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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혐오와 매혹의 변주곡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
[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혐오와 매혹의 변주곡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
  • 이하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1.0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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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완전하게 추방당할 수 있을까?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추방시키지 못하고 추방당하지 못하는 여성들에 주목한다. 엄마 수경(양말복)과 독립하지 못한 20대의 딸 이정(임지호)는 실체 없는 적대를 서로에게 표하면서도 주변부를 맴돈다. 영화는 이정이 화장실의 세면대에서 생리혈이 묻은 자신의 속옷을 빨고, 그 옆에서 변기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배설을 하는 수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경은 소변을 마치고 이정과 자신의 속옷을 섞고, 이내 그것들의 경계는 뒤섞인다. 여기서 우리는 혐오하고 거부하는 배설물의 ‘에브젝트 abject’의 형상을 마주할 수 있다. 속옷을 공유하는 모녀는 속옷에 묻은 흔적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몸을 증오한다.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은 두 여자가 독설을 퍼붓는 감정의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안에서 길을 잃고는 모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분리에서 실패한 적대하는 여성들 

독립하지 못한 이정은 ‘자신의 방’이라는 주체적인 공간이 지속적으로 침범 당한다. 두 여성은 서로의 공간을 넘나든다. 서랍을 뒤지고, 침대 위에 옷을 살펴보고 심지어는 옷을 가위로 해체하기까지 이른다. 언뜻 드러나는 모녀의 전사는 돌봄 방치한 어머니와 희미하게 이어진 경험적 단서들로 하여금 하나씩 분해된다. 앞서 언급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에브젝트 abject’ 개념에서 어머니의 육체는 추방되어야 할 첫 번째 사물이라고 언급한다. “주체가 되려면 아이는 자기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포기해야 한다. 아이는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선을 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계들을 식별하기란 무척이나 힘들다.” 첫 장면에서부터 경계가 세면대 안에서 합체되는 과정을 통해 생략된 시간 안에서 이정은 추방당하지 못했음을 명명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아이의 추방 과정에 대해 ‘완벽하게’ 중심부에서 이탈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이가 추방한 것들은 단 한 번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추방된 것들은 주체의 의식에 끊임없이 출몰하고 의식 주변에 남아 있다. 주체는 이 추방된 것에서 혐오와 매혹을 동시에 느끼고, 그래서 그/그녀의 자아 경계들은 역설적이게도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는 동시에 유지된다.” 이정은 엄마 수경에게 집을 나갈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인력이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정과 수경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뾰족함이 목도해있다. 빨간색 경차 안에서 싸우다가 내린 이정과 운전대를 잡은 수경은 물리적인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와 동시에 수경은 이정을 죽이려는 충동에 휩싸이고, 자동차 앞 유리로 보이는 이정을 바라보면서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죽음의 위협 아래서 내내 시달린 이정은 자동차를 피하지 않고, 이정의 다리는 다치게 된다. 이정은 이후에 엄마 수경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를 모아서 고소를 하기에 이른다. “상상적인 섬뜩함과 실제적인 위협, 그것은 우리를 유혹하고 끝내는 우리를 집어삼킨다.(ibid)” 극단으로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모녀는 이제 새로운 타자를 찾아 나선다. 수경에게는 연인 종열(양홍주), 이정에게는 직장 동료인 소희(정보람)가 한시적으로 비어있던 자리를 채운다. 불완전한 타자에게 기생한 두 사람은 주변부에서 서로의 존재를 목격하면서, 적대 관계를 다른 관계로 교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존재한다. 공간의 내어줌이다. 

 

이탈과 진입을 반복하는 파괴적 공간 

새로운 집에 들어선 이정과 수경은 본성을 감추고는 정제된 외피를 뒤집어쓴다. 수경은 종열의 초대를 받아 종열의 딸 애정을 만나게 되고, 볼펜을 찾다가 애정의 방 안에서 은밀한 자위 기구를 발견한다.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들이 모르는 사적인 비밀에 예고 없이 빠르게 다가선다. 예민하고 영민한 여성들은 실체 없는 이끌림에 진실에 다가선다. 그런가 하면, 이정은 사무실 책상에서 소희의 usb를 발견하고는 몰래 챙기고는, 그 안에 들어있는 이력서에 기재된 주소지로 무작정 찾아가는 당돌함을 보인다. 묘한 연대와 불편함이 동일선상에 있는 상태에서 소희는 이정을 집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는 플라톤과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코라의 개념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코라’는 우주의 기원적 공간 혹은 저장소를 의미했지만, 크리스테바는 그/그녀가 개인적 정체성의 명확한 경계를 발전시키기 이전에 각 개인에게 속하는 정신 속의 어떤 것을 염두에 둔 듯하다. 이 초기의 심리적 공간에서 유아는, 만일 어머니의 육체와 맺은 그/그녀의 관계가 없었다면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워지고 파괴적이 될 수 있는 풍부한 충동(감정, 본능 등)을 경험한다. 유아와 어머니의 몸이 맺은 촉각적 관계는 유아의 충돌들에 하나의 방향을 제공한다.” 수경에게 애정의 방은 자신이 재현할 수 없는 애정의 엄마와의 연결축이고, 이정에게 소희의 방은 부모로부터 이탈해 구축한 명확한 경계선의 일종이다. 

 

그런 공간을 쉽사리 침범한 모녀는 빠르게 쫓겨난다. 머물지 못함은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과 동시에 공간을 내어줄 수 없다는 거부의 제스처로 인지할 수 있다. 수경과 종열은 결혼을 약속하고 기존의 모성 흔적이 점철되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 탁 트인 창이 보이는 아파트로 이사하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애정의 방을 내어주는 지점에서 다투게 된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코라는 “저장소와 마찬가지로, 코라를(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자라나도록 하는 공간으로서) 어머니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그 자신의 고유한 속성이 전혀 없다. 코라는 자기를 가득 채우는 모든 것의 흔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기를 채우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 줄리아 크리스테아 역시 플라톤이 제창한 코라의 근본적인 생성의 유모로 보는 견해를 수용한다. 수경에게 있어서 이사할 집에 애정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은 채움의 에너지를 여러 형태로 나누어야 함을 의미한다. 눈치 없는 남성은 보이지 않는 불편함을 이해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한다. 반면, 이정은 빠르게 소희의 불쾌함을 눈치챈다. 며칠간 공간을 내어준 소희의 내밀한 비밀(이직하려는)에 다가선 이정은 서운함을 느끼고, 옆에 있기를 바라지만 소희의 눈짓 한 번에 집에서 물러난다. 캐리어를 두고 출근하려는 이정에게 소희는 신발장 앞에서 그녀를 쳐다보고, 이정은 캐리어를 가지고 공간 밖으로 나와 빨간색 경차에 올라탄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자동차 안에서 급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것을 알아챈 이정은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담벼락에 부딪힌 고장 난 자동차를 폐차시키는 장면을 카메라는 시간을 들여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인물 없이 사물만 남은 폐차장의 풍경은 사건의 본질이었던 자동차를 폐차하면서 기의와 기표 사이의 틈 사이를 파고들었던 불안감을 함께 파괴시킨다. 

 

드러낸 혹은 드러난 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숨겨지지 않고 드러낸 몸은 주제를 관통한다. 영화 속에서 옷의 반복적인 등장과 그것을 찢는 행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모녀는 각자의 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을 받지 않고 방에 들어가 옷을 찢으면서 분노를 표출한다. 그렇다면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 왜 옷과 관련이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옷의 쓰임은 몸을 감추는 일종의 도구다. 영화 속에서 수경은 두 번의 드러냄을 통해서 어머니의 상징적인 쓰임에서 탈출한다. “‘기호적’이란 말은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이 말은 변별적 표지, 자국, 표지, 징조 기호, 증거, 각인되거나 씌어진 기호, 흔적, 상형 등의 의미로 쓰였다.(Kristeva 1984:25) 의미작용의 기호적 양상은 말하는 존재의 ‘표층 아래에’ 있는 바를 나타낸다.” 숨겨진 의미를 해체하는 수경의 노출된 몸은 어머니라는 단어의 기의에서 벗어나는 행위에 가깝다. 

종열은 수경에게 사과와 화해의 의미로 코트 한 벌을 선물한다. 이정은 선물을 감추지만 결국 수경은 옷을 찾아내고는 코트 안에 빨간색 속옷을 입고 약속한 장소로 간다. 빨간색은 앞서 언급한 에브젝트가 지닌 혐오를 상징하는 피의 지속적인 쓰임이다. 하지만 수경은 종열이 딸 애정에게도 같은 옷을 선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과 딸을 분리시키지 않는 태도에 분노한 수경은 코트를 벗어던지고 빨간 란제리 속옷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어머니의 신화의 위험성은 “상징적 질서에 더 취약하고, 고통당할 때 더 부서지기 쉽고, 자신을 지켜야 할 때 더 치명적이게 한다.” 여성이 아닌 어머니로 수경을 규정한 종열은 배신한 남성이 된다. 수경이 다시금 몸을 드러내는 시점은 딸 이정의 앞에서다. 갑작스럽게 정전된 집 안에서 수경은 이정을 부른다. 샤워를 하고 있던 수경은 이정에게 휴대폰 플래시를 통해서 자신의 몸을 비춰줄 것을 요구하고, 이정은 등을 돌린 채 휴대폰을 비춰준다. 이때, 이정은 수경의 몸을 응시하지 못한다. 같은 속옷을 공유하면서도 엄마의 몸을 외면하고야 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수경의 몸은 동일시와 부조화를 겪는 이정의 묘한 감정을 증폭시킨다. 아마 이정에게 수경의 몸은 추방당하지 못해서 마주친 동일시하는 자신의 몸을 응시하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가려지게 하는 어둠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하고,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다. 어둠은 추돌했던 두 사람이 정서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이제 이정은 어둠 속에서 목격한 어머니의 몸이 자신의 몸과 다르다고 인식하고는 집 밖으로 나간다. 수경은 방을 비우고 사라진 딸의 흔적을 더 이상 좇지 않고, 이전부터 배우고 있던 리코더 연주를 한다. 이정은 속옷가게에 가서 자신의 속옷을 직접 구매한다. 자신의 속옷 사이즈를 모르는 이정에게 가게 직원은 줄자를 이용해서 속옷 사이즈를 재준다. 다름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위협하는 매혹에서 벗어나서 독립하는 것. 그것은 어머니의 육체(속옷)에서 벗어난 이정의 첫 번째 시도일 것이다. 

 

 

참고 문헌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노엘 맥아피, 앨피 book, 2007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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