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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2022)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2022)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2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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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란 삼부작의 『이니시어의 밴시』의 각색영화로서 <이니셰린의 밴시>

베니스국제영화제,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를 비롯하여 전 세계 유명한 시상식과 영화제에서 120개가 넘는 상을 수상하고 330개가 넘는 후보로 지명 “절대 놓칠 수 없는 걸작”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 2022)는 마틴 맥도나의 4번째 장편영화이다. 국내 개봉 시기는 8개 부문 9개 후보로 이름을 올렸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 후보라는 예상과는 달리 한 부문도 수상을 하지 못하는 아쉬운 결과가 발표된 직후인 지난 3월이었다.

이 영화는 맥도나의 최신작이지만, 극작가로서 그의 데뷔작인 코네마라 3부작과 함께 연이어 발표한 두 번째 삼부작, 아란 3부작 가운데,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아 후일 다시 쓰겠다며 출판하지 않았던 『이니시어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er)에 그 근원을 둔 작품으로 보인다. 물론 이 영화가 실제 섬 이니시어 대신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하고,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니시어의 밴시』와 이 영화와의 상호텍스트성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후일 그가 다시 쓰기로 한 아란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 대신 미완성 또는 불만스러웠던 원작을 각색한 영화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제목의 유사성 말고도 다분하다.

 

2. 맥도나의 아름다운 아일랜드 영화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연극계에 입문한 맥도나는 자신의 극작 동기가 연극계보다 영화계 진출을 위한 것임을 주저하지 않고 밝혔다. 사실 “싱(J. M. Synge)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합작”의 극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듯이, 그의 극작은 시작부터 영화와의 긴밀한 연관성, 즉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최근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란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의 각색영화로서 그로 하여금 극작을 하게 만든 영화와의 상호매체성과 아일랜드 서부, 골웨이에서 발견한 아일랜드성에 대한 다시 보기를 시도한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아일랜드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맥도나에게 부모님의 고향 골웨이는 가족과 친척들과 함께 보내는 여름 휴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6세 때 부모님이 다시 고향으로 이주한 시점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코네마라 3부작과 아란 3부작으로 불리는 초기 작품들이 보여주듯이, 골웨이의 체류를 통해 자연스레 익힌 서부 아일랜드식 영어로 거기서 들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골웨이는 싱의 연극에서 따온 파편들을 타란티노 영화의 포스트모던 스타일로 재구성하여 창조한 사실성이 결여된 상상의 아일랜드라는 지적을 한다.그의 아일랜드 연극의 한계점으로 지적하듯이, 아란 3부작은 모두 아란 제도의 실제 섬, 이니시모, 이니시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니셰린의 밴시>의 이니셰린은 로케이션 장소로 선정된 아란의 이니시모와 애칠을 오가며 촬영하여 창조한 가상의 섬이다. 사실 이 영화는 맥도나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1923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특정화하고 있지만, 아일랜드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의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본토에서 수시로 들리는 대포소리로 내전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줄 뿐, 어느 쪽이 우세인지 전세가 어떤지는 섬 주민들의 관심 밖 뉴스이다. 맥도나의 다른 영화들처럼 이 영화 또한 연극 무대처럼 이니셰린이라는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다. 장소 뿐 아니라 시간과 사건 또한 2023년 4월 몇일간의 시간과 내란이라는 큰 전쟁이 아니라 두 남자,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단 글리슨) 사이의 작은 전쟁을 단일 사건으로 한 비극적 연극성이 두드러진 영화이다. 두 남자의 우정과 절교, 고독과 비극적 슬픔의 사건과 이 사건을 둘러싼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과 이니셰린에서 파우릭 다음으로 바보 취급을 당하는 도미닉(셰익스피어의 바보광대(Fool)을 연상시키는)의 반응과 변화의 스토링텔링을, 이 4명의 인물들에 캐스팅된 배우들의 열연(“도합 60개 이상 연기상을 휩쓴 미친 앙상블”)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는 맥도나의 기존 영화들처럼 다크 코미디(dark comedy), 희비극(tragic comedy) 장르로 분류된다. “tragic comedy”의 한국어 번역으로 희비극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 영화는 코미디 보다는 비극에 방점이 찍힌 “희비극”으로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아란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두 남자 사이의 코믹하지만 진지한 사건을 희비극으로 전개하는 이 영화는 “테리빌리타(terribilità, 공포감마저 드는 극한의 아름다움)”의 아일랜드성을 탄생시킨 가장 아름다운 아일랜드 영화이다.

 

3. 서부 아일랜드와 순수한 아일랜드성(Irishness)

 

서부 아일랜드, 특히 골웨이의 아란 제도는 애비 극장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을 이끈 예이츠(W. B. Yeats)와 싱과 같은 1세대 극작가들에게 “순수한 아일랜드성의 마지막 보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맥도나 또한 아란을 배경으로 창조한 이니셰린이 아일랜드의 극한의 아름다움(‘아이리시 뷰티’)을 탄생시킬 것 같은 가상의 “신화적 장소”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예이츠와 같은 1세대 극작가들이 되찾으려는 순수한 아일랜드성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다.

서부 아일랜드는 식민지 상황에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1세대 극작가들은 고립되고 근대화되지 않은 이 농촌 지역을 영국의 식민 통치로 오염되지 않은, 즉 영국화 되지 않은 순수한 아일랜드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여겼다. 반면에 식민통치자 영국인들은 이 서부를 식민 통치의 손길이 가장 미치지 못한 무질서하고 난폭한 생활을 영위하는 위험한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같은 1세대라도 예이츠와는 달리 싱은 애비 극장이 고취시키고자 한 순수한 아일랜드성을 고양된 삶을 살고 있는 아란 섬 주민들이 간직하고 있다는 환상을 부추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무질서하고 난폭한 삶에서 좌절과 분노, 그리고 억압에 저항하는 활력과 생기를 찾으려고 했다. 이 영화는 싱과 예이츠와 같은 1세대 극작가들의 전형적 소재 즉 서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아일랜드 신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그 세대가 속한 사회의 특정 단면을 들여다보는 3세대의 대표적 극작가라는 평가를 맥도나에게 가져다준 초기 삼부작들 가운데 마지막 작품을 각색한 영화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1세대가 속한 시대의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다루는 대 사건이 아니라 아일랜드 사회의 특정 단면을 보여주는 두 남자의 우정과 절교가 일으킨 극단으로 치달은 작은 비극적 사건을 다룬다. 비록 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은 사건을 주목하지만 이 영화는 순수한 아일랜드성에 대한 싱의 비판적 입지보다는 1916년 부활절 봉기라는 대 사건이 탄생시킨 “무서운 아름다움”(terrible beauty)으로 포착한 예이츠의 아일랜드성에 대하여 적극적인 수용 입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싱과의 연결성이 강조된 맥도나의 기존 연극과 영화와는 차별성을 지닌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4. 커다란 사건을 통해 탄생한 “무서운 아름다움”

예이츠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해가 바로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내란이 막바지에 이른 1923년이다. 그의 시 <부활절, 1916>(1916)가 찬양한 무서운 아름다움의 탄생(“A terrible beauty is born”)을 가져온 아일랜드 독립의 실제적인 동력이 된 더블린의 부활절 봉기(1916년 4월 24일-29일)가 일어난 것도 이 영화의 사건이 전개되는 4월이다. 파우릭이 작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일을 확인하며 보는 벽에 걸린 달력은 이러한 연결성을 시사한다.

예이츠는 무장봉기로 희생을 당한 민족주의 운동가들의 행동을 영웅적인 것으로 찬양하면서도, 부조리하고도 희극적인 아일랜드의 현 상황에서 성급하게 과격한 행동을 한 무언가 아쉽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한다. 지나친 애국심에 시대적 흐름과 변화에 발맞추는 대신 섣부른 행동으로 맹목적인 희생을 당한 것으로 안타까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블린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갑자기 변하여 영웅적인 행동을 하고, 결국엔 비극적으로 죽었기에 1916 부활절 봉기는 무서운 아름다움의 탄생, 즉 아일랜드성을 구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맥도나의 영화 또한 이니셰린의 평범한 두 남자의 내분을 계기로 테리빌리타의 아이리시 뷰티의 탄생을 예고한다.

사실 파우릭과 콜름의 작은 싸움과 내전 사이의 연결성은 오히려 그 사이의 단절과 동시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이 영화가 전경화시켜 다루고 있는 작은 사건은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바깥 세계와 단절된 이니셰린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여기서는 이 사건이 본토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보다 더 중요한 의미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가끔씩 본토에서 들리는 공허한 대포소리는 내전의 현장에서 사정거리를 벗어나 있는 이니셰린 섬의 단절과 고립을 상기시키는 영화의 음향효과로 들릴 뿐이다. 본토의 내전을 상기시키는 대포소리는 또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파우릭과 콜름 사이의 내전의 진행 과정에 개입된 등장인물들, 특히 파우릭과 시오반이 겪는 심리적 동요를 드러내는 청각 이미지로도 사용된다.

 

5. 콜름과 파우릭의 작은 사건

 

파우릭과 콜름은 별일 없으면 오후 2시쯤 선술집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마시며 늘 함께 시간을 보내왔다. 그러나 콜름이 예고 없이 나타나지 않자 해변가에 있는 그의 외딴 집으로 찾아온 파우릭이 창을 통해 생소하기 짝이 없는 콜름을 보는 장면으로 이들 사이의 심상치 않은 사태를 예고한다. 창밖 파우릭의 관점에서 본 콜름의 첫 등장 장면은 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마치 그림 속 방안 의자에 앉아 있는 고흐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Francis Bacon

특히 후반부에 콜름이 파우릭에게 경고한대로 손가락을 하나 자르고 나서 첫 등장 장면과 똑 같은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고 손에서 흐르는 피를 그의 개가 핥고 있는 장면은 아일랜드계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이 그린 초상화의 인물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콜름의 커다란 체구와 피가 흐르는 손가락이 잘려진 손은 베이컨이 그린 인물들의 몸에 내재된 정동의 폭력을 담고 있는 듯하다.

 

                       Homage to Van Gogh, Francis Bacon

고갱과의 절교 후 귀를 자르고 그린 고흐의 자화상을 베이컨이 폭력의 붓 터치로 재해석해서 그린 <반 고흐에게 오마주>가 포착한 고흐의 실존적 두려움과 고독, 우울과 좌절을 방안에 홀로 앉아 있는 콜름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절망적 멜랑콜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적극적 멜랑콜리”를 결심했다고 말하듯이, 콜름 또한 그의 단호한 결단을 파우릭에게 통고한 것이다. 그는 “막연히 죽기만 기다리면서 혼자만 만족한 삶”을 살지 않고, 사색하고 자신의 음악을 작곡하는데 몰두하기 위해 파우릭과 절교를 하겠다고 선언을 한다. “무의미한 수다”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콜름에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즐겁고 평범한 수다”로 시간을 보낸 것이라고 반박하는 파우릭은 콜름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파우릭은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시오반은 자진해서 콜름을 만나고, 파우릭은 신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오빠처럼 다정한 성품에 그러나 그와는 달리 지성과 유머를 겸비한 시오반은 콜름에게 절교의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콜름은 이니셰린이라는 섬에서 살면서 그녀도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유도한다. 파우릭과의 절교 이유가 동성애 감정 때문이냐고 묻는 신부에게 그 질문을 신부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콜름은 격분하는 신부의 반응을 유도하여 앞에 깔아 놓은 도미닉의 변태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경찰관 피다(게리 라이든)와의 그의 은근한 스킨십을 복선으로 해서 그의 동성애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이와 같이 콜름과 파우릭 사이의 절교 사건은 이니셰린 사람들의 개입과 반응을 통해 그들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콜름은 절교를 선언했지만 언제나 파우릭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배려하고 그를 도와준다. 경찰관 피다에게 맞고 쓰러진 파우릭을 일으켜 세워 마차를 태워 마리아상이 서있는 갈림길에 올 때까지 내내 오열하고 있는 파우릭를 애써 모른 채 하다 고삐를 그의 손에 쥐어 주고 마차에서 내리고 갈림길에서 각자 다른 길로 간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다. 또한 아일랜드 내전의 정치적 상황에 필적하는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같이 싸웠지만 독립파와 현실타협파 사이의 분열로 내전을 치루고 있는 상황은 공권력을 남용하는 폭력적인 경찰관을 혐오하는 데는 서로 연대하지만 결국 갈림길에서 갈라서는 콜름과 파우릭의 처한 상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6. 이니셰린 주민들의 코러스로서의 역할

 

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선술집은 이니셰린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주인 존조(팻 쇼트)와 단골 주민들, 전통음악 연주인들로 구성된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 역할을 한다. 코러스 구성원은 등장인물들로 파우릭과 콜름의 액션에 개입하기도 하고 논평도 하며, 때론 의도하는 관객의 반응을 유도하는 이상적 관객으로서도 기능한다. 또한 코러스로서 이들은 대사 뿐 아니라 아일랜드 노래와 콜름이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통해 이 영화가 구현하고자 하는 아일랜드성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여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콜름이 파우릭에게 신에게 말을 걸 때마다 양털 깎는 가위로 피들을 켜는 왼손의 손가락부터 한 개씩 잘라서 그에게 보내겠다는 최후통첩을 한 곳도 선술집이다. 존조와 손님 게리(존 케니)는 콜름의 최후통첩에 어리둥절해하는 파우릭에게, 콜름은 “생각하는 사람”인 반면에 파우릭은 “다정한 사람”으로 늘 좀 이상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두 사람의 상반된 성향에 대하여 평을 한다. 파우릭이 그말이 지금까지는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기가 들은 말 중 가장 최악으로 들린다고 하자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라며, 그들은 파우릭 편이라고 한다. 코러스의 이러한 대사는 콜름과 파우릭의 내전에 대한 이니셰린 공동체의 입장을 요약해준다. 콜름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끔찍하고도 강력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파우릭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밝힌다. 그러나 결국 그가 잘라 버린 손가락을 먹다가 파우릭이 가족처럼 사랑하는 당나귀 제니가 목이 막혀 죽게 됨으로써 그는 파우릭의 마음을 크게 다치게 만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제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파우릭 또한 콜름에게 그의 집을 불태우겠다는 최후통첩을 한 곳도 선술집이다. 그리고 이에 앞서 제니의 죽음을 비아냥거린 경찰관 피다를 주민들 앞에서 콜름이 흠씬 때려준 것도 선술집에서 이다.

 

밴드가 공연을 하는 앞자리에 여자들과 함께 앉아 있고 싶지만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뒷전에 파우릭과 함께 앉아 있는 도미닉은 마을의 바보광대 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나 그는 셰익스피어 연극에 등장하는 바보광대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의 사건 진행을 예견할 수 있는 비판의식과 분별력을 가진 현명함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는 바보광대 노릇을 하지만, 이니셰린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이 영화에서 죽음을 예고하는 아일랜드 전설 속의 여성 혼령 밴시(Banshee)를 대신하여 늙은 맥코믹 부인(쉴라 플리톤)이 예언한 4월이 가기 전에 이니셰린에 다가올 두 죽음 중 하나의 죽음을 선택한다. 이 영화의 제목 “이니셰린의 밴시”는 영화 속에서 콜름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작곡한 아일랜드 음악의 제목이다. 밴시가 이니셰린에는 없다는 파우릭의 말에, 아마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더 이상 죽음을 예언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지 않고 뒤로 물러나 앉아 재미있어하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라고 응답한다. 바로 이러한 밴시 역할을 검은 옷을 입고 선술집, 상점, 해안가, 섬 어디에나 출몰하여 지켜보고 있는 맥코믹 부인이 하고 있다.

 

7. 테리빌리타의 아이리시 뷰티의 탄생

중반부에 콜름이 그의 손가락을 자르고 나서, 마치 고흐가 귀를 자르고 그림에 몰두했던 것처럼, 음악 작곡에 탄력을 가하여 몰입하는 가운데, 파우릭은 우울에 빠진다. 즉 콜름은 적극적 멜랑콜리를 구가하고 있다면, 파우릭은 절망적 멜랑콜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파우릭의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 편집한 일련의 몽타쥬들은 이니셰린의 일출, 일몰, 들판 등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의 풍광과 함께 시오반의 이니셰린을 떠나는 준비, 우울한 선술집 분위기 등을 담고 있다.

콜름에게 음악이 파우릭에게는 다정이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이다. 왼손 손가락을 다 잘라 피를 흘리면서, 남은 한 손으로 피들을 켜는 듯한 제스처로 마치 지휘를 하듯 자신이 작곡한 음악에 만족하며 기뻐한다. 그로테스크를 넘어서 야만성이 불러일으키는 테리빌리타에 도전하는 콜름의 음악은 파우릭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시오반도 떠나고, 사랑한 제니도 죽고, 도미닉도 죽었다. 제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콜름의 집을 태워버린 파우릭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다정한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엔딩은 두 사람이 바다 넘어 고요한 본토를 바라보며, 짧은 대화를 나누고, 불탄 집 옆에 서서 맥코믹 부인이 그 광경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파우릭이 그 자리를 떠나면서 점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가는 것으로 끝난다. “총소리가 요 며칠 안 들리는 걸 보니 이젠 끝을 낼 모양인가 보네”라는 콜름의 말에 “그렇지만 분명 곧 다시 시작할껄요. 결코 벗어날 길이 없는 것들이 있지 않나요?”라고 파우릭이 응대한다. 이와 같이 엔딩에서 서로 멀어져 가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본토에서 일어난 내전이 가져온 아일랜드의 분열을 우회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엔딩은 이러한 정치적 현실만을 직시하고 있지 않다. 콜름이 바다를 향해 휘파람으로 분 그의 음악 “이니셰린의 밴시”의 몇 소절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사라듯이,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또한 현실적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순수한 아일랜드성”을 아이리시 뷰티로 탄생시킨 가상의 “신화적 장소”로 남을 이니셰린의 바다를 남겨둔 채 끝난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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