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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네도키, 뉴욕>, 불가능한 꿈에 대한 도전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네도키, 뉴욕>, 불가능한 꿈에 대한 도전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3.06.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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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원대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자(들)

모든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꿈꾼다. 이미 명성을 얻은 그들 중 몇몇은 ‘불가능한 꿈’을 상정하여 스스로 채찍질한다. 기껏 열여섯에 연극 무대에 데뷔했던 오손 웰스(Orson Welles)는 스물여섯에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1)>을 만들어 천재로 추앙받았지만 그의 평생 소원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전작을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웰스는 여력이 될 때마다 셰익스피어를 은막에 올려서 조금씩 목표에 다가갔다. 더 이상 할리우드가 자신을 부르지 않자, [헨리 4세]의 1부와 2부, [헨리 5세]에서 가상의 인물 ‘폴스타프’와 관련된 부분만 뽑아서 <심야의 종소리 Chimes At Midnight>(1965)를 만들었고 마침내 ‘불가능한 꿈’을 내려놓았다. <전함 포템킨(Battleship Potemkin>(1925), <시월 October>(1927), <총전선 The General Line>(1929)을 통해 몽타주 미학의 위대함을 예술계에 알린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의 불가능한 꿈은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을 화면에 옮기는 것이었다. 완성되었더라면 롱기누스(Longinus), 칸트(Immanuel Kant), 버크(Edmund Burke)에 이어 ‘숭고(sublime)’의 적자는 분명 에이젠슈테인이 되었을 것이다. 봉준호 역시 불가능한 꿈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꽤 오래전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그는 “어떤 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냐?”라고 묻는 관객과 마주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봉준호 : 저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을 좋아합니다. 세 시간 넘게 진행되는 이 음악을 완주하고 나면 모든 음의 길이와 템포가 완벽하다고 느끼곤 합니다. 만약 이 곡에서 단 하나의 음을 빼내면 완전성이 사라집니다. 마치 벽돌 하나만 제거해도 무너져버리는 건물처럼 말이죠. 저 역시 제 영화에서 단 한 쇼트만 빼더라도 전체가 완전히 무너지는 그런 영화를 꿈꿉니다.

 

봉준호의 답을 듣고 생각보다 원대하고 거창한 그의 꿈에 매우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봉준호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불가능한 꿈을 향해 지금도 전진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감독들과 달리, 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꿈을 실행한 사람들도 있다. <영화의 역사(들) Histoire(s) Du Cinéma>(1998-1998)이 고다르(Jean-Luc Godard)에게 그런 꿈의 결과물에 해당했을 것이며, 비록 TV 시리즈였지만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1980) 역시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다룰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2008) 또한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에겐 그러했을 것이다. 명성 없을 뿐만 아니라, 트렌드를 선도할 영향력도 없지만, 이 졸고로 인해 <시네도키, 뉴욕>의 진정한 가치가 한 사람의 영화팬에게라도 전파된다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감히 말해본다. <시네도키, 뉴욕>은 뉴 밀레니엄에 들어서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라도 아피찻퐁(Apichatpong Weerasethakul)의 <엉클 분미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2010)와 더불어 최고로 야심 찬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카우프만이 창조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1. 관람의 방해 요소들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참을성과 분별력뿐만 아니라 몇 번을 다시 보겠다는 의지마저 필요하다. 극중극(劇中劇)의 형식이지만 여기에는 처음부터 경계가 흐릿하기에 배역과 실제 인물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요령부득(要領不得)의 작품을 독해하기 위해 재관람의 수고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 배역이 실제 인물보다 더 실재(réel)에 가까울 지경에 이르면, 가디언(The Guardian)지의 평론가 허마이온니 호비(Hermione Hoby)가 말했던 것처럼 여느 포스트모던 소설을 능가하는 영화가 된다. 실재를 압도하는 시뮬라크르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 황홀한 디제시스를 살아생전, 보드리야르가 봤다면 디즈니랜드나 이라크 전쟁으로 든 예시에 카우프만 작품을 추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네도키, 뉴욕>에는 수많은 포스트모던 담론을 이끌 모멘텀이 한 타래 존재하며 예술과 삶의 상동성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카우프만의 야심은 지도제작자(보르헤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제국의 지도학은 너무 완벽해, 한 지역의 지방이 도시 하나의 크기였고, 제국의 지도는 한 지방의 크기에 달했다. 하지만 이 터무니없는 지도에도 만족 못한, 지도 제작 길드는 정확히 제국의 크기만 한 제국 전도를 만들었는데, 그 안의 모든 세부는 현실의 지점에 대응했다.”

- 보르헤스(Jorge Borges) 단편, 『과학적 정확성에 관하여 On Exactitude in Science』 중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지도제작자들은 제국의 모든 현실을 완벽하게 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만든 지도는 공간의 모양, 색채, 심지어 풍경을 재현했고 제국의 크기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실재와 똑같은 지도가 눈앞에 펼쳐지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고 급기야 이 완벽한 지도는 폐기되고 말았다. <시네도키, 뉴욕>의 주인공 케이든은 이 지도제작자들에 비견되거나 그들을 뛰어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들고자 했던 지도는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맺으면서 발생한 ‘감정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그가 재현하려는 ‘감정’은 보르헤스의 ‘지도’보다 훨씬 더 가변적이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감정의 지도 제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삶의 가변성 자체를 무대로 옮기는 작업은 영화의 주인공 케이든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독해하는 관객마저 미궁에 빠트린다. 하지만 정작 <시네도키, 뉴욕>을 바라보는 관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케이든의 지도에 포진된, 상징, 은유, 그리고 구분하기 힘든 맥거핀과 단서들이 만든 혼선이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부인 린다가 사망한 남편 윌리에게 하는 마지막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시네도키, 뉴욕>의 극중극에서 린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린다 : 용서하세요. 데릭, 울 수가 없어요. 용서해 주세요. 자기가 그냥 또 여행을 간 느낌이에요. 돌아오길 기다렸는데, 왜 죽어버린 거에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돼요. 오늘에야 집 잔금도 다 지불했는데, 완전히 우리 집이 됐는데, 우린 이제 자유인데….

도대체 카우프만은 무슨 생각으로 이다지도 유명한 [세일즈 맨의 죽음]의 주인공 이름을 윌리에서 데릭으로 바꿨을까? 힌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극중극 바로 앞 장면은 박스 오피스에서 일하는 헤이즐이 집을 구매하려고 매물로 나온 빈집을 중개인과 보는 장면이다. 그런데 집 곳곳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연기가 자욱하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개의치 않는다. 이 부조리한 장면도 수상한데, 중개인은 “지하실이 완공 되지 않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적당하다.”라고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완공되지 않은 지하실에서 어떤 남자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추고, 중개인은 그를 “이혼한 이후 지하실에만 틀어박혀 사는 자신의 아들”, 데릭이라고 소개한다. 윌리가 데릭으로 바뀐 유일한 힌트는 이것 이외엔 없다. 물론 데릭은 앞으로 몇 번 더 등장한다. 이들이 이렇게 바뀐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상 인물 ‘에릭’이 등장하는 이유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뒤바뀜이 주인공 케이든의 머릿속에 기억이 쌓이고 각인되는 방식에 대한 힌트라고 기껏 짐작할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2001)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다. 하지만 헤이즐이 읽고 있는 책(영화에서는 어떤 힌트도 제공되지 않는다.)이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제 1부, 「스완네 쪽으로 (Du côté de chez Swann」라는 사실은 쉽게 넘길 수 없다. 한편 헤이즐은 그 전에 카프카(Franz Kafka)의 『심판 Der Prozess』을 읽고 있노라고 케이든에게 말한다. 물론 케이든은 ‘박스 오피스에서 표나 파는 맹한 여자’가 이 어려운 책을 본다고 질책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의 고급 취향 때문에 연애 감정을 갖는 설정 역시 부재하다. 영화에서는 이런 느닷없는 공격(?)이 종종 출현한다. 여배우 클레어는 케이든이 구상한 연극의 개요를 들으면서 카라마조프적인 주제라고 감탄한다. 하지만 관객을 진정 정신없게 만드는 장면은 따로 존재한다. 딸을 되찾기 위해 베를린 행 비행기에 탑승한 케이든은 정신과 주치의 마들린이 권한 그녀의 저서를 읽고 있다. 이 장면을 재구성해보자.

 

마들렌(보이스 오버) : “잉여물은 흐르기 마련이다. 삶은 남쪽으로 흐른다. 현재만이 있을 뿐이고 나는 당신과 언제나 함께 한다. 예를 들어, 왼쪽을 보라.”

케이든 (왼쪽을 본다. 그의 왼편에 마들렌이 앉아 있다.)

마들렌 : 당신이 진료를 취소해서 시간이 남아 여행 가요.

케이든 : 선생님. 저는 이 책 내용이 잘 와닿지 않는데요.

마들렌 : 당신은 이미 책 속에 빠져 있어요.(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고, 케이든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케이든의 반응이 없자 그녀는 무심한 듯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마들렌(보이스 오버) : “나는 당신에게 내 다리를 보여준다. 난 가까이 서 있고 당신은 내 향기를 맡는다. 나의 농익은 육체를 제안하지만, 당신은 거부한다. 이 책은 끝났다.”

케이든 (그가 그 다음 장을 넘기자 책은 백지이다. 몇 장을 넘겨도 계속 백지이다.)

도대체 이 장면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릴없는 평론가는 이렇게 넘겨 짐작한다.

평론가(보이스 오버) : “이제 케이든은 백지를 채워야 한다. 결국 인생이란 주사위를 계속 던져야 한다. 니체적 정언명령,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는 삶의 주사위를 계속 던져야 한다. 그래. 케이든 계속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고!”

이렇듯 함정에 빠질만한 장면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엄습한다. 상상이 현실이 되고, 가짜가 현실을 대체한다. 홍상수의 <오! 수정>(2000)에서 재훈이 ‘수정’을 ‘정아’라고 잘못 호명했듯,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전혀 다른 이름을 호명하거나 부재한 인물을 끌어들인다. 그런가하면 네 살 무렵에 소설가로 데뷔했다는 가공의 작가 호레이스 아즈피아주(Horace Azpiazu)와 그의 작품(이 역시 가공의 산물), 『Little Winky』를 등장시켜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정신 나가기 일보 직전인 평론가는 또다시 보이스 오버를 사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평론가(보이스 오버) : “케이든은 자신의 평범한 재능에 대한 한계를 이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군.” 그러다가 자신에게 급하게 제동을 건다. “좀 더 큰 것을 큰 것을 보란 말이야. 너의 주인공 케이든처럼!” 그래, 하찮은 보이스 오버는 여기서 그만두도록 하자. 필요한 것은 평론 재장전(Criticism Reloaded).

 

2. 너무 잘 지은 제목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2022)에서 필요한 인물은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이다. 두 사람 이외에 모든 인물은 사실 부수적이다. 왜냐하면 ‘헤어질 결심’을 하는 당사자가 바로 이 두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어질 결심>은 복잡한 주변 서사가 용해되고 결국 두 사람으로 좁혀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이런 축소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꿈이었다. 작가 알프레드 되블린(Alfred Döblin)은 1927-29년까지로 시대를 한정하여 베를린을 소설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베를린 전체의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알렉산더 광장으로 축소했다. 되블린과 비슷한 이유로 작가들은 제유(提喩)를 사용한다. 범위를 좁히면 특정 마을이 될 것이고, 더 줄이면 가족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좀 더 줄이면 단 한 사람만 남는데, 그렇게 되면 무의식과 환상에 기댄 초현실주의나 부조리극이 될 것이다. ‘뉴욕’을 전면에 내세운 기라성 같은 대가들, 우디 앨런(Woody Allen),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스파이크 리(Spike Lee)도 뉴욕을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뉴욕의 재현을 처음부터 ‘제유’하겠다고 선언한 카우프만의 제목 짓기는 적절했다.

모든 음식을 ‘빵’으로 축소한, “죽음 아니면 빵을 달라.”라는 표현은 대표적 제유의 예시이다. 대부분의 제유는 축소되지만 때로 팽창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이 일본을 1:0으로 이겼다.”에서 한국은 11명으로 구성된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대표팀 11명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이라고 확대해도 의미가 통한다. 이렇듯 11명이 5천만 명으로 확대되어도 제유의 수사법이 작동한다. 어줍은 문법 지식까지 동원해 <시네도키, 뉴욕>을 말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제목에 ‘시네도키(synecdoche)’, 즉 제유라는 수사법이 등장하기 때문이며, 더 큰 이유는 ‘축소의 제유’뿐만 아니라 ‘팽창의 제유’까지 작품이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껏 팽창의 제유는 단지 수사법상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왔다. 왜냐하면 ‘뉴욕’이라는 디제시스, 즉 예술 작품에 나타난 시·공간에 실제 뉴욕을 완전히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은 대담하게도 이 한계를 넘으려 한다. 일간지 리뷰처럼 이 영화를 소개해보자. 그리고 이 리뷰가 불만족스러운 이유를 생각해보자.

 

주인공 ‘케이든’은 소도시 극장에서 연극 연출가로 살아간다. 그에겐 화가인 아내, ‘아델’ 그리고 딸 ‘올리브’가 있다. 케이든과 아델은 서로 잘 맞지 않는 부부다. 케이든의 연출작이 선보이는 오프닝나이트에도 아델은 작업하던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친구랑 수다를 떨면서 밤을 지새운다. 케이든은 점점 병들어 가고 스스로 하찮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내는 올리브를 데리고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런데 혼자 남겨진 그에게 신의 은총이 내린다. 천재적인 예술가가 제작비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맥아더 상금’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40년에 걸쳐서 연극을 완성하려 한다. 그러나 자기 삶을 한 치도 빈틈없이 진실하게 반영하려는 연극은 쉽사리 완성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 그는 주변인들의 죽음, 자살을 겪고 절망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극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는 후반부 내내 케이든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투영한 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따라간다. 하지만 맥락을 읽기 힘든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며,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겹쳐 독해하기가 난해하다. 카우프만(Charlie Kaufman)의 이 역작은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예술영화지만, 시나리오 작가로서 명성을 떨친 그의 역량을 온전히 살렸다고 말하긴 어려운 작품이다.

위의 위(僞) 리뷰는 틀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네도키, 뉴욕>을 본 관객이라면 이 리뷰가 못마땅할 것이다. 이 리뷰가 부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일차적 이유일 것이고, 더 나아가 밝혀야 할 수수께끼들이 한가득 들어있는 이 작품의 상자를 열지 않은 채, 겉모양만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네도키, 뉴욕>은 애초에 리뷰가 불가능한 작품이다. 리뷰에서 어찌 제유의 두 가지 상이한 양태를 해석하며, 카우프만이 포석을 깔아 둔 수많은 영화적 기호들을 모두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닌, 두 가지 제유로 인해 아델과 케이든은 불일치가 예정된 인물들이다. 왜냐하면 케이든의 제유는 무한대로 팽창하고 아델의 제유는 돋보기를 사용해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점점 축소되기 때문이다. 완전히 방향이 다른 두 제유의 충돌은 어쩌면 아델과 케이든의 예술관의 충돌을 말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아델은 딸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된다. 이제 남겨진 케이든은 자신의 세계를 팽창시켜 수사법적 의미에서가 아닌 진짜 ‘뉴욕’이라는 세계에 도달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3. 테아트룸 문디(Teatrum Mundi)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연극이며 연극이 인생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이 연극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언술은 연극이 이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며, 우리 인간은 ‘신이 허락한 배역을 소화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번뿐인 인생,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배역을 진심으로 도모해야 한다. 연극과 인생의 유비는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 As You Like It]의 2막 7장에 나오는 자크의 방백, “All the world’s stage,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를 요약한 것이다. 세상은 무대, 인간은 배우라는 관점은 바로크의 세계관인 ‘테아트룸 문디’로 이어진다. 모든 예술가가 시·공의 한계로 인해 그러했듯, 바로크의 테아트룸 문디의 세계관 역시 축소의 제유법을 이용했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다룰 무대는 아무리 커진다 해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축소의 제유는 합당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셰익스피어도 [리어 왕]에서 궁전을 브리튼 왕국으로 다시 이를 인간세계로 확대하는 수사법적 전략을 사용했다. 무모한 카우프만은 모든 예술가가 사용하던 이 전략에서 벗어난 예술을 처음으로 꿈꿨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도키, 뉴욕>은 그 시도 자체만으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케이든 역시 처음에는 축소의 제유법에 익숙한 예술가였다. 그가 맥아더 기금을 수상하기 전에 ‘스케넥터디(Schenectady)’라는 작은 도시에서 올린 연극은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극화한 이 연극은 전형적인 축소의 제유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하는 예술에는 관심이 없고 본인의 작업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아내는 관객이 작품을 돋보기를 사용해야 감상할 수 있는 ‘축소 제유법 예술’의 달인이다. 그러므로 케이든은 이제 축소의 제유법과의 투쟁을 그만두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때마침 아내는 베를린으로 도망치듯 떠났고 ‘맥아더 상금’은 그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케이든은 자신이 살던 스케넥터디가 팽창의 제유법을 감당하기에 너무 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뉴욕에서 자신의 디제시스를 무한정 팽창시키려 한다.

 

케이든이 꿈꾼 연극의 모토가 온전한 자기의 투영이었기에 그는 본인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런데 이 자기 이야기에는 아델과 올리브가 필수적이며 올리브의 보모이자 아델의 친구인 마리아가 빠질 수 없다. 물론 자신의 부모, 스케넥터디의 극장에서 같이 작업하던 배우, 박스 오피스 직원도 등장해야 한다. 그들에게도 친구와 애인이 있을 것이므로 그 사람들 역시 등장시켜야 한다. 삶은 모든 관계와 운동의 총체이기에 케이든이 만든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현재형일 수밖에 없다. 자신과 지인들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는 매번 운동의 벡터가 달라지므로 그 결과에 따라서 극은 매일 변화하며 점점 팽창한다. 이제 자연스럽게 실제 세계와 연극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는 허물어진다. 경계 자체가 사라지자 디제시스가 점점 확대된다. 그리고 이에 발맞춰 연극의 무대도 점차 확대되어 뉴욕에 근접한다. 팽창은 멈출 수 없는 숙명이 된다. 케이든과 결별한 아델 역시 자신의 축소를 멈출 수 없다. 한쪽이 베를린에서 ‘작게 더 작게’를 외치자, 다른 한쪽은 대서양 건너편 뉴욕에서 ‘크게 더 크게’를 외친다. 마치 원자와 우주의 유비(類比) 혹은 대립처럼 보인다. 우리는 카프만이 축소보다는 확대의 제유에 더 방점을 두었기에 케이든의 서사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델쪽 세계를 궁금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결국 케이든과 아델의 방식은 방향성만 달리한 채 목적지가 같기에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눈치 빠른 관객은 충분히 예상했겠지만, 그들은 인생의 종착역, 바로 죽음에서 필연적으로 하나로 통합된다. 우리를 혼돈에 빠트렸던 팽창 제유의 방식, 이 방식의 독해는 그리 간단치 않다. 열쇠는 미장아빔(Mise en abîme)에 있다.

 

4. 팽창 제유법의 기묘한 방식

오래전부터 극중극(劇中劇)은 특별한 장치라고 여겨졌다. 셰익스피어가 [햄릿 Hamlet]에서 펼쳐 보인 극중극은 테아트룸 문디 사상을 압축적으로 재현한다. 햄릿은 극중극 「곤자고의 암살 The Murder of Gonzago」를 연출하면서 이 극중극의 목적을 “자연에 거울을 향하는 것”(The mirror up to Nature)라고 밝힌다. 햄릿은 이 극중극에서 벌어진 사건을 연극 [햄릿]의 등장인물인, 클로디우스(Claudius)의 범행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햄릿]의 디제시스와 「곤자고의 암살」이라는 두 가공의 디제시스는 서로 거울처럼 반영되면서 비로소 ‘왕의 시해’라는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 두 디제시스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던 벽은 극중극 장치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와해한다. 물론 고다르의 <경멸>처럼 극중극중극(劇中劇中劇)의 형태 혹은 그보다 더 복잡한 구조도 얼마든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결국 극중극, 즉 미장아빔의 목적은 디제시스들 사이의 운동성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 무수한 벡터들로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을 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장아빔이 시간을 가시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영화는 오손 웰스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이다. 거울 방에 갇힌 리타 헤어워드의 움직임은 서로 다른 거울 면에 비치고 이 비춤을 또 다른 거울이 비춘다. 이 전형적인 ‘크리스탈 이미지’ 안에서 우리는 시간을 본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이 장면에서 대과거, 과거, 현재는 무한하게 세분된 채 펼쳐진다. 그러므로 미장아빔을 이야기의 중첩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미장아빔은 내부를 관통하여 수직적으로 전개되지만, 수평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미장아빔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이 수평적 미장아빔이 어쩌면 이 세계의 본질일 수도 있다. 카우프만은 수평적 미장아빔이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자신을 둘러싼 주변 그리고 뉴욕, 나아가 세계의 시·공을 포괄하려 한다.

좀 더 자세히 카우프만의 전략을 탐색해보자.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운동, 우리는 이 운동의 방향성을 알 수 없다. 신만이 파악할 수 있는 벡터들의 향연을 카우프만은 자신의 마리오네트, 케이든을 사주해 바라보고자 한다. 이 아이디어는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 시작된다. 오디션 현장에 ‘새미’라는 노인이 배역을 따기 위해 케이든을 찾아온다. 그런데 새미는 케이든을 20년 동안 몰래 따라다닌 인물이다. 케이든은 자신을 진정으로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을 연극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대역으로 낙점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역이 된 새미의 이야기를 추가하기 위해 새미의 대역마저 연극 안에 집어넣는다. 이어서 케이든이 아내와 헤어지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만난 극장 직원 헤이즐과 여배우 클레어 그리고 그들의 대역도 참여하게 된다. 인물들은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면서 일상을 보내고 일상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시 연극에 그대로 기입된다. 케이든의 연극은 이렇게 점점 수평적으로 팽창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대역은 원본을 완벽하게 모방하기 위해 디제시스 밖을 넘나드는 일이 잦아진다.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터진다. 새미는 케이든을 열심히 모방하다가 급기야 디제시스 밖에 존재하는 케이든의 애인, 헤이즐을 사랑하게 된다. 헤이즐 역시 실제 애인 케이든보다 키도 크고 ‘울보’도 아닌 새미에게 끌린다. 이들의 기묘한 삼각관계를 지켜보던 헤이즐의 대역 태미는 이것마저도 연극 무대에 올리자고 제안한다. 결국 태미의 제안으로 두 디제시스는 하나로 합쳐지고 양자를 구분하지 못한 새미는 자신의 원본인 케이든과 그의 실제 애인 헤이즐 사이를 질투하여 건물에서 투신한다. 이 투신 장면은 케이든의 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날 뻔한 사건이었다. 과거, 아내가 베를린으로 떠난 후, 잠시 교류했던 헤이즐이 데릭(그 지하실의 데릭!)이란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훔쳐보던 케이든은 실제로 투신하려고 했지만 어떤 남자의 제지로 미수에 그친다. 그러나 연극 안과 밖에 위치하던 두 디제시스가 혼합된 제 3의 디제시스에서 새미는 실제로 투신하고 만다. 투신하기 직전 새미는 케이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미 : 난 당신을 항상 지켜봤어. 케이든. 당신은 자신을 보는 만큼 타인을 본 적이 없었어. 그러니 나를 봐. 나의 비통함을 봐, 내가 뛰어내리는 걸 봐.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봐. 더 이상 볼 것도 없고, 따라다닐 것도 없고, 사랑도 없다는 걸 직시해. 나 대신 헤이즐에게 작별 인사도 해줘.

곧바로 새미의 장례식이 이어진다. 새미의 죽음을 애도하던 케이든은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물론 이 장면도 케이든의 새로운 대역이 발화하는 독백 장면으로 관객에게 재현된다.

케이든 : 이 세상(뉴욕)엔 천삼백만 명이나 살아. 그렇게 많은 게 상상이나 가? 그중에 엑스트라는 한 사람도 없어. 모두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지. 합당한 존중을 받아야 해. 이제 어찌해야 할지 알겠어.

케이든이 몇 십 년째 연극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완성된 형태를 무대에 상연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시퀀스에서 그가 길을 잃은 그 첫 번째 이유가 밝혀진다. 케이든은 지금까지 뉴욕을 제유하기 위해 자기만을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뉴욕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뉴욕에 사는 천삼백만 명 모두는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케이든이 이 연극을 완성하지 못한 진정한 이유를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장례식을 치른 케이든은 곧장 헤이즐의 집으로 향한다. 그들은 연극과 실제 생활을 넘나들면서 쌓은 사랑과 우정이 담긴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며 회한에 젖는 중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섹스를 한 다음 날, 헤이즐은 연기 흡입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슬픔에 빠진 케이든은 주인을 잃은 헤이즐의 전화기에 대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메시지(케이든) : 이제 연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이건 하루아침에 일어나게 될 거야. 그날은 당신이 죽기 전날이 되겠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고 난 그날을 영원히 살 수 있을 거야. 좀 있다가 봐.

그러나 케이든의 다짐과는 달리 연극은 쉽게 완성되지 않는다. 계속 사람이 죽어 나가고 그 대역을 새로 도입하고 그 죽음마저 미장아빔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팽창의 제유법에서 완성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케이든은 그 자신이 팽창의 제유법 안에 갇혀 있기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가 무한 겁으로 된 미장아빔의 사슬에서 빠져나와 이를 종결짓기 위해서는 디제시스 바깥으로 빠져나오든지, 아니면 죽어야 한다. 그러나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방법은 사실 이음동의어이다. “어찌 해야 될지”를 완벽하게 깨닫지 못한 케이든은 자신의 대리인이었던 새미의 방식을 선택한다. 안쪽 미장아빔과 바깥쪽 미장아빔을 통합하는 방식은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복잡하게 이뤄진다.

 

5. 엘렌-케이든과 케이든-엘렌

여기서부터 호칭에 유념하자. 케이든은 헤이즐이 죽고 나자 너무 고통이 커서 더 이상 연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서에게 연출을 맡을 자신의 대역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이 말을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엘렌(아델의 뉴욕 집, 청소 도우미 역할)은 자신이 케이든을 가장 잘 알기에 연출자인 그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죽기 전 케이든의 대역 새미는 케이든에게 아델의 뉴욕 집 주소를 알려준다. 새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케이든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 했고 이를 다시 연극에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새미에게 주소를 받아 든 케이든은 아델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케이든은 열쇠가 없어 들어갈 수 없다. 아델의 집, 현관문 앞에서 서성이는 케이든에게 한 노파가 “새로운 도우미로 예정된 엘렌”이냐고 묻는다. 노파는 후임으로 엘렌이라는 사람이 올 테니, 그에게 열쇠 꾸러미를 전달하라는 아델의 당부를 전하고 사라진다. 이후 가짜 도우미, 엘렌 노릇을 하게 된, 케이든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델의 빈집에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침대 시트도 갈면서 지내다가 늦은 밤에 돌아오곤 한다. 물론 이 에피소드 역시 연극에 반영되어 엘렌 역을 맡은 여배우가 케이든의 행동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연극 속에서는 케이든이 그동안 엘렌이라는 도우미로 살았던 경험이 펼쳐지는 중이며, 오디션으로 캐스팅한 중년 여배우는 디제시스 밖에 있던 가짜 도우미 케이든을 연극 속에서 모사한다. 이 여인은 누구보다 더 케이든의 은밀한 행동과 그 이유를 가장 잘 아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연출에 대한 영감이 떨어진 케이든을 대신하게 된 그녀는 이제 엘렌이라는 배역에서 케이든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새로운 케이든을 케이든-엘렌(다이엔 웨스트 배역)이라고 부르자. 엘렌이 케이든-엘렌으로 바뀌어 위치 이동했으므로 도우미 엘렌은 사라진 셈이다. 엘렌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깊은 인물은 케이든이므로 그는 연출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엘렌 역을 맡게 된다. 우리는 그를 엘렌-케이든(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배역)이라고 부르자. 정리하자면 엘렌과 케이든은 자리를 바꾸어 케이든-엘렌(다이엔 웨스트/연출자)과 엘렌-케이든(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도우미)이 되었다.

 

엘렌-케이든(호프만)이 도우미 역할을 하러 다시 아델의 아파트로 향한다. 물론 이는 안쪽에 자리한 미장아빔이며 극중극이다. 예전에 말을 걸었던 노파가 엘렌-케이든(호프만)에게 엘렌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답하자, 노파는 “케이든이 당신에게 이걸 주라고 했어요.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대요.”라고 말하면서 어떤 물건을 건네준다. 아직 엘렌 역에 익숙하지 않은 엘렌-케이든(호프만)이 머뭇거리자 와이어리스를 통해 디제시스 밖에서 실제 연출을 맡고 있던 케이든-엘렌(웨스트)이 그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한다. “죽음에 너무나 가까운 아델의 이웃(노파는 정말 죽음에 가까운 듯 늙어 보인다)을 보고 슬퍼진다. 아델의 이웃인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엘렌-케이든(호프만)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케이든-엘렌(웨스트)의 지시를 받아서 엘렌-케이든(호프만)은 엘렌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낸다. 일과를 마친 엘렌-케이든(호프만)은 벽장 안에 마련된 침대에서 눈을 감고 쉰다. 이때부터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엘렌-케이든(호프만)의 상상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다. 그런데 화면에 느닷없이 에릭이란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케이든-엘렌(웨스트)과 한집에 거주하고 있다. 이 장면 위로 “그를 실망시켰고 그는 나를 증오한다.”라는 대사가 보이스 오버로 들린다. 곧바로, 죽은 아델이 등장해서 “실망시키지 않은 사람은 없어, 알면 알수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엘렌-케이든(호프만)의 잠든 장면, 한 번 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 장면들 속에 카우프만의 진짜 의도가 숨어있다. 에릭이란 인물은 실제 케이든의 삶에는 없던 존재이다. 에릭은 올리브(딸)의 보모인 마리아가 만들어낸 케이든의 가상 게이 애인이다. 그러므로 “그를 실망시켰고 그는 나를 증오한다.”라는 보이스 오버는 케이든 자신이 가상 애인에게 하는 대사이며, 가상 애인 에릭의 심드렁한 대꾸는 케이든을 향한 것이다. 이 난해한 장면을 이해하기 위한 힌트가 있다. 마리아는 올리브가 아버지인 케이든을 완전히 잊도록 만들기 위해, 그가 가족을 버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면서 이 거짓말 서사를 진짜처럼 위장하려고 가공의 게이 애인, 에릭을 만들어낸다. 올리브는 베를린에서 살다가 과도한 문신 때문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기 직전이며, 케이든은 올리브를 만나러 온다. 그 자리에서 올리브는 마리아가 만든 가짜 서사를 그대로 믿은 나머지, 케이든이 에릭과 항문 섹스를 하기 위해 가족을 버렸다고 절규한다. 케이든이 이 거짓말을 모두 마리아가 만들어냈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다. 올리브는 케이든에게 용서할 테니, 무릎 꿇고 모든 사실을 인정한 후에 사과하라고 말한다. 진실을 말해도 소용없자 결국 케이든은 올리브의 말대로 행한다. 그러나 올리브는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죽는다. 작은 벽장 침대에 누워있던 엘렌-케이든(호프만)에게 이 모든 기억, 즉 실제 기억과 조작된 기억이 동등한 무게를 지니면서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동시에 자신과 관련이 없는, 도우미 역할을 했던 엘렌의 기억마저 그에게 침투한다. 이 혼합된 새로운 디제시스에는 어린 엘렌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엄마와 공원에서 피크닉 중이다. 소녀 엘렌은 “엄마, 난 지금,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 거예요. 그리고 20년 후에 내 딸과 함께 여기에 다시 와서 똑같은 피크닉을 즐길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때 엘렌의 엄마는 “지금껏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말이네”라고 대꾸한다. 엘렌-케이든(호프만)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던 케이든-엘렌(웨스트)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오열한다. 엘렌과 케이든의 기억은 이렇게 얽혀든다. 또한 보이스 오버로 된 지시 사항은 완전히 시공을 초월하여 아델과-엘렌(아델이 자기 집 도우미인 엘렌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 초상화를 가짜 도우미 노릇을 하던 케이든이 아델의 집 거실에서 바라본다)을 연결하고 엘렌의 죽은 엄마와 케이든-엘렌(웨스트)을 연결한다. 이렇게 엘렌-케이든(호프만)의 머릿속에 그가 알던 모든 사람의 기억이 총체적으로 접속된다.

이제야 우리는 대리로 연출 역을 맡은 케이든-엘렌(웨스트)의 다음과 같은 지시 사항 혹은 보이스 오버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존재하기 위해 발버둥 쳐왔고,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모든 이들이 겪는다. 각각, 개개인의 경험과 개성은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모든 개개인이다. 그래서 당신은 아델이다. 또한 헤이즐, 클레어이고 올리브이자, 엘렌이다. 그녀들의 메마른 슬픔은 당신 것이다. 그녀들의 모든 외로움, 회색의 뻣뻣한 머리카락, 붉고 거친 손 또한 모두 당신 것이다. 자신도 남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이해해야 할 때다.”

 

6. 제유법, 뉴욕 그리고 세계의 변두리

엘렌-케이든(호프만)은 아침에 눈을 떠, 연극의 무대가 뉴욕 시내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꾸며진, 완전히 팽창된 뉴욕 시내를 걷는다. 그곳에는 새미가 죽어있고 거리는 황량하다. 노쇠한 탓에, 몇 걸음 걷지 못한 그는 뉴욕 거리를 차로 돌고 있다. 그러다가 연극 소품들을 모아 놓은 창고 앞에서 어떤 여인을 보게 된다. 그는 여인에게 다가가, 다들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여인은 답한다. “대부분은 죽었고 몇몇은 떠났어요.” 그녀에게 다가간 엘렌-케이든(호프만)은 너무 지쳤고 외롭다면서 잠시 곁에 있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는 엘렌-케이든(호프만)의 꿈속에서 엄마로 나왔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따라서 지금 두 사람의 만남은 엘렌-케이든(호프만)과 죽은 엘렌 엄마의 불가능한 접속이다. 그녀에게 익숙해진 엘렌-케이든(호프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모든 집 속에 개개인들의 꿈이 있어요. 결코 알지 못할 그 사람들의 생각들도 있죠. 그게 진리겠죠. 제 딸이랑 소풍을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이든-엘렌(웨스트)의 지시 사항이 들려온다. 엘렌-케이든(호프만)은 그대로 따라한다. “어깨에 머리를 좀 기대어도 될까요?” 꿈속의 엔렌 엄마는 기꺼이 허락한다. 그리고 엘렌-케이든(호프만)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녀도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밝아진다. 엘렌-케이든(호프만)은 진짜 케이든으로 돌아와 마지막 발화를 한다.

“이제 이 연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내 생각에….”

그의 마지막 발화는 연출자, 케이든-엘렌(웨스트)의 지시 사항인 “모두가 죽는다.”라는 보이스 오버와 맞물린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극이 이렇게 막이 올랐고 케이든이 죽으면서 연극은 비로소 완성된다. 수없이 중첩된 겹을 가진 미장아빔은 결국 케이든의 뇌에 켜켜이 지층을 만들고 자신, 타인, 진짜, 가짜까지 모두 포함된 기억을 아로새긴다. 이 기억은 케이든이 살아 있는 한 계속 팽창할 것이므로 ‘뉴욕에 대한 제유법’도 팽창될 것이다.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의 행동과 생각 그리고 기억의 모멘텀과 벡터의 최종합이 케이든의 머리에 들어선 순간, 그는 죽고 뉴욕의 제유법은 팽창을 멈춘다. 이것이 그가 깨달은 “이 연극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진정한 결론이다. 죽음으로써 완성된 연극은 그러나 비극은 아니다. 케이든은 평상시에 “끝은 시작에 내재되어 있다.”를 신조처럼 중얼거리면서 이 거대한 연극 무대를 돌아다녔다. 팽창하던 제유는 이렇게 케이든의 머릿속에서 집적되면서 드디어 수축하는 제유와 만난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두 제유가 죽음의 세계에서 비로소 합일된다.

 

내게 많던 나는 어디론가 다 떠나버렸다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가 꾸어온 꿈보다 더 가짜일지도 모르지

실현되지 못하고 떠나버린 내가 더 나다울지도 모르지

그런 내가 떠난 곳도 저 먼 변두리 이곳

세계의 모든 변두리에서 나는 나를 만져볼 수 있네

세계의 변두리를 떠돌고 있는 수많은 나를

– 백무산, ‘세계의 변두리’ 중에서

Viva Kaufman, Viva <Synecdoche, New York>!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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