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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경의 문화톡톡] 로망은 제로, 현실감 가득한 캐릭터의 향연 <빨간풍선>
[구선경의 문화톡톡] 로망은 제로, 현실감 가득한 캐릭터의 향연 <빨간풍선>
  • 구선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3.05.15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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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켤 때,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제목을 클릭할 때, 우린 어떤 기대를 하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할까?

일상이 지치고 힘들고 회사 일로 집안일로 머리가 복잡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웃겨줄 이야기를 찾는다. 편안하게 보면서 킥킥대고 웃다가 좀 뭉클해지다가 따뜻하고 기분 좋아질 만한 그런 드라마. 예를 들면 <일타 스캔들>, <사내맞선>, <갯마을 차차차> 같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 적극적인 시청자의 자세일 때는 나를 확 끌어들여 깊이 몰입시켜 줄 이야기에 끌린다. <비밀의 숲>처럼 <괴물>처럼 <작은 아씨들>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서 배우의 표정 하나 대사 한 마디의 의미까지도 해석해 가며 보는 드라마들이 그 예다. 이런 드라마를 볼 때는 드라마를 보는 일에도 에너지를 써야 하고 그게 즐거워 기꺼이 그럴 마음을 먹는다. 때로는 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것에 끌린다. 매일 그만그만하게 흘러가는, 지지고 볶고 사는 인간들의 현실 이야기가 아니라, 초능력을 휘두르고 마법과 술법으로 대립하며 이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승부를 가리는 판타지의 세계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환혼>을 보고 <웬즈데이>를 보고 <지옥>을 찾는다. 개인마다 취향이 달라 선호하는 장르가 다르기도 하고, 그날그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서도 좋아하는 이야기는 달라진다.

 

작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TV조선에 편성되고 넷플릭스에서도 방영했던 <빨간풍선>은 친구인 두 여자를 중심으로 그 부부와 가족이 얽혀드는,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가족극 범주의 이야기다. 가족극은 주로 5060 이상의 여성이 고정 시청자층으로 그 외의 연령대나 성별에서는 선호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평소 가족극을 선호하지 않았던 층에서도 흥미 있게 봤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다. 그 이유가 뭘까.

빠른 이야기 전개, 극적인 사건,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해 주는 코믹한 장면 등 다양한 인기 요소가 있지만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캐릭터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로망은 0%, 현실감은 100%인 캐릭터들이었다. 이 드라마엔 로망이 없다. <빨간풍선>의 어떤 인물도 내가 그렇게 살아봤으면 싶은 인물은 하나도 없다. 이성으로서 매력이 느껴지는 인물은 더더욱 없다. 내 로망이 되어줄 인물은 하나도 없는데 드라마는 보게 된다. 공감돼서, 이해돼서, 연민이 느껴져서 보게 된다. 그렇게 살고 싶은 인물은 없는데 그래 우리가 사는 게 다 저렇지, 싶은 인물은 많다. 실은 전부 그렇다.

 

여주인공 은강(서지혜 분)은 나이는 서른 중반이 넘었는데 이렇다 할 명함이 없는 처지다.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실패했고, 4년이나 지극정성으로 취준 뒷바라지를 해 온 연하 남친은 공무원 시험 합격 후 배신해 버렸다. 새로 연애를 하기에도 결혼을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와 그간의 세월이 억울해 결혼식장에 가서 깽판까지 쳐봤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고등학교부터 친구였던 바다와는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제일 만만한 시녀 노릇에 불과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바다가 바쁠 때 집안일부터 아이 돌보는 일, 회사 심부름까지 입안의 혀처럼 모든 일을 도맡아 해 오고 있다. 그렇게라도 부잣집 딸인 바다 옆에 있어야 뭐라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어정쩡한 은강의 인생은 한숨 나오게 답답하지만, 실은 우리들 인생이 다 그렇게 어정쩡한 구석이 있다. 뭐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다거나, 에베레스트라도 오를 줄 알았는데 동네 뒷산도 다 못 올라가고 중턱에 앉아있는 신세거나, 그래서 사는 게 늘 남의 들러리 같은 기분만 드는,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은강에게 공감하지 않았을까.

 

은강이 평생 부러워해 온 바다(홍수현 분)는 잘 나가는 보석 디자이너다. 은강에 비하면 확실한 자기 직업과 회사까지 가지고 있는 커리어우먼이다. 하지만 바다에겐 남편 몰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한 빚을 갚아야 하는 사연이 있다. 게다가 심약한 귀부인 스타일의 친정엄마도 돌봐야 하고 그런 바다를 못마땅해하는 시월드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급기야 수족처럼 의지했던 내 친구가 내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고 만다. 일에서의 성취가 가정의 평화와 맞바꿔야 하는 거라면 워킹맘으로서는 너무 억울한 일이다.

은강의 엄마 반숙(이보희 분)은 ‘금융치료가 최고야’를 부르짖으며 입만 열면 돈 얘기뿐인 중년의 아줌마다. 남편도 자식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진 못하고 있고 아직도 자기 몸 움직여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처지인 반숙의 형편을 알고 나면 돈 앞에 원초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태도를 천박하다고 나무랄 수가 없다. 평생 돈에 쪼들려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는가.

 

한편 고물상(윤주상 분)의 사위인 지남철(이성재 분)은 고등학생 때 그의 똑똑함을 알아본 물상의 눈에 띄어 전폭적인 지원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물상의 딸 금아와 결혼하고 회사도 맡아 경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이 죽어라 일만 하는 중이고 여태까지 본가에 도움을 줘야 하는 가난한 집 장남이라 찍소리도 못하고 처가살이의 수모를 묵묵히 견뎌내는 중이다. 그런 그가 회사 경리로 들어온 조은산(정유민 분)과 불륜에 빠진 후 은산의 응원과 지지에 힘입어 물상에게 처음으로 자기주장을 펼치며 월급통장을 받아냈을 때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없이 살았고 지금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없는 그의 처지가 짠했고 그래서 은산의 위로에 넘어가는 마음이 이해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서 가장 확실한 빌런 중 한 명인 은강의 전 애인인 권태기(설정환 분)조차도 그의 마음은 이해 못 할 바가 없다. 은강과 결혼해 봐야 혼자 벌어 둘이 쓰며 아이 낳고 생활까지, 월세방 신세를 언제 면할지 요원한 건 불 보듯 뻔한 일일 거고, 그걸 견딜 사랑이라는 유일한 힘이 바닥난 지금,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별의 예의와 치러야 할 절차를 뭉개버린 것이 그의 인간성의 한계였을 뿐. 

촉망받는 야구선수였지만 교통사고에서 반숙을 구하려다 어깨를 다쳐 꿈을 접은 아픈 과거가 있는 조대봉(정보석 분), 첫사랑 여자와 강제로 헤어지고 홧김에 하룻밤 보낸 여자와 아이가 생겨 결혼했다가 결국 그 여자의 바람으로 헤어지고만, 그래서 지금은 형수한테 눈칫밥 먹으며 얹혀살고 있는 조대근(최대철 분), 자수성가로 사업을 일궈냈지만 집안에는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 하나 없이 이제는 칠십 줄에 접어들어 ‘아 외로워’를 입에 달고 사는 고물상(윤주상 분)에 이르기까지.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모두 ‘그래, 그럴 만하지, 그럴 수 있지’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열심히 살지만 똑 부러지게 뭐가 되지도 못하고, 아주 착하게는 아니어도 얼추 비슷하게 살아온 거 같은데 그렇게 살다 보니 나만 바보인 것도 같고, 그래서 어떤 때는 옳지 않은 길로 빠지기도 하는. 우리들 대다수가 사는 모습과 닮아있다. 그래서 마음이 간다. 특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지금의 현실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어서다. 취업이 어려운 현실, 알바로 살아가는 2030의 모습들, 처가살이하는 사위, 외로운 노년, 워킹맘의 어려움 등등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를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세대를 불문하고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이분법이 아닌 입체적인 캐릭터, 시대상을 녹여낸 통찰력 있는 캐릭터, <빨간풍선>의 캐릭터들이다.

 

사진 출처 - 공식 홈페이지 영상 캡처

 

글·구선경

드라마작가.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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