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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늦었지만, 응답해야 할 이야기 - <다음 소희>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늦었지만, 응답해야 할 이야기 - <다음 소희>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02.20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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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기 싫은 일을 떠넘기기 위해 찾는 이는 불평하지 않을, 혹은 그렇게 하지 못할 만만한 이이다. 만만한 이에게는 귀찮고 번거로우며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떠넘긴 후 혼내기도 달래기도 쉽다. 게다가 이 일이 꽤나 중요한 일이며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얄팍한 아량이라도 베푸는 척 생색낼 수 있다면 그에게 버거운 일을 맡기는 것도 뿌듯함으로 전환될 수 있다. 대체로 어리고 아직 세상에 발돋움하지 못한 이들, 그들은 너무도 당연한 듯 다 널 위한 것이라는 위선에 갇혀 만만한 이가 되어버린다. 누구도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지만 이 사회는 아주 편한 방식으로 만만한 이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냈고 심지어는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다양한 현장에서 성년이 되지 못한 이들의 죽음이 들려올 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 자체가 절망스러울 때가 있다. 의문은 전혀 모르는 영역의 일에 대한 의아함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러한 사고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놀라는 것은 그들의 일터가 우리가 영위하는 모든 것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속에서, 지하철에서, 혹은 맞물리는 철제가 돌아가는 기계 앞이나 엄청난 무게의 철판이 쌓인 곳에서 그들은 그것들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을 줄 수 있는지 모르는 채 일했고 목숨을 잃었다. 당연히 그곳으로의 선택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취업을 위해 현장에서의 적절한 실습을 시켜줄 것이라는 어른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은 그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어른의 흔적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6년 엄격한 제한으로 사실상 폐지되었던 특성화고의 현장실습은 2008년에 부활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그리 밖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고 간간이 들려오는 사고 소식으로 잠깐의 분노가 지나가는 것을 반복했을 뿐이다. 이를 깊게 들여다보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어떤 구조 속에서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몇몇 시사 프로그램이 짚어보긴 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현장실습이 재개된 후 15년이 지나서야 이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겠노라 선언한 <다음 소희>가 우리 앞에 섰다. 적어도 그들의 죽음이 어떤 이유로, 어떤 구조에서, 어떻게 떠밀렸던 것인지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꾹꾹 눌러 담아 다짐하듯 이야기했고, 처음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그러하듯 많은 설명이 앞서는 다소 평이한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음 소희>의 이러한 선택은 홀로 스러져갔던 이들이 너무나 바랐을 어른의 관심이 무엇을 밝혀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점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 영화에서 특성화고 학생을 등장시킨 작품을 본 것은 <다음 소희>가 세 번째였다. 처음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2021년 <휴가>에서였다. 오랫동안 집회 현장에 있던 재복(이봉하)이 더 이상 진전없는 상황에서 잠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기저기 돈이 필요한 현실이었다. 재복은 급하게 친구의 가구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는데 바로 그곳에 특성화고 학생이 현장실습을 나온다. 사장인 친구는 재복에게 일을 맡기며 간단한 숙지사항을 전달하는데, 이는 특성화고에서 현장실습 나온 이에게도 동일하게 전해진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관련 일을 하던 재복에게 전달하는 내용과 도대체 왜 전산과에서 이 가구 공장으로 배정됐는지도 모를 고등학생에게 전달되는 내용은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휴가>에서의 특성화고 학생은 바로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흐릿하게 영화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그들을 본 것은 2021년의 다큐 <언더그라운드>에서였다. 영화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특성화고를 훑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노동의 기형적인 구조가 어디까지, 어느 연령까지 내려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는 이를 감상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현실을 흘려 보냈다. 현장 견학을 간 학생들이 쉽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는 것을, 땀으로 범벅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 노동자가 정규직 직원에게 샤워실 키를 받아야만 샤워할 수 있는 구조를, 그리고 특성화고 학생들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조건으로 계약하는지도 모르는 채 면접을 보고 취업을 준비하는 현실을 말이다. 교복입은 아이들이 작업복을 입게 되는 그 순간, 이미 작업복을 입어온 많은 이들이 그래왔던 차별 속에 던져질 수 있다는 것을 <언더그라운드>는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이 두 작품에 등장하는 특성화고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필요한 활동이라니까, 이렇게 해야 취업이 되고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니까 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이렇게 해야’한다고 알려주던 이들은 학교나 공장에 있던 어른들이었지만 그들조차 정확히 학생들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일터에서 만난 이들 역시 그들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진 않았다. <휴가>의 재복은 학생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의아해하긴 했지만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학생은 두 어명이 일하는 작은 공간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관심도 향하지 않았다. <언더그라운드>의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그 특유의 장난기 섞인 행동들로 그들이 학생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지만, 현장에 나갔을 때에는 내가 갈 수 있는 일자리를 파악하기 위해 입을 닫았다. 긴장한 듯 보이는 그들에게 웃으며 격려의 말을 건넨 어른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철저한 노동의 위계는 넓고 촘촘하게 뻗어 있어 모두를 지치게 한 상황이었으니까.

이 영화들을 지나 도대체 왜 전산과 학생이 가구 공장에 가게 되는지, 왜 학생들이 자신의 계약조건을 알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던 영화가 세 번째의 <다음 소희>였다. <다음 소희>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했던 이들이 정확히 어떤 구조 속에서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선생들은 취업 실적에 매달려야 했고, 그 상위의 교육청 역시 이 실적률을 바탕으로 지원금을 받기 위해 실적에 매달려야 했다. 이 구조 속에서 모두가 꺼리는 일을 시킬 기회를 얻는 것은 학교의 실적률을 높여줄 수 있는 작은 하청 기업들이었다. 이 기업들 역시나 실적에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모든 무게는 고스란히 현장실습 학생들에게 얹어졌다. 대기업의 하청의 하청일지라도 일단 대기업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회사는 쉽게 대기업으로 퉁쳐져 학생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되었고, 돈을 줄 때에는 실습생, 일을 할 때에는 정규직과 같은 책임감이 부여되었다.

 

이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다음 소희>의 유진(배두나)이 소희(김시은)의 뒤를 쫓은 결과였다. 갑작스레 사망한 아이, 제대로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편한 차림으로 나와 평소 만나던 친구를 만나고, 누군가와 다시 만나고 싶다며 걷다 잠시 혼자 술을 마시고, 오랫동안 강을 바라보다 시신으로 발견된 아이. 이해되지 않는 소희의 자취을 밟아나가던 경찰이자 어른 유진의 행적은 많은 소희들의 현실을 제시하고 있었다. 결국 이 영화가 다소 단조로운 흐름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오랫동안 겪어왔을 ‘소희들’의 현실이 상세히 설명해주어야 할 무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특성화고가 무엇인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래서 일이 싫으면 그만뒀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잔인한 말도, 계약서를 좀 자세히 읽어봤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어이 없는 질타도 여전히 배회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다음 소희>는 이에 대해 현장 실습을 나갔다 학교로 돌아오면 취업률로 계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낙인을 찍듯 빨간 조끼 혹은 빨간 명찰을 달게 한다는 영화 속 학생들의 말로, 당장 용역과 파견을 구분하는 성인도 많지 않은 현실에서(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중간착취의 지옥도: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글항아리, 2021)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선생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장면으로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유진의 역할은 그저 누군가를 안타까워하는, 분노에 찬 개인이라기보다 적어도 현실을 알기 힘든 이들을 위해 곳곳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어른들의 관심의 필요성을 지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유진은 소희를 쫓고 나서야 소희와 함께 춤을 추다 지금은 택배 상하차 일을 하고 있는 태준에게 힘들면 말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결국 <다음 소희>가 건네고 싶었던 한 마디는 태준에게 건냈던 이 말이지 않을까. 힘들면 어른에게 또 경찰에게 말해도 된다고, 우리가 이만큼 알고 있으니 이제 혼자 고민하지 말라는 말 말이다. 『열여덞, 일터로 나가다』(허환주, 후마니타스, 2019),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돌배게, 2019),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허태준, 호밀밭, 2020)과 같은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미처 도움의 방법조차 모를 당사자들에게 누군가의 관심이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소희>가 가장 많은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방식으로 화두를 던졌다. 천천히라도 이에 응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다음 소희>(2023.2.8.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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