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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나무들과 한평생’… 분류학계의 거목, 죽파 이우철교수
‘푸나무들과 한평생’… 분류학계의 거목, 죽파 이우철교수
  • 이선기 l 넥스트데일리 대표
  • 승인 2023.03.31 1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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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아버지 영전에 바칩니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 나태주 시인의 <풀꽃2>에서

 

“식물분류학자들은 식물의 족보를 찾아 주는 사람들이란다. 우리 풀꽃에 이름표를 붙여주기 위해 길을 떠나지. 내가 없는 동안 정원에 핀 꽃들을 부탁한다. 물을 줄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 보렴. 그럼 꽃들이 더 싱싱하게 피어날 게다.”

작년 가을 소천하신 아버지는 평생 푸나무를 사랑했던 식물분류학자셨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야책과 배낭을 둘러메고 식물채집을 떠나셨다. 야책은 대나무를 철사로 엮어 만든 채집 바구니다. 아버지의 배낭은 뿌리삽, 전정가위, 나침판, 손전등 같은 물건들로 그득했다. 식물의 이름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한 건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새벽부터 집을 나서는 아버지가 야속해, 나는 졸린 눈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흘겨보곤 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면, 늘 고약한 냄새가 났다. 등산화를 벗은 발에는 물집이 잡혀 있고, 팔과 다리는 여기저기 산모기에 뜯겨 울긋불긋했다. 새똥을 옴팍 뒤집어쓰고 돌아오신 날도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힘든 내색 한 번 안하셨다. 날이 밝으면 연구실에 가서 표본을 만들어야 한다며, 그날 채집한 식물이 들어있는 야책부터 꼼꼼히 손질하셨다. 정리를 마치고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키신 날엔, 콧노래도 흥얼거리셨다. 동네 사람들이 알아주는 음치에 박치셨지만, 지금도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옛날 선비들에게 문방사우가 있었듯, 식물분류학자들의 벗은 야책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대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죽파’는 대쪽 같았던 아버지가 바닷가 대나무숲을 타고 흐르는 바람소리가 청량해서 좋다며 지으신 아호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볏과(科)에 속하는 풀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대나무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은 것은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시리고 고요한 겨울 새벽, 눈을 감고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를 들고 있노라면, 마음에 파도가 출렁인다 하셨다. 비가 오는 날 젖은 댓잎들이 사가각 서로 몸을 부대끼면,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바람소리와 섞여 해금처럼 구슬프게 울린다고도 하셨다. 아버지가 생전에 발표한 130여 편의 학술논문과 주요 저서들은 거의 강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쓰신 것이다. 은퇴 후에도 아버지는 노익장을 과시하듯 산을 타셨고, 식물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으셨다. 마지막 5년을 파주의 한적한 전원마을에서 보내실 때도, 작은 마당에 꽃들을 심어 ‘죽파정원’이라는 이름을 걸어 놓으셨다. 

 

<애써 가꾸지 않아 소박한 이우철 교수의 죽파정원>

365일 ‘꽃모닝’ 잊은 법 없어

봄이면 뜰 서쪽 귀퉁이에 노란 산수유나무부터 개나리, 조팝나무, 백목련, 매실, 왕보리수, 진달래, 영산홍, 병꽃나무, 홍매, 꽃아그배나무까지  화려한 꽃밭이 펼쳐졌다. 수선화, 무스카리, 매발톱꽃처럼 수줍은 꽃들도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야생인 제비꽃, 토끼풀, 서양민들레, 괭이밥도 흐드러진 정취를 더했다. 미스김라일락과 사촌인 수수꽃다리 향기가 짙어지면, 길 가던 이웃들도 정원을 들여다보고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정원으로 나가 꽃들의 안부를 살피셨다. 식구들에게 ‘굿모닝’이라는 인사를 건네신 적 없어도, 365일 '꽃모닝~'은 잊지 않으셨다. 내가 섭섭하다 하면 빙긋 웃으시며 이렇게 말하셨다.

“대학시절엔 남대문에서 일하는 조카에게 낡은 군복을 얻어 입고 도봉산으로 채집을 다녔단다. 간첩으로 신고도 여러 번 당했어. 친구들은 나를 ‘도봉산 빨치산’이라며 놀려댔지. 그땐 날다람쥐처럼 산을 탔었는데, 이제는 늙어 산에도 못가니 정원에 심은 꽃들에게 안부를 물을 수밖에.”


 

<고 이우철교수가 유기억 강원대 교수(왼쪽 둘째, 식물분류학회장)등 제자들과 함께한 모습> - 유기억교수 제공

니카이, 정태현, 그리고 이우철... 식물분류학의 거목들 

아버지는 6.25 부산 피난 시절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고 전쟁이 끝나 서울 명륜동 캠퍼스에서 당시 70대셨던 정태현 선생을 만났다. 식물분류학계의 선각자셨던 정태현 선생은 『조선삼림수목감요(1923)』, 『조선식물향명집(1933)』, 『조선산야생약용식물(1936)』, 『조선삼림식물도설(1944)』 등을 펴내셨고, 성균관대학교에서 필생의 역작인 한국식물도감을 집필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정태현 선생의 첫인상은 ‘명륜동 신사’ 같았다. 더운 여름에도 긴 소매 정장을 고집하시고, 살이 적고 가죽을 씌운 우산을 단장 삼아 항상 짚고 다니셔서 영국신사 같은 모습이셨다고 한다.

 

<한국식물분류학을 태동시킨 선각자 하은 정태현교수>

 

<한국식물분류학을 태동시킨 선각자 죽파 이우철교수>

정태현 선생은 중앙임업시험장 조엽표본관에 소장하고 있던 식물과 일본 동경대학에서 가져온 3천여 점의 식물표본을 당시 종로 4가에 있던 계농 생약연구소 표본실로 옮겨 놓으셨다고 한다. 서울약대 도봉섭 교수와 같이 한국식물도감초본편의 원고를 정리하던 중 6.25가 일어났고,  전쟁 중에 도봉섭 교수는 피랍되셨다. 폭격으로 소실된 줄만 알았던 원고가 천정에서 무사히 발견되면서 마무리 작업을 위해 서울로 오신 것이었다.

정태현 교수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분류학자였던 도봉섭 교수가 북으로 가면서 한국식물도감은 정태현 선생의 단독저서로 출간됐다. 도봉섭 교수의 부재는 안타깝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북한에서 식물도감을 펴내면서 남과 북의 꽃 이름은 같아졌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학생 신분으로 한국식물도감의 상권을 편집하는 일을 계속 도왔다. 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해 조교로 근무하며 정교수를 보좌했고, 한국원색동식물도감 제5권 식물편의 편집도 맡았다.  아버지는 정태현 선생과 전국의 식물조사를 하고 북한산, 설악산, 거문도, 난지도 등의 지역식물상을 발표하면서 논문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자연스럽게 식물분류학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아버지가 정태현 선생을 그림자처럼 따랐듯, 정태현 선생은 조선에서 활동했던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박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카이는 일제 식민통치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제국주의 식물학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를 빼놓고는 한국의 식물분류학을 논할 수 없다. 동경대에서 <조선식물상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밟은 젊은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은 1913년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는 조선총독부 임업과 촉탁연구원으로 해방 직전까지 30여 년간 출판 강연 연구 등에서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나카이는 조선 식물을 서양식 분류법에 따라 정리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의 연구를 총정리한 22권의 조선삼림식물편은 한국 식물학의 기초가 됐다. 나카이는 우리 자생식물 300여 종의 학명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뿐만 아니라 금강초롱의 학명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조선공사 하나부사야의 이름을 넣기도 했다. 아름다운 우리꽃 금강초롱의 학명이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카이’라니 서글픈 일이다. 

산림식물조사는 단순히 식물조사보고서가 아니라 조직적인 벌목을 위한 근거, 산림령이나 임야조사령 등 법을 근거로 조선의 삼림을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넘어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 식물연구보고서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침탈을 위한 근거자료로 쓰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학자로서 나카이 선생을 존중하고 그 열정에 경의를 표하셨다. 몇 년 전 『창씨개명된 우리풀꽃』이라는 책이 비전문가에 의해 출판되고, 독자들 사이에 “왜색 짙은 꽃 이름을 예쁜 우리말로 바꿔 부르자”라는 말이 나왔을 때 아버지는 개탄하셨다. 

일본 자생식물의 학명엔 유럽 식물학자들의 이름이 숱하게 붙어있지만, 그게 기분이 나쁘니 학명을 고치자는 일본사람은 없다고 아버지는 설명하셨다. 나카이가 조선에서 가져간 금강초롱의 기준표본은 일본 도쿄대학 부속의 코이시카와 식물원에 소장돼 있다. 코이시카와 식물원은 1864년 개장한 제국주의 일본의 식물분류학 심장부였다. 그곳 건조표본실에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곳곳의 수많은 식물 기준표본들이 보관돼 있다. 기준표본이란  새로운 종류를 발표할 때 분류의 기준과 학명의 근거가 되는 전 세계 하나뿐인 표본이다. 일본의 특산식물 기준표본들은 놀랍게도 일본에 없다. 수천 종이 유럽으로 보내졌다. 주걱댕강나무 병꽃나무 같은 대표적인 일본 자생식물의 학명에는 툰베리와 지볼트 두 식물학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지볼트는 네덜란드, 툰베리는 스웨덴 식물학자다. 

일본이 우리처럼 타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근대과학과 제국주의가 발전하던 18~19세기 유럽 식물학자들이 더 이상 발견할 게 없어 아시아의 끝 일본으로 몰려 신종 발굴에 열을 올린 결과다. 일본 식물학의 태두 마쓰무라 진조는 탐욕스러운 외국인들 때문에 연구할 식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카이 다케노신은 조선에 파견된 것이다. 우리 꽃의 학명에 나카이의 이름이 올라간 것은 섭섭하지만, 그렇다고 학명을 바꾸자는 건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될 국수주의적 생각이라고 아버지는 안타까워하셨다. 

학명이 아니라 민간에서 흔히 부르는 국명들 중에서도 ‘며느리밑씻개’나 ‘개불알꽃’같은 이름이 상스럽다며, 고운 우리말로 개명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 역시 안 될 말이라고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셨다. 식물의 생긴 모양을 보고 직설적으로 붙인 이름이나 조선시대 며느리들의 설움이 묻어나는 해학적인 이름이 마음에 안든다고 함부로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은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셨다. 얼굴이 잘나도 못나도, 이름이 곱건 촌스럽건 우리 산천에 피고 지는 꽃들은 다 사랑스럽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런 우리풀꽃의 족보를 찾아 이름표를 붙여주는 분류학자들의 논문에 경의를 표하는 학술상을 제정하고 싶다는 것은 아버지의 유언이자 당부셨다. 

아버지가 소천하시기 몇 달 전인 지난해 2월, 한국식물분류학회에서는 아버지의 바램대로 제1회 ‘죽파식물학상(이하 죽파상)’을 제정하고 첫 번째 수상자로 김영동 한림대학교 교수를 선정했다. 아버지의 아호를 딴 ‘죽파(竹波)상’은, 식물분류학계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학술상이 됐다. 유튜브로 중계된 1회 시상식에서 김영동 교수는, 당시 와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올 2월에 열린 2회 죽파상은 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한 성균관대학교의 김승철 교수로 결정됐다. 김 교수는 “후학들을 독려하기 위해 죽파식물분류학상을 제정한 이우철 교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더욱 학문연구에 정진하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학계의 원로이신 이상태 교수는 작년 10월 식물분류학회장으로 치러진 아버지의 장례식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우철 교수는 식물분류학의 ‘바이블’ 같은 책들을 펴냈다. 『원색한국기준식물도감』과 『한국식물명고』 는 한국의 식물을 집대성한 최고의 걸작이다. 『한국식물명의 유래』나 『한국식물의 고향』은 식물학 전공자라면 항상 곁에 놓고 보아야 할 기본도서다. 학술논문 130여 편에 이르는 학문적 성취와 후학에 대한 사랑은 모든 이의 귀감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을 후학들에게 주기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서재는 텅 비었다. 아버지가 평생 수집한 식물의 원기재문과 문헌 자료는 국립생물자원관과 국립수목원으로 옮겨져 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죽파정원에 봄꽃들이 피기 시작할 무렵, 나는 국립수목원을 찾았다. 남양주 봉선사 입구부터 수목원까지 광릉숲 산책로를 걸으며, 나는 아버지가 자서전형식으로 쓴 『죽파일기』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저승에서 옥황상제가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유관속식물(維管束植物)의 호구조사원으로 일하다 왔나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필자는 아버지에게 일본 나카이 교수와 하은 정태현 교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뿐, 조선의 식물분류학자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무거운 야책 가방을 메고 식물의 족보를 찾아 산천을 누볐을 학자들 덕분에 아름다운 우리 꽃들이 이름을 얻게 됐음에 감사한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때가 아닐까.  

 

 

글·이선기  
지난해 작고한 식물분류학자 이우철 교수(1936~2022)의 장녀다. 죽파(竹波) 이우철 교수는 식물분류학 발전에 큰 획을 그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분류학계 유일의 학술상인 죽파상이 시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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