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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는 어디서부터, 얼마나 망가져 버린 걸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는 어디서부터, 얼마나 망가져 버린 걸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1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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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포스터

"임대 아파트가 포함된 학군으로 분류되어 아파트 이미지 저하가 우려됨."

"임대 세대 어린이는 놀이터 사용 금지"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연쇄 칼부림 사건 직전까지 국내 뉴스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는 ‘아파트 부실시공’이었다. 건물에 철근이 누락된 믿기 힘든 현실에 의도치 않게 수혜를 입은 영화가 있다. 엄태화 감독의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이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영화 속 상황이 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오버랩하며 화제를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비록 부실 공사와는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이었지만, 영화는 여전히 현실을 고발하는 자화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곳엔 주택 문제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천하디천한 모습이 있다. 임대 아파트 논란이 본격화된 2020년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차별은 여전하다. 수많은 사건 사고에 잊힌 우리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기형적인 부동산 구조와 주택 문제를 다룬 영화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다수는 <싱크홀>(2021)처럼 값비싼 아파트를 딴 세상 바라보듯 바라보거나, <소공녀>(2017)처럼 내 집 마련의 꿈을 단념하고 부유한다. 혹은 장마철마다 반지하에서 침수 피해에 전전긍긍하며 다른 사람의 집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서양 귀신들이 ‘정확한 구조마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넓은 집 구석구석에 숨어들 때, 한국인은 다리 뻗고 누울 단칸방을 찾지 못해 허덕이는 셈이다. 주택 문제가 아포칼립스 서사와 직접 결합한 사례 또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처음은 아니다. 단적으로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2016)은 노숙인으로부터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 이야기를 다루었다. 두 영화가 모두 배제된 타자로부터 시작된 공멸을 경고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서울역>(2016) 포스터

디스토피아 장르를 표방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수라장이 된 한국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여타 작품들과 차이점을 갖는다. 우선 영화에 절대적인 악인 캐릭터가 부재하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밖에 내몰린 ‘드림 팰리스’ 주민들에게 차별받은 아픔이 있다.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는 영탁(이병헌 扮) 또한 플래시백을 통해 전세 사기 피해자였음이 밝혀진다. 가해자로 변모한 약자들의 모습은 작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슬픔의 삼각형>(2022)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슬픔의 삼각형>과 달리 집을 둘러싼 폐허 속 ‘계급 전복’이 야기하는 쾌감 따위는 없다. 누구나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지만, 악은 우리 모두에 내재한다는 씁쓸함 뿐이다.

절대 악과 더불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눈에 띄는 어린아이 캐릭터를 찾을 수 없다. 세상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미래 사회를 예측하는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 아이들은 놀랍도록 영화를 닮아있다. 망가진 세계를 다루는 장르에서 아이의 역할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추악한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복하며 섬뜩함을 유발하거나 혹은 어른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순수한 선의를 보이며 희망을 제시한다. 만약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어린아이가 등장했다면, 그 아이는 황궁 아파트를 점령한 전체주의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영화와 달리 2023년 현실의 서울에는 임대 아파트 거주자를 조롱하는 초등학생이 있다. 스크린에 끝내 아이를 등장시키지 않은 이유는 끔찍한 대물림의 원인이 결국 어른들에게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명화(박보영 扮)는 ‘절대 악’과 ‘어린아이’라는 두 부재를 딛고 탄생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절대 악이 없는 세계에 그녀는 홀로 우뚝 선 절대 선이자 순진무구한 아이와 같다. 뚜렷한 대책 없이 공생을 주장하는 그녀의 낙관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캐릭터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다. 오히려 일차원적인 캐릭터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너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 속 '황궁 아파트'의 주민 수칙

우리는 극한의 상황에 맞닥뜨리면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움마저 타협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다. 전체주의적 색채를 띠는 황궁 아파트의 ‘주민 수칙’이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위기가 닥쳤을 때 집단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은 배제해야 할 약자를 찾는 것이다. 끝내 드림 팰리스 주민들을 내쫓았을 때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로 신격화했다. 아파트 단지 벽을 경계로 갈라선 사람들은 서로를 “사람 잡아먹는 괴물”로 여기고 혐오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원한 낙원’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새로운 혐오가 고개를 쳐든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적 체제 내에서는 누구든 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가와 전세의 격차는 물론, 남을 돕는 인도적 행위마저 붉은 낙인을 피할 수 없다. “살인자나 목사나 똑같은 세계”에서 인간은 선과 위선을 구분할 잣대를 잃는다.

주민 수칙 3항에는 ‘민주적 절차’라는 단어가 버젓이 적혀 있다. 이 민주적 절차가 황궁 아파트 주민에게만 허용되는 반쪽짜리 민주주의란 점은 차치해도 좋다. 차라리 민주주의라는 근현대 신화를 비판하는 편이 더 의미 있는 유효타를 날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원칙은 결코 제1 원칙이 될 수 없다. 민주적 절차를 거친 투표가 인간성을 저버리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면, 그 절차적 정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영화에서도, 또 역사적으로도 전체주의의 광기 속 민주주의는 이토록 부질없다. 텅 빈 민주주의를 비꼬듯이 영화는 서사 한가운데에서 뜬금없이 아파트 광고를 선보인다. 철저한 질서 아래 아파트 주민들은 각자가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며 밝게 미소 짓는다. 미소 짓는 개인들을 통제하는 ‘원리원칙’을 상징하듯 웅장한 클래식이 시퀀스 전체를 뒤덮는다. 경쾌한 톤의 스크린은 체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아파트에 살 수 없다.”는 공포 정치의 그림자만을 내뿜는다.

 

명화(박보영 扮)

만약 명화가 끝내 추악한 세상에 굴복하고 악의를 갖게 되었다면, 모순적으로 관객의 불편함은 해소되었을 것이다. 캐릭터가 비로소 “나였다면 그러했을” 범주에 들어가며 개연성을 갖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를 모방하는 픽션에서조차 선(善)을 위한 자리가 없다면, 우리는 영화가 제시한 파국을 막을 힘을 영원히 잃고 만다. 영화가 ‘악의 평범성’을 가리키는 것에 그친다면, 현실 세계는 황궁 아파트의 모습을 답습하고 공멸을 향할 뿐이다. 그렇다면 방점은 다른 곳에 찍혀야만 한다. 이것이 명화 캐릭터가 그 납작함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이다. ‘공생 혹은 공멸’의 구도에서 그녀는 ‘비현실’이 아닌 현실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이상향이 된다.

사진 출처 : 네이버영화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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