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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안이한 무력감 <퍼시픽션>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안이한 무력감 <퍼시픽션>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6.1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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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롤러(부느와 마지멜)는 많은 청중 앞에서 참된 예술가란 무엇인지 이렇게 정의한다. “이국적 언어를 주조해내고 혼란을 만들되 안이한 명료화를 피하는 작가” 그의 정의와 같이 'Pacific'과 'Fiction'을 합쳐 중의적으로 태평양의 픽션, 평화에 관한 픽션으로 읽히는 <퍼시픽션>은 명료한 정치적 메시지와 혼란스러운 미학적 모험 사이에 모호하게 위치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탈식민주의의 알레고리와 식민지의 배경이 되는 사막, 정글, 바다와 같은 풍광을 느린 리듬으로 유영하는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2014)과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자마>(2017)처럼 말이다.

 

출처-다음 영화
출처:다음 영화

명료하게 드러난 것

<퍼시픽션>이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와 분명히 다른 점은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사이에서 진동하다 결말로 향하는 방향성에 있다. <도원경>의 군나르(비고 모텐슨)와 <자마>의 자마(다니엘 히메네스 카초)는 각각의 영화 속 결말에서 식민지의 배경이 되는 사막과 정글이라는 인간과 사회를 둘러싼 의미들이 무(無)화되는 자연 혹은 우주의 잠재성으로 산화하여 사라진다. 반면 드 롤러는 그가 스스로 정치에 비유했던 클럽의 밀폐된 공간에 유폐된다. 이는 영화가 엔딩에서 곧 핵실험이 이루어질 것이라 외치는 제독과 그것을 듣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으로, 정치적 메시지와 미학적 모험 사이에서 전자를 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방향성을 중심으로 영화를 돌아본다면 헷갈리거나 모호하게 느껴졌던 이야기와 장면이 선명하게 이해된다. 드 롤러가 바다로 사라진 여성들을 찾으러 나서기 직전에 차 안에서 동료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자. 그에게 정치란 것은 하나의 나이트클럽이고, 바보들은 그것을 파라다이스라 부르지만 사실 악마와의 파티이며, 어둠 속에서 인공적인 조명을 받으며 반짝이기만 한 곳이고,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밤과 낮도 구분하기 힘든 현실과 박리된 무언가다.

드 롤러는 그런 나이트클럽의 조명과 음악을 끄고 환하게 불을 밝혀 정치인들의 실체를, 초췌한 몰골을 드러낼 것이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일개의 개인이 든 조그마한 랜턴 불빛으로 어두움 밤바다에서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드 롤러는 핵실험도, 잠수함의 모습도, 사라진 여성들의 행방도 밝히지 못한 채 광활한 바다에 비해 좁디좁은 운동장 위에 선다. 아무도 없는 축구장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보이는 것은 홀로 서 있는, 드 롤러의 모습뿐이다. 초췌한 얼굴들도, 음험한 정치인들의 민낯도 아닌 혀를 내밀고 두 팔을 벌린 채 비를 맞는 우스꽝스러운 스스로의 실체만이 드러나 있다.

운동장을 비추던 흰 백색의 빛은 다음 장면에서 보라색과 짙은 푸른색 사이의 빛만이 가득한 클럽의 조명으로 바뀐다. 드 롤러를 둘러싼 인물들을 한 명씩 비추는 카메라는 젊은 원주민 대표와 미국인, 페헤이라, 제독이 적이 아닌 하나의 관계 안에 엮인 정치적 구성체라는 것을 푸른빛의 단색 조명 아래 드러낸다. 이제 드 롤러를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미국인은 더는 그를 보지 않는다. 드 롤러 또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픽션의 주인공이 아니라 나이트클럽의 고객 중 한 명이자 제독의 춤을 바라보는 관객이 되어 서성이고 있다. 어두운 단색의 조명 아래에서 드 롤러의 흰 정장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출처-다음 영화
출처:다음 영화

무력하고 혼란스러운, 보이지 않는 것

컨트롤 할 수 없는 사회의 음모, 부조리한 구조 안에서 발버둥 치다 몰락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말하는 바는 매우 명료해 보인다. 하지만 드 롤러가 참된 예술이 혼란과 명료화 사이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퍼시픽션>에는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한 젊은 부호가 매입한다고 언급했던 폐건물에서 페헤이라와 정체불명의 미국인이, 그 장소를 서성이는 드 롤러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자. 처음에는 두 인물이 드 롤러를 몰래 바라보는 것같이 묘사되었지만 그 씬의 마지막 컷에서 세 인물은 건물의 유리창을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이 상황에 관한 부연설명 없이 씬이 넘어가고, 관객은 이 폐건물 장면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드 롤러는 이 폐건물에 왜 간 것일까? 아마 이전 장면에서 페헤이라에 관해 이야기했으니 그를 미행해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페헤이라는 왜 그곳에 간 것일까? 아마 미국인과 만나기 위함인 것 같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는 드 롤러를 감시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임으로, 호텔 폐건물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간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서로 감시하고 있는 두 세력이 시선을 마주했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음으로 페헤이라, 미국인과 드 롤러가 마주 보았지만, 보지 못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결과로 만든다. 특히 드 롤러가 결국 물 밑에 가려진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는 결말을 알고 돌아본다면 더욱 그렇게 보인다.

페헤이라와 미국인은 드 롤러를 보며, 암흑 같은 무언가가 마음에 내려앉은 그를 어둠 속으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비유적 표현이면서 이 시퀀스 이후 모든 장면을 밤으로 설정해 시각적 형식으로도 나타난다. 드 롤러는 이 밤의 어둠 속에서 그가 찾고자 했던 그 무엇도 보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음모뿐 아니라,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했던 아름다운 폴리네시아의 풍경과 바다의 관능성 또한 인공적인 조명과 어둠 속에 가려져 볼 수 없다. 여기에는 이상한 무력감이 있다. 현실 뒤에 숨겨진 구조를 보지 못한다는 것뿐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본다는 것의 무력감이 존재한다. 보이는 것은 인공적인 조명과 구도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화면, 비현실적인 빛의 대비 아래 무표정하게 서 있거나 제독의 손에 이끌려 무대로 나오는 폴리네시아인들의 수동적 육체만이기 때문이다.

 

출처-다음 영화
출처:다음 영화

안이한 명료함

본다는 것의 무력감에 관한 생각은 결국 영화가 선택한 정치적 무력감이라는 명료함 안에 파도처럼 부서져 내려 더 나아가진 못한다. 한낮의 밝은 빛 아래 보이는 바다와 섬의 아름다움이 밤의 어둠과 나이트클럽의 조명으로 대체 되는 것은, 결국 드 롤러가 거대한 음모 안에서 겪는 무력감을 표현하는 영화적 선택으로 수렴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퍼시픽션>은 폴리네시아의 아름다운 풍경과 나이트클럽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대비시켜 정치적 알레고리로 안이하게 구조화한다.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 꿈, 소문과 음모, 이야기, 미스터리의 매혹과 공포는 모호하고 혼란스럽지만 아름다운 형식과 불화하며 단순하게 막을 내린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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