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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탄천 동행] 탄소의 무게로 살짝 내려앉은 부활절 하늘 아래 다시 탄천을 걷다
[안치용의 탄천 동행] 탄소의 무게로 살짝 내려앉은 부활절 하늘 아래 다시 탄천을 걷다
  • 안치용/ESG연구소장
  • 승인 2023.04.16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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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플로깅과 강과 함께 흐르는 세상 엿보기’ 1

내가 처음 탄천과 인연을 맺은 건 옛 한국 나이로 49살 때였다. 50살을 한 해 앞둔 새해를 맞으며 20년 넘게 다닌 회사에서 이런저런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겼다. 지나고 나니 별일이 아니었지만, 한 직장을 오래 다니고 한 가지 일을 오래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지쳐서 그랬는지 밀린 휴가를 모조리 끌어다가 무급휴가까지 더해서 긴 휴가에 들어갔다. 기자로 일했기에 쌓인 휴가가 많았다. ‘라떼엔 기자가 제대로 휴가 가는 일이 드물었다. 일할 당시엔 힘들었지만 적절한 시기에 시간을 몰아서 쓸 수 있게 돼 마치 시간적금을 탄 기분이었다.

휴가+휴직하고는 탄천이 한강 본류가 만나는 어디엔가에 누군가 내어준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책을 썼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사람을 거의 안 만났다. 그러다 보니 남는 시간에 주로 탄천을 걸었다. 탄천 가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고 탄천을 오가는 낯선 사람들을 무념무상으로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10개월을 그런 식으로 멍때리며 보내고 마침내 허용된 휴가+휴직이 끝나는 날에 회사에 나가 사표를 냈다. 많은 사람이 그 나이에 조직을 떠나는 게 아니라고 말렸지만 50살과 그 이후의 회사생활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 딱 감고 다시 회사에 다녔으면 무탈하게 정년퇴직을 바라보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조직에 속하지 않는 개인이 됐다. 물론 일과 생업까지 그만두지는 않았으나, 특히 출근이 어려웠던 정시 출퇴근과 변두리를 맴돈 사내정치, 억지 인간관계를 그만두었다.

회사를 떠난 후로 가끔 카페에서 일할 때가 있다. 카페 문을 열면서 눈대중으로 적당한 자리를 물색한다. 자리를 잡은 다음에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노트북을 켠다. 그다음에 해야 하는 일은 와이파이를 찾아 그곳에 노트북을 연결하는 것이다.

간단한 몇 가지 숫자를 입력함으로써 나는 연결된다. 물론 핸드폰을 통해서 이미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중복해서 연결을 확인한다. 화면이 커지면 연결이 커진다. 연결 속에서 세상은 늘 압도적이다. 세상은 압도적이며 동시에 반복된다. 어제의 연결과 오늘의 연결이 다르지 않다.

연결은 항상 비릿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연결이 소속감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번잡한 카페에서 연결을 통해 나는 카페라는 공간을 탈출한다. 나는 저들과 다른 시공으로 일탈한다. 일탈이라고 해봐야 뾰족한 쾌감을 산출하지 않는다. 일상적 일탈과 불가피하고 자발적인 고립 속에서 식은 스타벅스 커피를 홀짝이는 무력감.

아무튼 나는 연결되어 일을 한다. 굽어진 목을 펴서 가끔 창밖을 바라본다. 누군가 지나간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서로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당연히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나갔다. 차가 지나간다. 개도 지나간다. 내가 탈 버스가 아니었다. 나의 개는 집에 있다.

창밖을 바라보며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50살이 넘은 남자가 노트북 모니터 너머를 힐끔거리며, 오지 않을 애인을 기다린다고 상상한다. 애인에겐 유통기한이 있다. 50살이 넘어서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켜놓은 남자에게 애인이란 상품은 유통되지 않는다.

카페는 기다림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기다림은 자유이지만, 기다림을 기다리는 건 덜 자유이다. 와이파이의 강도가 세면 나의 노트북이 기뻐한다. 약해지면, 하는 수 없다. 노트북 모니터가 없으면, 모니터 너머가 없어진다. 너머를 훔쳐보는 습관은 말 그대로 일종의 중독이다. 카페인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슬플 것이다. 기다림이 없는 세상도 슬플 것이다. 너 없는 세상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50살 남자의 스타벅스 사용법이란 글을 보면 그때 조직을 떠나 외로움을 느꼈나 보다. 지금 읽으면 오글거릴 정도로 감상적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몇 년이 지나고 쓴 글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를 떠난 히브리 사람들이 고기가마를 그리워하듯 나 또한 싫다며 떠나온 곳을 그리워했나 보다.

그사이 많다면 많다고 할 변화가 있었다.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개인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고 남들이 보기에 나쁘지 않은 고만고만한 성취가 있었다. 두어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또한 탄천의 말하자면 나름의 번뇌와 조직문화를 완전히 떠났다. 카페를 자주 가지 않지만, 어쩌다 거기 가서 일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키우던 개 두 마리 중 유난히 나를 따르던 한 녀석을, 밤마다 내 침대에 뛰어 올라와 나와 자리다툼을 하던 녀석을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 보냈고, 나보다 내 아들을 훨씬 좋아하는 다른 녀석이 나보다 빠르게 늙어가는 과정을 함께 하고 있다.

이제 탄천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유형의 조직이 아니지만 조직의 일원이 되어 탄천을 걷는다. 과거에 걸은 탄천에서는 조직을 벗어나는 준비를 했지만, 지금은 의미 있는 어떤 공동체를 기대하고 모색하며 탄천을 걷는다.

그때 걷던 곳에서 20Km쯤 상류로 거슬러 올라와 분당의 이매동과 판교 사이를 흐르는 탄천과 탄천에 직각으로 유입되는 운중천을 걷는다. 주로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을 계획이다. 탄천 하류에 비해 더 아기자기하고 더 아름답다. 분당한신교회에서 출발해 상류로 올라갔다가 정자교 보행로 붕괴사고로 그 위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류로 쭉 내려갔다. 다리가 뻐근해 되돌아왔다.

걸으며 눈에 보이는 대로 플라스틱병 같은 것을 줍는다. 이른바 플로깅이다. 거창한 플로깅은 아니다. 걷는 데에 주력하고 눈에 쓰레기가 보이면 줍는 정도의 소박한 플로깅이다. 플로깅을 위해 눈을 번득이지는 않고, 올망졸망 예쁘게 흐르는 탄천을 보고, 강 위를 배회하는 오리나 새들을 보고, 과거보다 더 많은 탄소를 품어 약간 둔중해진 하늘을 보며, 쓰레기에 덜 집중하며 걸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다소 방심할 작정이다. 탄천에서 만나야 할 것이 꼭 쓰레기만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은 혼자 걸었지만 앞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걸으면 매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더 넓은 범위를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변명을 덧붙인다.

탄소의 무게로 살짝 내려앉은 하늘을 어깨로 떠안으며 그런 하늘과 무관하게 강물은 봄 처녀 꽃구경하듯 흘러간다. 그 강가에서 과거 기다림의 대상으로 상상한 애인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애인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부활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바라본 그 하늘을 상상한다.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지는 말아야 할 텐데, 그런 허망하고 무책임한 생각 앞으로 누군가의 자전거가 씩씩하게 지나가고 바닥을 수놓은 벚꽃잎이 하늘로 휙 날아오른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22)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아름답고, 앞으로도 아름답기를 기도하는 부활절의 탄천입니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이자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분당한신교회 전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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