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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잿빛 무덤 속 한 줄기 빛을 찾는 여정, <콘크리트 유토피아>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잿빛 무덤 속 한 줄기 빛을 찾는 여정, <콘크리트 유토피아>
  • 윤필립(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0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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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하는 연기, 여우 같은 각본, 그 위에 단풍처럼 물드는 장엄한 사운드 트랙과 날카로운 대사
<콘크리트 유토피아> 공식 포스터(네이버 영화)

모든 것이 엎어진 그 이후의 삶은 과연 새로움의 시작일까 아니면 구태의 반복일까? 재난 영화는 이러한 현실의 파괴와 전복을 꿈꾸는 대표적인 장르이다.

그동안 충무로에서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특정 '재난'이라는 사건과 그것에 관여하는 여러 인간군상에 집중했었다, 1000만 영화 <해운대>(윤제균, 2009)가 그랬고, <백두산>(이해준, 김병서, 2019)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 이산가족 문제만큼 큰 재난이 없을 것만 같았던 1980년대, <길소뜸>(임권택, 1986)이 새롭고 영화적이었던 이유는 '이산가족 찾기 운동' 그 자체보다는 이산가족의 극적인 만남이라는 그 사건 직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를 나눈 사이일지라도 분단이라는 인위적 장벽 하에 오랜 세월 동안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하루 아침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가능할까? <길소뜸>은 이러한 문제를 막연한 낭만주의를 배제한 채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고, 그래서 오히려 새로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기존의 한국형 재난영화와 궤를 달리하며 새로움을 선사한다. 재난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그것을 이겨내려 사투를 펼치는 여러 인간 군상을 그려 내기보다는, 결정적인 재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앞으로 살아내려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동원된 이병헌, 박보영, 박서준 등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는 엄태화 감독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생기를 불어 넣으며 거짓말 같은 극에 극도로 현실적인 핍진성을 부여한다.

과연 전적으로 타락한 세상에 거짓말 같은 대지진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기회일까 비극일까? 이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기막힌 이야기는 바로 그 판이 뒤집힌 세상 '황궁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온 세상을 집어삼킨 대지진, 그리고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서울. 오직 '황궁 아파트'만 건재하고 모든 것이 무너졌다. 소문을 들은 외부 생존자들이 황궁 아파트로 몰려들자 '황궁 아파트'의 입주민들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생존을 위해 하나가 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새로운 주민 대표 ‘영탁’을 중심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선 채 아파트 주민만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 덕분에 지옥 같은 바깥 세상과 달리 '황궁 아파트' 주민들에겐 더 없이 안전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끝이 없는 생존의 위기 가운데 '황궁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도 예상치 못한 갈등이 시작된다.

 

대지진 후 폐허 위에 우뚝선 황궁아파트(네이버 영화)

이렇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뒤집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 어떤 변화도 없을 것만 같은 썩어 빠진 세상에 대한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했던 문제들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현실임이 부각된다.

이러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특정 재난 이후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델리카트슨 사람들>(장 피에르 주네, 1992)이나 <설국열차>(봉준호, 2013)와 맥을 같이 하며, 현대 사회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계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생충>(봉준호, 2019)과 <슬픔의 삼각형>(루벤 외스틀룬드, 2023)과 일맥상통하다.

어떻게 보면 새로울 것 전혀 없는 서사는 우선 '아파트'라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막연한 욕망의 대상과 결부됨으로써 극에 개연성을 불어 넣는다. 또한, 그러한 공간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권력관계'는 현실 세계에서 국민들이 특정인에게 특별한 반감 없이 양도하며 발생하는 계층 간의 차이와 결부된다.

 

대지진 직후 부녀회장의 집에서 열린 주민회의(네이버 영화 제공)

이와 더불어, 영화 전반에 입혀진 장엄한 사운드 트랙은, 파고들수록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구태의연한 현실을 보다 흥미롭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사운드 트랙은 감독의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영화 속에 넘치는 상징과 은유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과적으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인간이 직접 만들어 내고 지키려는 그 '지상천국'은 과연 모두를 위한 헤테로토피아인가 아니면 '그들'만을 위한 판옵티콘인가,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사회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하는 의문을 던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공식 포스터(네이버 영화)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대학에서 강의하며 대중문화, 담화분석, 다문화 문식성, 한국어교육 콘텐츠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계명대에서 국문학, 영문학을 복수전공하고 연세대 국문과에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영상작가교육원에서 지상학 작가, 하원준 작가 등을 사사했으며,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기독교 영화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미국 에모리대 펠로우십, 대만 국립정치대와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로 지내다 2019년 귀국 후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와 한국어교육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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