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해달의 문화톡톡] 주 69시간 노동과 방송작가들의 워라벨
[해달의 문화톡톡] 주 69시간 노동과 방송작가들의 워라벨
  • 해달(문화평론가)
  • 승인 2023.04.04 15: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 69시간 바짝 일하고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주 69시간 노동' 이슈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노동계의 반발에 정부는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노동 유연화 정책이다, 탄력근무제다, 바쁠 땐 69시간 세게 일하고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하면 된다, 정부가 구구절절 친절한 설명들을 내놓았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모양새다. 세계 각국이 주 4일제를 논의하는 마당에 산업화 시대로 역행하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근무 시간 논란 덕분에 현행 과로사 기준이 주 64시간이라든가 아우슈비츠 강제노동 시간이 주 98시간이었다든가 하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하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주 120시간 노동을 얘기했던 적도 있는데 뭐. 이 발언이 IT, 게임 개발업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면, 방송계의 노동 환경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특히 정규 편성보다 시즌제 편성이 일반화된 제작 환경에서는 방송사에 고용된 정규직 피디나 촬영감독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력이 간헐적 취업 상태와 잠재적 백수 상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노동시간 논의에서 방송계가 다소 비껴 나 있는 이유는 비정규직 인력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특히 작가들의 경우, 대표적인 비정규직으로 시즌제가 정착되면서 고용이 더욱 불안정해진 측면이 있다. 보통 한 시즌이 10회에서 12회로 나뉘는 특성상 후속 시즌이 이어지지 않으면 피고용 상태는 끝나기 때문에 또 다시 구직 전선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많은 후배 작가들이 “정규 프로그램”이라고 답하겠는가?  

 

주 52시간이 방송계에 끼친 영향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 한 장면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 마을에서 휴식을 얻는 주인공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 한 장면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 마을에서 휴식을 얻는 주인공

비정규직이 많다고 해서 방송계가 노동시간 이슈와 완전히 무관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흔히 촬영 현장 하면 떠올리는 밤샘 촬영, 장거리 촬영 등 근무 시간 개념이 타 업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송계와 영화계에서 표준계약서와 주 52시간 의무 적용이 가져온 영향은 거의 개혁 수준이었다. 특히 제작 기간이 긴 드라마와 영화 촬영 현장의 변화가 가장 컸다. 열정페이는 기본, 그야말로 주 120시간도 모자랄 만큼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해 상시로 과로사 위험에 놓여있던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은 확실히 달라졌다.      

하지만 제작사 입장에선 세상 큰일 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OTT 영향으로 사전제작 혹은 반사전제작이 자리 잡히면서 제작기간이 늘어났는데, 스태프들의 노동시간마저 주 52시간 단위로 따박따박 끊어야 하니 총 제작기간이 예전의 2, 3배 수준으로 길어졌다. 시간은 돈. 제작 기간이 늘어난 만큼 제작비가 오르는 건 당연한 일. 주52시간 도입 이후 제작사 대표들의 볼멘소리를 자주 들었다. 이것만 봐도 노동시간 연장이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알 수 있다. 

 

예능작가, 작가가 아닌 잡가(雜家) 

사실 노동시간은 작가들에게는 크게 와닿는 이슈가 아니다. 때때로 다른 어떤 스태프들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일하는 게 사실이지만, 일의 성격이 천차만별인 데다 일하는 시간 또한 들쭉날쭉 비연속적이어서 주당 근로 시간을 따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예능 작가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 지금까지 여러 장르의 작업을 해왔지만, 최근 몇 년 예능을 경험하면서 여타 방송 작가들과는 조금 다른 예능 작가들만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단 보통의 방송작가들이 혼자 일을 하는 데 비해 예능 작가들은 팀을 이뤄 협업한다. 보통 6-8명 정도, 많을 경우 한 프로그램에 20명 이상의 작가가 투입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들이 많아 보니 서열 관계가 분명하다. 프로그램 전체를 담당하는 메인 작가를 정점으로 다시 팀을 나누고 각 팀의 리더격인 대본 작가, 그 아래로 각각의 서브 작가와 막내 작가를 둔다.  

왜 이렇게 많은 작가가 필요한가?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예능 작가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물론 작가의 상상이나 문학적 표현이 가미된 드라마 대사, 혹은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글이라고 했을 때 그렇다는 뜻이지, 방송 진행을 위한 대본은 당연히 쓴다. 그리고 그 외 아주 아주 아주 많은 일들을 한다. 출연자 섭외에서부터 사전 취재, 촬영 준비, 때로 소품 준비까지 예전에 분명 피디들의 일이었던 일들까지 다 작가들이 한다.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잡아주고, 촬영 현장에서 그때그때 촬영할 내용을 정해주는 일은 예능 작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거의 1:1로 출연자에게 전담으로 붙어서 다음 할 일을 정해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많은 작가들이 필요할 수밖에.  

워낙 많은 일들을 하다 보니 가끔 작가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고, 후배 작가들이 하소연한 적이 있다. 요리 프로그램을 할 때는 요리사인가 했다가, 여행 프로그램을 할 때는 여행가이드인가 싶고, 게임 프로그램을 할 때는 레크리에이션 강사인가 하며 가끔 직업이 헷갈린다고 했다. 먹방 프로그램이라면 간단한 음식 조리하기, 상품 및 벌칙 소품 정하기, 로케이션 장소 답사하기 등등 그야말로 온갖 잡일을 다 한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우리는 작가 아닌 잡가(雜家)예요.”  

 

주인공이 예능작가로 등장하는 드라마 &lt;술꾼도시여자들&gt;&nbsp;
주인공이 예능작가로 등장하는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예능작가들의 호봉제와 최저임금제 

드라마 작가들의 고료가 철저히 능력제로 책정되는 데 반해 예능 작가들의 작가료는 연차에 따른다. (교양, 뉴스 분야 작가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반 직장의 호봉제와 비슷한 체계라고 보면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보통 시즌별로 10회에서 12회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때문에 예능 작가들은 메뚜기처럼 일을 찾아 옮겨 다닐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중에서 가장 불안정한 직업인 것이다. 팀 작가의 위계 상 5, 6년차가 되기 전까지 대본을 써볼 기회가 별로 없기에 시즌이 계속되지 않는 한 작가의 능력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예능 작가들의 작가료에 호봉제(가 정착된 이유는 그 때문이라 짐작한다. 

근로 시간 이슈와 달리 최저임금제는 작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최저임금이 현실화하였던 그해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열정페이의 대명사 격이었던 막내 작가들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했더니 몇 년 선배 작가들의 작가료와 같거나 많아진 까닭이었다. 결국 제작사 입장에서 보면 위 연차 작가들의 작가료도 함께 올려줄 수밖에 없었다. 주52시간과 마찬가지로 전반적인 제작비 상승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최저임금제는 굉장한 변화를 끌어냈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최저임금일 뿐. 작가료에는 또 다른 이슈가 있다. 기획료다. 보통 작가료는 회별로 산정하고, 방송이 된 후에야 지급된다. OTT, 케이블 채널 등 방송 플랫폼이 늘어난 만큼 방송 프로그램 수도 엄청나게 늘었다. 기획을 하다가 무산되는 경우의 수도 많아졌다. ‘방송된 프로그램에 대해서만 작가료를 지급한다’는 규칙을 계속 고수한다면 수많은 작가가 무상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현실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기획료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한 달 혹은 두 달로 제한하긴 하지만 기획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는 데가 많아졌다. 기획 기간은 무한정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현실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있지만, 어쨌든 변화는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최저임금제가 불러온 나비효과라 볼 수도 있다. 제도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메인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작가들 

뒤늦게 예능을 하다 보니 연차로는 후배지만, 예능 분야에 먼저 뛰어든 작가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놀란 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메인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15년 가까이 방송물을 먹은 작가들조차 그런 얘기를 한다. 아니 왜? 처음엔 이유를 캐물었지만, 예능 바닥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후배들이 메인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 자리에 올라서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예능들은 일종의 승자독식, 몇몇 유명한 예능 작가들이 있고, 그 아래 여러 개의 거대한 사단들이 만들어져 있다. 메인 작가들은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병행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실제로 일을 도맡아 하는 작가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메인 언니들이 프로그램을 여럿 하느라 간판만 걸어 둔 사이에 실제로 일을 주도하는 둘째 언니(보통, 세컨드 작가라 부른다)의 권력이 막강해진다. 아래 연차로 갈수록 메인 언니와 만나고 얘기할 기회는 극히 드물어진다.

물론 메인 작가의 영향력으로 후배 작가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도 있다. 작가이자 수석 피디(Executive Producer)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영향력이 막강한 메인 작가의 우산 아래 있는 것은 안전할 수 있다. 일자리를 얻을 기회도 많아진다. 

하지만 자신의 기획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한다면 그건 반쪽짜리 작가가 아닐까? 메인 작가를 꿈꿀 수 없을 만큼 계급구조가 공고해지고 있는 현실이 최상위 계급자의 사다리 걷어차기 때문은 아닐까? “나에게 일을 주는 사람”이므로 자기 의견을 끝까지 주장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는다는 후배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9 to 5를 원하는 작가들 

이 글의 화두였던 주 69시간 노동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정부안이 발표된 후 가장 크게 요동친 계층은 소위 MZ세대로 불리는 2-30대들이었다. 당연하다. 그들은 사내 계급의 가장 말단에 있는 노동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라? 일할 때 일은 모르겠지만, 쉴 때 쉴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법으로 정해진 제도는 무섭다. 고용인들은 피고용인들을 최대한 일하게 하고 싶어 한다. 아무리 “할 말 다하고 산다”는 MZ 세대라지만 노동 약자들에게는 법, 그리고 자신에게 월급 주는 사람을 넘어설 힘이 없다.   

그러므로 더욱더 그들은 워라벨을 원한다.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어느 후배가 내게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저는 9 to 5(나인 투 파이브)를 원해요!”

작가인데? 

라떼는 말이야. 밤낮없이 핸드폰 울리는 건 기본이고, 새벽 1시에 회의하자고 해서 불려 나간 적도 있어! 신정 연휴에 불려 나갔다가 꼬박 48시간 동안 편집실에 갇혀 원고 쓴 적도 있고, 다른 작가가 도망 갔다고 해서 마감이 하루도 안 남은 원고를 억지로 떠맡은 적도 있고 말이야, 말이야! 

이런 말 후배들에게 해 봐야 꼰대 소리나 듣는다. 요즘 작가들에겐 워라벨이 소중하다. 아무리 일 때문이라 해도 밤늦은 시각에는 웬만하면 카톡을 삼가야 한다. 주말에 연락하면 큰일 난다. 

그런 시대다. 그러니 주 69시간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리란 말인가! 
 

 

글·해달
방송작가.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웹드라마, 예능 바닥을 굴러온 글노동자.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