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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문화톡톡] BL은 2023년 콘텐츠 트렌드의 새로운 좌표다 (1)
[김민정의 문화톡톡] BL은 2023년 콘텐츠 트렌드의 새로운 좌표다 (1)
  • 김민정(문화평론가)
  • 승인 2023.05.02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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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BL드라마 [2gether] 포스터
태국 BL드라마 <2gether> 포스터

지난 3월 9일, 영국 시사주간지 <더 이코노미스트>는 “태국의 게이 드라마가 넥스트 케이팝일까? (Are Thailand’s gay TV dramas the next K-pop?)”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태국 게이 드라마가 홍콩 누아르 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K-팝에 이어 아시아 문화 트렌드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도였다. 여기에서 게이 드라마란 BL(Boy's Love) 드라마를 의미한다.

2020년 2월 공개된 태국 BL 드라마 〈2gether〉은 온라인 팬미팅을 베이징, 도쿄, 뉴욕, 런던, 서울에서 열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주연배우 브라잇 와치라윗(Bright Vachirawit)의 인스타그램 팔로우 수는 2023년 4월 30일 기준 1,800만 명이 훌쩍 넘는다. BL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태국 국제무역홍보부는 이듬해 6월 BL 콘텐츠를 위한 온라인 비즈니스 미팅을 열었고, 많은 아시아 기업들이 참가한 가운데 3억6천만 바트(약 136억원)가 거래되는 큰 성과를 이루었다. 최근 태국, 일본, 대만, 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서 시작된 BL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하는 중이다.

BL 열풍에 있어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2022년 동명의 웹소설 원작 BL드라마 <시멘틱 에러>가 왓챠 시청 순위 8주 연속 1위를 기록하였다. <시맨틱 에러>가 성공한 후, 국내 OTT들은 다수의 BL 콘텐츠 제작을 진행함과 동시에 태국, 일본, 대만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의 BL 드라마를 서비스하고 있다.

 

BL드라마[시맨틱 에러] 포스터
BL드라마 <시맨틱 에러> 포스터

선 섹스 후 사랑

어제의 새로움이 오늘의 낡음이 되는 것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태생적 특성이다. 대중은 늘 새로움에 목말라 있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콘텐츠는 대중의 감각과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늘 두리번거린다. 이때 하위문화(서브컬쳐)는 주요 문화로부터 구별되는 독자성과 비주류성을 통해 주요 문화 속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대중의 다양한 욕구와 니즈를 충족시키는 하부 구조로서 존재한다. 콘텐츠의 양적·질적 새로움을 지속해서 수혈함으로써 문화 생태계의 존속을 위한 체제 보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BL(Boy's Love)는 남성 간의 사랑 이야기로 로맨스물의 하위 장르에 속한다. BL팬들조차 ‘BL을 본다’ 혹은 ‘BL을 좋아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릴 정도로 BL물은 소수의 매니아를 위해 존재해왔다. 하지만 최근 한국 로맨스물의 트렌드를 살펴보면 그 모든 변화의 방향이 새로운 유형의 사랑 ‘보이즈 러브’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출산 문제는 현실 세계보다 대중 문화 콘텐츠에서 더 심각하다. 드라마와 웹툰, 그리고 웹소설에서 사랑과 결혼의 필연적 상관관계는 해체된 지 오래다. 사랑하면 연애하고 연애하면 결혼한다는 서사 전개는 더 이상 서사적 개연성을 상실했다. 사랑하면 사랑하고, 연애하면 연애한다. 남녀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는 것, 즉 사랑의 결과로서 결혼과 출산의 직선적 시간관이 해체된 상황에서 관계의 비생산성은 새로운 서사 패턴을 탄생시켰다. 이름하여, 선 섹스 후 사랑. 출산을 위한 섹스가 아닌 성적 유희를 위한 섹스의 급부상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성이 아니다. 바로 유희성이다. 육체적 성관계를 통해 얼마나 즐거움과 유쾌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사회적으로 부여된 젠더로서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제거된 자리에 남은 것은 관계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개방성이다. 순결을 지켜야 하는 여자도 없고, 가정 부양의 의무를 진 남자도 없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본성과 본능에 충실한 두 사람만이 남아 성적 유희에 탐닉한다. 육체적 관계가 주요 트리거로 작동하는 BL 장르물은 이와 같은 로맨스물의 새로운 트렌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BL웹툰 [킬링 스토킹] 단행본 표지
BL웹툰 <킬링 스토킹> 단행본 표지

길티 플레져

BL물, 특히 BL 웹툰과 BL 웹소설에서 재현되는 성적 수위는 상당히 높다. 성적인 의미로 톱(top)을 의미하는 '공'에 의한 데이트 폭력, 납치, 감금, 강제 성관계 등 이성애 로맨스물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비윤리적인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서사 전개가 주를 이룬다. 상대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강압적인 성향을 가진 가학적인 ‘공’이 '광공'(狂攻·미친 공)이라고 불리며 오히려 인기가 더 높은 편이다.

제2회 레진코믹스 세계만화공모전 대상작인 BL웹툰 <킬링 스토킹>은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연쇄 살인마와 이 사실을 모르고 그를 쫓던 스토커가 감금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한집에 머물게 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2017년 단행본 출간 첫 주 ‘아마존 이탈리아' 만화 부문 주간베스트 1위를 올랐으며 이탈리아 출간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스페인 독자들의 온라인 청원으로 스페인어 종이책도 출간되었다. <킬링 스토킹>은 유럽권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지만 드라마 실사화(實寫化) 소식이 알려지자 원작 팬들조차 우려를 표할 정도로 선정성과 폭력성이 높다.

높은 성적 수위와 폭력적인 관계 설정에도 불구하고, BL 콘텐츠는 여성이 배제된 두 남성 간의 사랑이라는 장르성 덕분에 남녀관계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윤리적 비판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수’를 담당하는 남자 등장인물에게 ‘여성성’이 부여됨으로써 성 역할이 전복된다는 점, 그리고 두 인물의 공수(攻守)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점이 기존 이성애 로맨스물 속 획일화된 남녀 인물 구도로부터 해방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조응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길티 플레져 (guilty pleasure)로 작동한다. 남성의 ‘야동’과 비교되며 BL물이 여성을 위한 ‘포르노그래피’로서 관대한 면죄부를 부여받는 것도 이런 심리적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서브컬처로만 여겨지던 BL 콘텐츠는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이후, 한국, 일본, 대만, 태국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세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격리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BL 콘텐츠를 접하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표현의 제한이 없는 웹콘텐츠와 19금(禁) BL 콘텐츠는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었다.

디지털 미디어를 등에 업고 서브컬쳐는 문화 콘텐츠 산업의 체제 유지를 위한 ‘서브’에서 실질적으로 문화를 주도하는 ‘메인’으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2016년 리디북스를 시작으로 알라딘, 네이버 등은 BL 콘텐츠 제작 투자비를 상향 조정하였으며 카카오페이지는 2021년 7월에 BL 파트를 별도로 신설했다. BL팬들 사이에서 ‘여성향’ 콘텐츠에 특화된 플랫폼이라고 평가받는 리디북스에서만 BL 신작이 한 달에 300종씩 쏟아진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BL콘텐츠는 기존 출판시장의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디지털 콘텐츠 산업 모델을 기반으로 다양한 미디어믹스를 통해 비약적인 대중화를 이루었다.

 

 

 

 

참고자료 

여성주의 저널 일다 이제 음지에서 안 봐요, 태국 GL/BL 드라마의 인기” 2023.4.10

게임톡(GAMETOC) “국산 스릴러 웹툰 킬링 스토킹’, 유럽 만화축제서 시선집중” 2017.11.6

 

 

글·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과 르몽드문화평론가상, 그리고 2022년 중앙대 교육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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