스틸컷.

<킹콩을 들다>에서 흥미로운 점의 하나는 플롯이다. 이지봉과 영자의 플롯이 병립하는 이중 플롯인데, 이는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지봉이 절망을 이겨내고 영자를 국가대표로 키운다는 서사와 영자가 이지봉의 재생과 부활을 매개하는 서사가 공존한다. 이 영화에서 이지봉과 영자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조력자이자 정신적인 스승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중 플롯은 <킹콩을 들다>가 이지봉의 이야기인 동시에 영자의 이야기라는 점을 알려준다. 즉 영자는 여성 인물이면서 영웅과 조력자, 정신적인 스승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영자가 지닌 조력자, 정신적인 스승 면모는 이지봉을 통해 구현된다. 이지봉은 부상으로 은퇴한 뒤 나이트클럽 호객꾼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옛 감독의 소개로 보성여중 역도부 감독이 되지만, 선수 지도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한낮에 낚시하러 가고, 훈련시간에는 의자에 누워서 코를 골며 잠을 잔다. 이지봉이 역도에 다시 애정을 쏟게 된 것은 영자를 비롯한 역도부원들의 간절한 희망 때문이다. 역도부원들은 반강제로 출전한 첫 대회에서 망신과 수모를 겪은 후 합숙소에 모여 슬픔을 나눈다. 그리고 낚시터에서 돌아온 이지봉에게 “불쌍해서 뽑아준 건가요?”, “왜 역도 안 가르쳐 주신대요?”라고 거칠게 항의한다. 이 시퀀스는 이지봉의 정신적인 재탄생을 이끄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킹콩을 들다' 포스터.
'킹콩을 들다' 포스터.

이지봉과 영자의 관계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대위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프롤로그의 배경은 88서울올림픽 역도 경기장이다. 이지봉은 바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다. 카메라는 그의 팔꿈치 뼈가 어긋난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에필로그의 배경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역도 경기장이다. 영자는 금메달을 향해 힘차게 바벨을 든다. 영자는 마지막 3차 시기에서 무려 5㎏이나 무게를 올리는 모험을 한다. 영화는 최종 결과를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난다. 결국 <킹콩을 들다>는 이지봉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영자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는 이지봉과 영자의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구성이다.

<킹콩을 들다>에서 ‘미천한 혈통’의 영자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인 동시에 남성 인물의 부활을 이끄는 조력자이면서 정신적인 스승의 역할까지 한다. 따라서 <킹콩을 들다>는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상징적인 작품이 된다. 특히 영자는 10대 고아 소녀로서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모험과 도전을 감행하고, 그로 인해 내면 성장은 물론 이지봉의 인생까지 바꿔놓는다. 간절하게 원하고, 과감하게 도전한 영자의 행적은 올림픽 금메달 획득 여부와 관계없이 영웅 서사가 된다. 이제 영자와 같은 캐릭터가 스포츠영화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고, 나아가 장르 영화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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