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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안테우스의 마법 <유니버스>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안테우스의 마법 <유니버스>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3.07.11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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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종종 보이는 어린 시절 살던 집이 있다. 잦은 이주 속에서도 이상하게 그 집은 주기적으로 꿈에 나타났다. 그러다 몇 해 전 작정하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가면 바로 알 거라 여겼던 그 장소는 집은커녕 동네 자체가 파헤쳐져 기억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온 후, 더 이상 꿈에 그 집이 보이지 않았다. 기억조차 사라진 것이다.

 

<유니버스>는 1980년대 서울 천호동 유니버스 백화점에 대한 장소기억을 담은 에세이 영화이다. 한 중년 여성의 뒤를 따라 코오롱 상가 내부 코오롱 찻집에 들어선 영화는 곧 이어 “코오롱 찻집이 문을 닫았다”는 자막에서 출발한다. 공간 내면을 파고들 듯 장소에 들어선 영화는 장소의 존재와 부재를 연이어 담은 후, 지금은 사라져 이마트기 들어선 코오롱 상가 이전에 존재했다 사라진 유니버스 백화점을 떠올린다. 영화는 감독의 꿈에 나타나곤 하는 백화점 앞 놀이기구에서 본 광활한 우주에 대한 황홀한 기억을 추적한다. 사라진 장소에 대한 기억의 사실유무를 최면 요법으로 찾아나선 것이다. 원태웅 감독 특유의 장소기억을 영화로 형상화한 것이다. 영화는 존재와 사라짐, 기억과 실재, 과거와 현재, 꿈과 무의식이 교차하고 겹쳐지고 미끄러지는 여정 끝에 말한다. “아무도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신기했다”고.

 

신기함은 영화 <유니버스>를 관통하는 감각이다. 그동안 사라진 공간을 향한 안타까움이나 분노 혹은 향수나 애도와는 사뭇 다른, 기괴하고 황홀한 감정은 영화 구성 뿐 아니라 영화의 이미지 속에 가득하다. 영화는 최면 요법을 통해 유년의 장소기억에 접속한다. 자신의 몸을 경유해 무의식으로 도시 속 공간의 기억 탐구에 들어선 것이다, 영화는 최면사의 입을 빌어, 기억은 “원본 그대로의 데이터가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포인트로 저장”된다며 다섯 개의 장소를 포인트로 장소기억을 형상화한다. 각 장소이자 챕터는 공간에 대한 감독 개인의 기억과 공개적으로 모집된 거주민의 기억을 연결하여 장소에 대한 공통감각과 상호연계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당대 미디어의 기록과 만나 장소에 내재된 시대 풍경과 조우한다. 장소기억은 과거의 죽은 역사 기억이 아니라, 장소에 대한 감정과 생생한 기억의 흔적을 바탕으로 장소에 남겨진 다층적 기억을 다루는 살아있는 기억이다. <유니버스>는 장소에 내재된 체험과 기억을 우주를 경유해 공간에 깃든 분위기를 담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 유니버스는 직접적으로 사라진 공간 유니버스 백화점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감독이 어린 시절 체험한 장소기억인 우주를 언급하고, 개발과 재개발로 사라짐이 보편인 이 시대와 도시를 일컫는다.

 

천호동 뿐 아니라 한국사회는 산과 같은 자연 지형을 제외하고는 전 국토가 같은 지역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급격하게 삶의 터전과 양식이 변했다. 더구나 이는 여러 세대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중장년층 세대가 몸소 경험하여 기억하는 시간 내 변화이다. 영화는 도시의 장소에 대한 기억의 소멸과 방치를 담되, 감독 자신의 몸을 경유해 신기함의 감각으로 재고찰한다. 영화는 자료조차 거의 없는 사라진 공간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기억과 꿈을 동시대 디지털 감각인 CG와 아날로그적인 연필화로 겹쳐낸다. 그런 의미에서 <유니버스>는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카메라 기반의 영화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한계에 대한 열린 가능성이기도 하다.

* 안테우스의 마법이란 역사적 장소를 방문했을 때 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경계가 사라지면서 역사 속의 주인공이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즉 장소를 경유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간의 만남을 일컫는다. <기억의 공간>의 저자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용어이다. 

 

사진 출처: 서울독립영화제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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