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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식의 문화톡톡] 한류, K-콘텐츠, 그런데 왠가 K가
[홍원식의 문화톡톡] 한류, K-콘텐츠, 그런데 왠가 K가
  • 홍원식(문화평론가)
  • 승인 2023.02.14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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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2년 전 최고 시청률에 이어 지난해 2022년 제75회 에미상에서 황동혁이 감독상을, 이정재가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총 6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 비영어권 드라마로서는 최초라는 수식이 붙으면서 그 진가는 더욱 돋보였다. 이제 K-시네마나 K-팝 등에 이어 K-드라마마저 세계적인 한류의 확산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게임’이 아닌 ‘가생’이란 말이 귀에 익지만, 경상도 어느 조그만 산골마을 초등학교 흙 운동장에다 아무렇게나 그려놓고 동무들과 어울려 놀았던 오징어 가생이 다양한 버전으로 세계인의 게임이 되고 있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눈앞에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징어 가생 말고도 사다리 가생 등 참 많은 가생을 하며 해가 저물도록 놀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생이란 말의 뜻은 잘 모르지만. BTS 정국은 지난해 12월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 공연에서 전 세계인의 앞에 섰고, 송혜교 주연의 〈더 글로리〉는 올해의 대성공을 예고해놓고 있다. 분명 한류, K-컬처는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한류

한류의 등장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복잡미묘한 생각을 갖게 했다. 가슴 벅차면서도 의아하고, 놀라우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저급’이나 ‘봉건’이란 딱지 아래 얼른 갖다버려야 할, 아니면 빙빙 ‘주변’이나 맴돌든 우리 한국문화가 ‘뭔가 먹혀든다’는 생각에 많은 한국인들이 가슴 벅차하고 놀라워했다. 나도 그러했던 것 같다. 그것이 서양을 만난 근대 이후 긴 시간 동안 문화적 열등감속에 찌들고 짓눌려 왔던 탓이든, 아니면 어릴 적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애국주의 탓이든 가슴 벅차 오르고 웅크려졌던 어깨가 나도 모르게 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세계인들이, 이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그들이 K-컬처에 이토록 큰 호응을 하는지 어리둥절했다.

하여 우린 불안해하기도 했다. 이게 과연 얼마나 갈까하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 믿지 못하는 불안 섞인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한 10년 전만 해도 한류에 관한 설문 문항을 보면, 한류의 지속 기간을 3년, 길어야 5년 정도로 잡고 있었다. 지금처럼 이토록 지속되리란 기대는 누구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란 표현이 더 좋을 듯하다. 그런데 지금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한류센터장 홍석경 교수가 우리 스스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이 못난 마음을 ‘식민주의’ 근성에서 연원한 것이라고 질타를 하고 있다. 식민주의 근성이란 질타를 들어도 그다지 싫지 않고 오히려 마음 한구석 안도감이 든다. 그는 20대 때 비틀스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6~70대가 되어도 여전히 비틀스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주장을 펴며 우리의 못난 근성을 질타했다. 참 많이 바뀌었다.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서 공연하는 BTS 정국(사진출처: 뉴스1)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서 공연하는 BTS 정국(사진출처: 뉴스1)

외국인들의 한류콘텐츠에 대한 호응은 참으로 놀랍다. 국제교류문화진흥원이 ‘자국의 전체 문화소비 중 한류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을 조사한 통계 자료는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한다. 이에 따르면,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이 29.9%, 미주 지역이 23.9%, 유럽 지역이 21.2%, 중동 지역이 34.3%, 아프리카 지역이 26.0%였다. 수치가 이렇다면 어떤 나라의 경우는 자국의 전체 문화소비 가운데 한류콘텐츠가 50% 정도 차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오히려 밖에서 더 뜨거운 한류 열풍

이처럼 한류콘텐츠가 외국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지만, 한국 안에서의 호응은 그것만 못하다. 더러 시큰둥하거나 부정적이기까지 하다. 세계적으로 호응을 받는 K-시네마와 K-드라마, K-팝이 한국에서는 여럿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아 특별날 게 없고, 내용도 우리의 일상을 벗어난 게 없는 때문일까. K-시네마와 K-드라마에 대해 가족중심적이라든가 심리묘사가 뛰어나다는 평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신파조 섞인 말랑말랑한 연애담에 지나지 않는다란 평가는 그렇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의 경우 물론 국내에서 호의적인 평가도 많지만, 진부한 ‘데스 게임’ 장르의 재판이라든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극중 여성의 역할이나 인식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아무튼 한류콘텐츠에 대한 호응과 평가가 국외보다 국내에서 더 인색한 것은 분명하다. 한류란 바람이 안에서 일어나 밖으로 분 것이 아니라 밖에서 일어나 안으로 불어왔기 때문일까. 한류가 분명히 밖에서 일어나 불어온 것은 맞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진 콘텐츠가 밖으로 나가 한류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 또한 맞지 않은가.

한류의 시간이 좀 흐르다 보니 되돌아보는 논의가 적지 않다. 한류의 시작을 1990년대로 보는 것이나 세 시기로 나눠보는 것은 대체로 일치한다. 곧 1990년대에 시작된 한류가 2010년대 초반, 그리고 몇 년 지나 후반 다시 한 차례 전환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콘텐츠의 내용이나 지역, 매체에 따른 구분이 우연스레 이러한 세 시기 구분과 일치한다. 콘텐츠의 내용에서 보면, 영화와 드라마에서 K-팝, 그리고 웹툰 등 여러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지역으로 보면, 아시아에서 세계로, 그리고 세계의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중심 매체로 보면, 비디오와 CD에서 인터넷, OTT로 변화하였다.

이밖에도 한류에 대한 연구가 다양한 방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류가 시작될 때부터 품었던 물음이 아직까지도 시원스레 풀리지 않은 채 목에 걸린 듯 남아 있다. K-컬처, K-콘텐츠에서 ‘K가 무엇일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한국의’, ‘한국적’과 같은 것에 관계된 물음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적’인 것과 관계된 물음이다. 한류에 대한 연구에서도 이 물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런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별로 쓸 데 없는 무용한 물음, 아니면 어차피 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 같지도 않은 물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닐까라는 짐작만 하고 있다. 한류가 거침없이 질주하는 이 마당에 초를 치거나 무슨 놀부 심보를 가져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생뚱맞다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말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이다.

본 물음에 앞서 한류에서 말하는 K-콘텐츠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문화상품이란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가를 물어본다. 그렇다면 K는 생산지 표시, 곧 한국산(메이드 인 코리아) 이외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적’이란 물음이 자리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K-콘텐츠, K-컬처도 요즘 즐겨 사용하는 K-반도체나 K-조선, K-방산 등과 같이 한국산 문화상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구매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러 K 제품들의 구매는 당연히 품질과 가격에 따라 이뤄질 것이나 K 문화상품은 꼭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구매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재미와 유용성에 더해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감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K-컬처에서 K가 단순히 한국산만을 의미하느냐,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도 담고 있느냐는 것이다. 본인의 물음을 거둬들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후자의 입장이다.

이렇다고 하더라도 막상 구체적으로 무엇이 ‘한국적’인 것인지 말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그나마 개별 콘텐츠 속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은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듯하나, 영화면 영화, 드라마면 드라마 하나의 장르 속에서, 나아가 모든 장르를 관통하는 ‘한국적’인 것을 찾기란 영영 기대할 수 없을 듯하다. 이쯤해서 이 물음을 접을 만도 하건만 물음은 그래도 남는다. 끝내 답이 주어지지 않는 물음을 ‘순수 물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강변해 ‘큰 물음’이라고나 할까.

달리 한류콘텐츠를 즐기는 외국인들에게 한번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한류콘텐츠가 한국의 역사나 정신, 문화 등 ‘한국적’인 것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국뽕’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일 것이며, 지금처럼 한류가 크게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 속에는 잔류하는 한국이 있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 이에 대해서는 한류 관련 연구자나 기관들이 더러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타자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이다. 스스로는 잘 보질 못하고, 비춰진 모습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즉자(卽自)’가 아닌 ‘대자(對自)’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대자로서 자신의 모습이 낯설 수는 있다. 답변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 물음을 내려놓지는 않았으면 싶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오징어 게임(가생)이 한국에 고유한 전통 놀이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놀이가 된 것일까? 듣기에는 그럴 듯하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적으로 성공에 겨워하는 말이거나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각과 고취, 아니면 이에 대한 홍보성 멘트 정도이거나 단순히 세계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뭔가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선언적 언명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과 세계,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은 특수와 보편의 관계로 치환해볼 수 있다. 이러한 특수와 보편의 관계에서 특수가 바로 보편이 될 수는 없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따라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장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류는 특수인 한국 속에 들어있는 보편적 특성이 세계와 만난 건 아닐까. 특수라고 해서 차이성이나 차별성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한국문화라고 해서 한국적인 것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이건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연속과 불연속 속에 공시적(共時的)일 수 있다. 결국 시·공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한류를 이렇게만 이해해도 괜찮을까? K 가운데 보편성 부분만 주목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차이성이나 차별성 부분은 그냥 외면해도 되는 것일까? 보편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도 가진 것 아닌가. 이것으로 유독 한류가 확산하는 까닭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자칫하면 한류의 세계적 유행이 콘텐츠의 내용이 아닌 매체의 활용이나 기술, 포장 등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리고 결국 우리의 논의도 제자리로 되돌아가버릴 수 있다.

이렇듯 끝내 속시원한 답도 갖지 못할 물음을 내다버리지 못한 채 질질 끌어가고, 두서없는 말을 끊어버리지 못한 채 미련처럼 이어가는 것은 K-콘텐츠가 단순히 ‘상품’이 아닌 어엿하고 의미 있는 인문학으로서의 한국학 정립에 기여할 수 있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깊기 때문이리라. ‘무엇’은 뒤로 한 채 ‘어떻게’의 논의만 판치는 한류 논의가 조금은 가볍고 부족해 보인다.

 

글·홍원식
계명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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