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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보여줄 수 없는 것,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보여줄 수 없는 것,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1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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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속편인가?

뉴욕 토박이인 케네스 로너건(Kenneth Lonergan)은 연극무대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내다가 TV로 옮겨 시리즈물 각본을 쓰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1993)로 유명한 해럴드 레이미스(Harold Ramis)는 각본가로서의 로너건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 주연의 <애널라이즈 디스 Analyze This>(1999)의 대본을 맡겼다. 계부가 정신과 전문의였던 덕분에 로너건은 빌리 크리스탈(Billy Crystal)이 연기한 정신과 의사 역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 인물을 창조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했고 특히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대부 The Godfather> 시리즈를 매우 감동적으로 봐왔던 터라,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가 맡았던 역할, 비토 콜리오네를 떠올리게 하는 대사를 영화 속에 적절히 인용하면서 레이미스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자신감이 붙은 로너건은 이듬해에 직접 메가폰을 잡고 <유 캔 카운트 온 미 You Can Count On Me>(2000)를 세상에 내놓았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차지한 여세를 이어, 2001년 개최된 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로라 리니(Laura Linney)와 로너건은 여우주연상과 각본상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에린 브로코비치 Erin Brockovich>(2000)의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와 <올모스트 페이머스 Almost Famous>(2000)의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유 캔 카운트 온 미' 포스터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화제가 되었던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2016)는 명확한 목적에 맞는, 빈틈없는 드라마투르기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드라마 작법을 메타적으로 접근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드라마투르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데뷔작인 <유 캔 카온트 온 미>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작품은 공간, 인물, 갈등의 양상이 매우 비슷한 비대칭적 데칼코마니이며,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속편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첫 번째 장소, ‘스코츠빌’과 남매 이야기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남매의 이야기를 다룬다. 둘은 성장해서 떨어져 살다가 동생 테리(마크 러팔로)가 누나인 새미(로라 리니)를 찾아오면서 변화의 국면이 시작된다. 로너건이 배경으로 선택한 스코츠빌(Scottsville)은 뉴욕 주 인근에 자리한 가상의 소도시다. 이곳은 주민 대부분이 가톨릭을 믿는 아이리쉬로 구성되어 있어 서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남매의 삶은 아주 간략하게 묘사된다.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이 끝나면 곧바로 성인이 된 두 사람을 따라간다. 남동생 테리는 특별한 직업 없이 미 대륙을 떠돌면서 살아간다. 그는 남을 해코지하진 않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종종 사고를 친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가 있는 몇 달 동안 그는 새미에게 연락하지 못하다가, 출소 이후 돈이 떨어지자 그녀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고향 마을 스코츠빌로 향한다.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형제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형제

새미는 아들 루디를 혼자 키우고 있으며, 가끔 남자 친구 밥과 데이트를 즐기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은행원이다. 그녀는 싱글맘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상관들 덕에 그럭저럭 지내왔지만 깐깐하고 소심한 행장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녹록치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한동안 연락 없던 동생이 돌아와서 손을 벌리자 감정이 격해진다. 하지만 그녀는 테리에게 루디를 보살펴 줄 것을 제안하고 이후 두 사람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옛집에서 잠시 동안 함께 살게 된다. 테리는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 친구가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자, 누나에게 빌린 돈을 송금해준다.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진 상태에서 루디를 돌보는 일로 일상을 보낸다. 아무리 남매지간이지만 같이 살게 되면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법. 새미는 무계획적이면서 무신론자인 테리에게 점점 불만이 쌓여간다. 새미는 동생이 걱정되어 그를 신부에게 데려가지만, 테리는 나름 확고한 주관을 가진 인물인지라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새미는 브라이언과 갈등을 풀기 위해 저녁 식사를 하다가 엉겁결에 그와 불륜관계를 맺고 만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영화 속에 고루 배치되면서 드라마는 점점 견고해진다. 테리는 새미의 과보호 아래 성장한 루디를 위해 어른들만이 출입하는 당구장에 데려가기도 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조카의 마음을 헤아려 생부를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테리의 행동은 새미를 폭발하게 만든다.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테리가 스코츠빌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3. 두 번째 장소,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형제 이야기

데뷔작의 제목 ‘You can count on me’는 참으로 직관적이면서 소탈한 제목이다. 말뜻 그대로 ‘넌 내게 기댈 수 있다’라는 의미 이외에는 별다른 함의가 없지만, 굳이 찾자면, ‘You’라는 주어 자리에 테리와 새미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Manchester By The Sea’라는 제목도 다른 방식으로 직관적이긴 마찬가지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바닷가 근처 맨체스터’라는 의미를 가진 도시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인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다. 그러므로 수고스럽지만 우리는 로너건이 이야기를 펼치는 무대를 ‘맨체스터’가 아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고 말해야 한다. 스코츠빌이 가상의 도시인 반면, 보스턴 북서쪽에 있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다. 그런데 이곳 역시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무대 스코츠빌처럼 가톨릭을 믿는 아이리쉬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형제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형제

영화의 주인공, 리(케이시 애플렉)는 고향,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떠나 보스턴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형인, 조(카일 챈들러)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다. 형은 오래전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터라, 미리 죽음 이후를 예비해 놓은 상태다. 리는 혼자 남겨진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과 함께 형의 유언장 내용을 확인하러 변호사 사무실을 들렀다가 그곳에서 조카의 후견인으로 자신이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리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다. 그가 귀향할 수 없는 이유는 초반부에 묘사되는 리의 비사회적이면서 폭력적인 행동의 원인과 겹친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 때문에 자식 셋이 모두 불에 타 죽고, 그 여파로 아내와도 이혼한 아픈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반 지하 방에 자신을 가둔 채 배관공, 전기공, 쓰레기 청소부 역할까지 도맡아서 처리하면서 속죄하듯 살아가는 리. 그런 그에게 형은 조카의 후견인을 맡아 달라고 유언한다. 하지만 이제 열여섯이 된 조카는 고향을 등질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패트릭에게는 아버지 조 그리고 삼촌인 리와 함께 어린 시절 ‘보트’를 타고 바다에서 낚시하던 경험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보트는 집과 함께 아버지가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극 중에서 걷잡을 수 없는 망나니로 설정된 엄마조차 자신과 함께 살길 거부한 마당에 그에게 이 보트는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영화 초반부터 좌충우돌하던 조의 치명적 ‘실수’가 무엇인지 점차 밝혀진다. 그는 서로가 속속들이 아는 이곳에서 랜디(미셸 윌리암스)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 셋을 두었다. 그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사는 여느 남자들처럼 밤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술 마시고 게임도 하면서 그럭저럭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리는 화재 방재를 위한 난로 칸막이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고 술을 사러 밤길을 나선다. 그리고 가게와 집 사이를 왕복한 잠깐 동안 비극이 발생한다. 결국 아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아이들은 모두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패트릭과 달리 고향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리에게는 지옥과 다름없기 때문에 그는 돌아올 수 없다. 형의 장례식을 치렀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정작 묘지에 형의 주검을 안치하지 못하게 되면서 리는 날이 풀리는 봄까지 고향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극 중 이야기는 이 기간 동안 주로 리와 패트릭 위주로 벌어지며, 리의 전 부인, 랜디가 두 차례 등장해서 과거의 소회를 밝히는 장면이 삽입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결국 패트릭은 우여곡절 끝에 형의 친구인 조지(C. J. 윌슨)에게 입양되고 리는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4. 보잘것없는 이야기들의 전략

<유 캔 카운트 온 미>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어떻게 보면 참으로 하찮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하고 소소한 로너건의 전략들이 하찮은 드라마를 어느 순간 탄탄하게 만든다. 데뷔작을 선보이고 난 16년 후, 로너건은 장소를 ‘스코츠빌’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옮기고 등장인물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서 예전의 ‘시시한 마술’을 재공연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번에는 지루해할 수도 있는 관객을 배려해 탁 트인 바닷가로 무대를 옮겨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비슷한 이야기를 변주하려는 로너건의 의도는 무엇일까?

원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보스턴 출신인 맷 데이먼(Matt Damon), 배우와 감독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존 카라진스키(John Krasinski)가 나눴던 스몰톡에서 시작되었고 데이먼이 감독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구체화 되면서 데이먼이 로너건에게 연출 의뢰를 했고 자신은 제작자로 나서면서 영화가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맷 데이먼이 로너건에게 감독직을 양보한 이유는 전작 <유 캔 카운트 온 미>를 보고 감동한 이유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두 영화가 가진 유사성 때문이었다. 두 영화는 모두 형제(서술상의 편의를 위해 남매도 문맥에 따라 형제라고 지칭한다) 관계를 다룬다.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등장인물인 누나, 새미를 형, 조지로 바꾸면 이야기는 거의 유사해진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형이 죽고 보스턴에서 잡부 생활을 하던 동생에게 아들 패트릭의 후견인을 부탁하는데, 이는 <유 캔 카운트 온 미>에 등장하는 남매에게 일어날 수 있는 10년 후의 미래적 사건을 가정하면 정확하게 일치한다. 두 영화에는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는 동생 그리고 아들을 혼자 키우는 누나 혹은 형이 있다. 그들의 부모는 사고로 죽거나 이미 사망한 상태다. 조카와 삼촌은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 못지않게 친밀한 관계다.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조카 루디에게 테리는 넓은 세상 그 자체의 의미로 다가온다. 루디는 삼촌을 통해 낚시에 입문하며,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성인 당구장에 들러 잠시나마 어른들의 세계를 맛본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조금 더 거친 방식이지만, 리는 격 없는 태도로 조카에게 낚시와 바다를 알려주고 직접 차를 운전해 과거 형수였던 엘리스에게 패트릭을 데려다준다. 두 영화에서 동생 역으로 등장하는 테리와 리가 좌충우돌하면서 버겁게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속마음이 누구보다 따듯하다는 사실을 형과 누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두 영화의 형과 누나는 자신들에게 닥친, 혹은 닥치게 될 불행 앞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You can count on me) 동생들에게 아이의 후견인을 맡기거나 혹은 맡기게 될 것이다. 쌍생아처럼 닮은 두 이야기는 동생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비슷한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로너건의 마술이 전작보다 진일보했다면 동생이 떠나야 하는 이유를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이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유 캔 카운트 온 미>에서 루디가 테리에게 “왜 떠나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누구나 철들면 떠나야 해.”라고 답한다. 테리의 대사는 그것이 진실이긴 하지만 ‘인생이란 그런 거야. (c’est la vie)’라는 말과 공명하는, 모든 어른이 내뱉는 하릴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하지만 16년의 격차를 두고 재공연되는 드라마에서 인물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시킬 수 없었던 로너건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강력한 동기를 인물들에게 제시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고향을 떠나려는 리와 고향에 남으려는 패트릭, 두 인물에게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유를 각각 제시할 수 있는가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와 조, 패트릭의 소중한 추억

같은 부모 사이에 태어난 형제는 이 세상에서 서로 의지 할 수 있는 마지막 타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 캔 카운트 온 미>에서 새미가 테리에게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만 부모에게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친구는 부모처럼 나를 걱정해줄 수 없다. 터놓고 말 할 수 있고 부모처럼 걱정해주는 그런 관계, 자신이 부재하면 자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세상에 남은 단 한 사람, 또 다른 나의 자아. 형제는 그런 관계이다. 로너건은 수평적인 핏줄 사이에만 가능한, 재공연되는 이야기를 통해 남겨진 자식과 어둠 속에 갇힌 동생을 동시에 구원하려 한다.

 

 

5. 머무를 수 없는 이유, 떠날 수 없는 이유

본격적으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들여다보자. 영화에는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실수로 자식 셋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 실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로너건은 현명하게도 리가 행한 실수의 결과를 모두 외화면으로 몰아넣었다. 이 작지만 위대한 로너건의 결단 혹은 연출로 인해 우리는 이 드라마를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만약 리가 벌인 치명적 실수의 결과를 보여주었다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범작에 머물렀을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삶이 빚어낸 비극 혹은 슬픔’에만 방점이 찍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아닌 ‘비극 이후의 삶’에 대해 조명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견뎌내는 중이다.

 

리는 삶을 견뎌내기 위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향을 등졌다. 그날의 비극 직후, 리의 모습이 외화면으로 사라져 우리는 볼 수 없지만, 그는 고향에서 제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선술집에서 자주 싸웠을 것이고 조그만 갈등에도 폭발해서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 랜디는 매일 저주에 찬 일갈을 퍼부으면서 그를 더욱 심연(深淵)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눈만 뜨면 집이 불타는 장면이 떠오르고 죽어가는 아이들의 비명이 환청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리는 삶을 견뎌내기 위해 보스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에 자신을 유폐시켰다. 아무리 형의 유언이지만 이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둘러싼 디제시스를 세계 전체인 것처럼 착각한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철부지처럼 보이는 패트릭은 이제 겨우 열여섯 살, 고등학교 1학년이고 고향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낀다. 삼촌이 반미치광이라고 욕하던 말썽꾸러기 엄마는 아버지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자 매몰차게 가족을 버리고 떠나 느닷없이 신심 가득한 크리스천과 재혼했다고 한다. 그 이후 한 번도 엄마를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삼촌은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고향을 떠나 보스턴으로 가자고 한다. 공부에 뜻은 없지만, 다방면에 취미를 가진 그는 아이스하키와 밴드부 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임한다. 자랑할 바는 못 되지만, 여자 친구도 둘씩이나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준,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이 있고 낚시와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보트도 있다. 무엇보다도 상심한 마음을 달래줄 바다가 있다. 지난 16년은 그가 산 시간 전체이며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가 발을 디뎠던 거의 유일한 장소이다. 그러므로 패트릭은 영국 제2의 도시 맨체스터보다 멋진 이곳을 굳이 떠날 이유가 없다.

 

 

6. 모두가 삶을 견디는 중

다르덴 형제(Dardenne Bros)의 <아들 Le Fils>(2002)에서 올리비에는 불량소년에게 아들을 잃고 아내와도 이혼한 채 혼자 지낸다. 그리고 그는 아들을 죽인 프란시스를 자신의 목공 훈련소에 들인다. 이미 다른 사람과 재혼해 임신까지 한 전처(모간 마린느)는 이 소식을 듣고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를 찾아온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다르덴 형제가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도 이 장면이 유사하게 반복된다. 형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하는 전처 랜디 역시 임신한 채 리를 찾아온다. 나는 아들(아이들)이 죽고 난 이후,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전처들을 맞이하는 대서양 건너편, 두 남자의 처지와 심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용서와 구원에 관한 다르덴의 ‘윤리학 수업’을 보는 내내 나는 불경스럽게도 올리비에의 ‘비참함’을 떠올렸다. 그런데 로너건이 설계한 동일한 장면에서 나는 의외로 랜디의 선택에 대해서 숙고했다. 아이 셋을 화마에 잃은 상황에서 그녀는 삶을 견뎌내기 위해 새로운 삶을 꾸려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아이들 대신 새로운 아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살기 위해 리를 떠났고 살기 위해 새로운 남편을 만났고 살기 위해 새로운 아이를 가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패트릭도 삶을 견뎌내는 중이다.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는 죽고 허물없이 지내던 삼촌은 자신만 남겨두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려 한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엄마는 또 다시 자신을 외면하고 만다. 이 소년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에게 아이스하키, 밴드부 그리고 여자 친구와의 시시덕거림이 없었다면 그도 삼촌처럼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이던 패트릭은 냉장고를 열다가 실수로 냉동 포장된 닭을 떨어뜨린다. 그 동안 잘 견뎌왔던 패트릭은 이 순간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다. 냉동된 닭을 보면서 아직도 영안실에 안치되어있을 아버지가 떠올랐기에 그는 도저히 버티지 못한 것이다. 패트릭은 철부지 소년 같은 언행 아래 슬픔을 그렇게 꾹꾹 눌러 담고 있었던 것이리라.

어쩌면 조의 전처였던 엘리스(그러천 몰)도 살기 위해서 현재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조와의 결혼 생활 내내 올바르지 못한 행실로 주변에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았다. 그러던 중에 조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기질적으로 역경을 이길 힘이 약했던 그녀는 시한폭탄처럼 닥칠 조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의 곁을 떠나, 전 남편과 전혀 다른 기질과 배경을 가진 제프리(매튜 브로데릭)를 만났을 것이다. 내적인 에너지로 불행을 대면하지 못하는 그녀는 자기를 방임하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을 떠나 독실한 크리스천인 제프리에게 자신을 의탁했을 것이다. 엘리스는 조가 사망하자 남아 있던 모정이 발동해 아들 패트릭을 찾는다. 하지만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았던 제프리와 아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내 뼈저리게 깨닫는다. 엘리스는 아들 패트릭에게 함께 할 수 없음을 알린다. 하지만 이때에도 아들에게 직접 말하는 대신 제프리가 보낸 메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어쩌면 회피도 삶을 견뎌내는 한 방법일 것이다.

 

 

7. 순진함과 영민함 사이를 오가는 로너건

로너건의 드라마투르기의 성공 요인은 등장인물들이 삶을 견뎌내기 위한 선택의 이유를 대부분 외화면에 두었다는 점이다. 랜디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리를 만난다. 그 사이 시간이 지나 임신했던 아이는 태어나 유모차에 누워있다. 이 기묘한 만남에서 랜디는 모질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서 "내가 그런 말을 당신에게 해선 안 됐었는데"라고 말한다. 로너건은 랜디가 했다는 ‘그런 말’ 역시 외화면으로 남겨두면서 우리에게 그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랜디의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왜냐면 우리는 랜디의 ‘그런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런 말’의 결과를 충분히 보았기 때문이다. 로너건은 관객이 예상할 수 있거나 상상 속에 두어야 마땅한 어떤 행동과 감정을 외화면으로 돌리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판단력을 발휘하여 드라마가 파토스에 이르지 않도록 조율한다. 파토스는 때로는 너무 위력적이어서 관객을 판단 정지에 이르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슬픔과 비애의 장면화’가 아닌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후일담’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미적 거리를 삭제할 수 있는 파토스를 배제한 것은 지극히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로너건의 미학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 이 영화를 선뜻 명작으로 손꼽는데 주저하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너무 순진하거나 아니면 순진함의 외피 속에 그것을 가장한 영민함을 감추고 있다는 의심 때문일 것이다.

 

로너건의 이중 전략을 살펴보자. 실수로 인한 사고 이후, 리는 동네에서 소문난 망나니가 되었을 것이고 그를 향한 나쁜 소문은 증폭되어 평판이 몹시 나빠졌을 것이다. 형을 장사지낼 수 있는 봄이 되기까지 고향에서 잠시나마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리를 사람들은 박대한다. 리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장면을 로너건은 세 개의 쇼트를 몽타주함으로써 강조해서 표현한다. 한 장면만으로 충분한 설정을 굳이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연출한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를 보면서 드는 이런 종류의 과도함에 대한 의문은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리는 요리 도중 깜빡 잠이 드는데, 꿈속에서 죽은 아이들이 나타나서 “아빠, 우리들이 타고 있는 게 안 보여요?”라고 묻는다. 이 말에 화들짝 잠이 깬 리가 주변을 돌아보자 매캐한 연기가 가득하다. 지금까지 로너건은 엄청난 사건 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대부분 함구해왔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랜디의 대사에서도 ‘그런 말’이라고 에둘러 표현하면서 말의 내용을 외화면으로 밀어 넣기까지 했다. 그랬던 연출 방식에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준 이유는 무엇일까? 외화면에 잠들어 있어야 할 장면들을 굳이 ‘뻔한’ 몽타주로 나열하거나 꿈으로 등장시킨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일관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쉴 새 없이 삽입되는 플래시백은 리의 과거를 설명하는 데는 용이하나 너무 빈번하게 등장하다보니 영화적 리듬을 해치는 경우도 발생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더욱 나를 헛갈리게 했던 것은 알비노니(T. Albinoni)의 아다지오(Adagio)를 메인테마로 사용한 전략이었다. 심지어 비극의 요체와 같은 이 음악은 여러 차례 변주되어 화면 속에 삽입된다. 전작 <유 캔 카운트 온 미>에서도 로너건은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Air on the G String)를 지속적으로 주요 장면마다 반복한다. 이 두 곡은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클래식 스코어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왕가위(王家衛)나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와 같은 창조적 사운드트랙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거의 영화학교 워크숍 수준의 선곡이라고 할 수 있다. 코폴라를 그렇게 숭앙했다면, 그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바그너(Richard Wagner)의 ‘발키리(Die Walkure)’를 삽입한 선곡 방식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근래에 본 영화 중 인물의 감정과 가장 일치되는 선곡의 사례, 그것도 가장 잘 알려진 클래식 스코어를 통해 달성한 아마추어적 수준의 선곡 사례를 나는 16년 시차를 둔 로너건의 두 영화에서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참으로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나는 그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영민한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인물들의 중요한 행동의 동기와 그 결과를 외화면으로 보내버린 로너건, 그러나 짐작건대 그는 처음부터 영화를 ‘죽은 시간(temps mort)’과 ‘대위법(對位法)’으로 채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관객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적당한 미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감상할 수 있는 영화를 원했다. 그래서 로너건은 파토스를 삭제하면서 아름다운 거리(beautiful distance)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순간 작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로너건이 빈 공백과 외화면으로 보낸 것은 비극적 사건 혹은 ‘그런 말’이지 인물의 감정까지 보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편집하면서 외화면 전략이 사건과 함께 인물이 가져야 마땅한 감정의 일부도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래서 만회할 대책을 그 유명한 클래식 스코어로 채운 것이 아닐까? 이처럼 흔들리는 로너건의 드라마투르기 혹은 연출법을 두고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8. 로너건, 그는 영민했다.

리와 패트릭은 각자가 가진 너무도 합당한, 떠나야 하는 이유와 남아야 하는 이유로 인해 보스턴에 같이 갈 수도 없고 멘체스터 바이 더 씨에 남아서 함께 살 수도 없다. 결국 리는 형의 친구 조지에게 패트릭을 입양하도록 조치한다. “2년 동안 동안의 입양 기간이 끝나면 그때는 네 자유”라고 말하는 리에게 패드릭은 “왜 떠나야 하느냐”고 묻는다. 리는 아주 간단하게 다음처럼 답한다.

I can’t beat it, I can’t beat it, I’m sorry / 못 버티겠어. 버틸 수가 없어. 미안해

 

그가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이유를 어찌 말로 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못 버티는 이유를 이미 본 관객에게 이 대사 이후는 사족이겠지만 패트릭은 리의 심리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를 위해서 혹은 파토스를 영접하고 싶은 몇몇 관객을 위해 로너건은 일장 연설을 준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철부지 어린애처럼 굴었던, 패트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포옹한다. 어린 패트릭의 성숙함 앞에 외화면에 숨겨 놓은 대사를 반복하라고 채근하는 관객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마침내 봄이 되자, 날씨가 풀려 형을 장사 지낼 수 있는 날이 찾아온다. 사람들이 묵념하는 동안 묘지 주변에 새로 태어난 랜디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비극적 아이러니를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묘지에서 걸어 나와 바다를 볼 수 있는 언덕길에 오른다. 패트릭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동안 리는 길가에서 주운 공을 튕기고 있다. 두 사람은 공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리의 손에서 공이 빠져나가자 패트릭이 공을 주우려 한다. 그러자 리는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년의 천진함이 발동한 패트릭은 공을 주워서 리가 서있는 방향으로 토스한다. 심연에 갇혀 자신을 유폐했던 리는 그동안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내버려뒀다(just let it go). 하지만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공을 다시 주워서 자신에게 토스하는 패트릭의 놀이에 시나브로 동참하면서 리는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비로소 형의 유언이 완성된 셈이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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