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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의 아이들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의 아이들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04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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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2021),에실 보그트

(...)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이성복

 

[출처] 네이버 영화
사진제공=(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에실 보그트의이노센트(2021)는 영리하고도 잔인한 호러다. 이 영화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강렬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서늘한 공포로 체험하게끔 만드는 렌즈가 된다. 물론 이 영화의 상상력이 낯설지는 않다. 아이는 선악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존재인데다가 도저히 속내를 알기가 어려운 데에서 오는 공포는 문학과 영화 등의 오랜 모티프다. 영화에서는 미하일 하네케, 문학에서는 이언 매큐언과 이언 뱅크스 등의 작가가 그 모티프를 극한까지 실험한 적 있다. 아이의 극단적인 악행으로 인간 본성과 도덕 사이의 충돌을 드러내면서 도덕이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식이다.이노센트(2021)도 앞서 이야기한 주제의식을 따라가는 듯하다. 오프닝부터 이다(라켈 레노라 플뢰툼)가 자폐스펙트럼 환자인 언니 안나의 신발에 깨진 유리조각을 숨겨두는 충격적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말더듬이만 하는 안나는 고통을 드러낼 수 없다. 이다는 안나가 고통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이다는 안나가 관심을 독차지한 것에 뿔이 났을 뿐이다. 이 설정만 하더라도이노센트는 기존의 상상력을 답습하는 작품이었다. 또한 이다와 안나와 어울려 노는 벤자민과 아이샤가 초능력을 학습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는 설정 또한 할리우드 영어덜트 서사와 기시감이 있다. 다만 이 영화는 다른 곳을 겨냥한다.

이노센트는 이다의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을 담는다. 그녀가 도덕과 공감, 양심 등을 알기까지의 과정을 호러 문법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부모님을 따라서 새 아파트로 이사를 온 이다는 텅 빈 동네를 낯설어한다. 바캉스 기간이라 아파트에 사는 대부분 아이가 휴가를 간 것이다. 휴가를 못 떠난 빈민층 아이만 아파트 단지에 남아있다. 이다는 안나와 동네 놀이터에서 두 아이를 만난다. 한 명은 벤자민으로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아랍계 아이다. 또 한 명은 아이샤이다. 벤자민은 우연히 만난 이다에게 자신이 초능력자라는 비밀을 밝힌다. 그의 초능력은 물체와 타인의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처음만 하더라도 겨우 돌 하나를 움직일 만큼 미미한 수준이었다. 벤자민은 이다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재해 있고, 고양이를 서슴지 않고 죽이기도 한다. 이다는 벤자민을 낯설어하면서도 어울린다. 이다는 동네 친구 아이샤, 자신의 언니 안나에게도 서로의 마음을 읽는 텔레파시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이 셋은 초능력으로 멀리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비밀을 공유한다. 어느날 벤자민이 엄마를 죽이고 그다음 동네 사람을 조종해 살인을 벌이기 시작한다. 나머지 셋은 그를 막으려 애쓴다. 벤자민의 초능력은 더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상태다.

이노센트를 섬뜩한 영화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연출이다. 영화의 두드러지는 연출 중 하나는 화면비이다. 2.35:1 시네마스코프라는 데에서는 보통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감독은 카메라의 중심을 아래로 내려서 아이의 신체를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다. 반면 어른의 신체가 한눈에 포착되는 일은 드물다. 언제나 신체 일부만 드러나고, 상체나 하체가 프레임 바깥에 머물러 있다. 프레임의 폐쇄적인 느낌은 여기서 온다. 이미 어른이 된 시점에서 이 시점은 우리가 평소에 보던 세계가 잘린 듯한 느낌을 준다. 아래는 탁 트여 있되, 위는 막혀 있어서다. 아이의 시점에 계속 머무르려고 애쓰는 연출은 일상을 낯설게 보게끔 만들며, 어른과 아이 사이의 단절을 드러낸다. 어른의 눈높이와 아이의 눈높이가 다르기에 어른은 아이가 하는 일을 무심코 지나가기 마련이다. 영화에서는 장난감과 손짓 등 우리가 평소 못 보던 것이 프레임에 포착되고, 이따금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안나가 냄비 뚜껑으로 제 초능력을 기르는 순간은 특히나 그러하다. 그저 아이의 이상한 행동으로만 보이는 것이 영화에서는 마법적인 초능력으로 드러난다. 영화를 본 다음에 우리의 일상이 낯설게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아이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끔 유도하고 있으면서도 제 3자의 시선으로 아이에 다가가게끔 한다. 아이를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그 단편으로만 드러낼 때는 더욱이 그러하다.

한편 이 화면비는 영화에서 어른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배제하도록 한다. 아이의 눈높이에서는 어른의 표정을 곧바로 볼 수 없다. 한 번 올려다보아야만 어른의 감정이 드러나서다. 이는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른도 허리를 숙인다든지 해야만 아이의 표정을 볼 수가 있다. 감독은 화면비를 통해서 어른이 서사에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차단한다. 감독이 밝히듯이 도덕은 어른에게서 학습되지만, 도덕이 피부로 다가오는 것은 아이의 자각으로 인해서다. 이는 이다가 벤자민을 막으러 떠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이다는 문득 어머니에게 안긴다. 이때 어머니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고, 그저 안고 있는 이다의 모습만 드러나 있다. 어른의 반응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아이가 주체적인 선택을 하게끔 돕는 셈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러한 폐쇄적인 화면을 연결하는 방법에 있다. 이 영화는 아이의 시점이 아니라면 미스터리나 음모론에 더욱 가깝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미스터리로 가득한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제안한다. 우리 사회는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영화의 중심 사건은 초능력에 의한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발생하는 여러 일을 모아둔 것에 불과하다. 최근의 묻지마 칼부림이 연달아 생기듯, 영화에서도 칼부림이 연달아 생긴다. 뮤지션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14살 소년을 죽인 사건도, 아이샤의 어머니가 정신분열을 경험하고 아이샤를 죽인 사건도, 여러 환경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또한 운동 중 벤자민의 초능력으로 인해서 다리가 뒤틀린 아이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볼 때 초능력으로 생긴 일은 없다. 그저 부조리한 일일 뿐이다. 신이 있는 시대는 이 모든 것을 신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여러 비극적인 사건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과가 부재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모든 일은 혼란을 안기기만 한다. 인지적 지도그리기는 그 모든 사건을 이어서 하나의 지도로 구성하는 작업이다. 이 영화는 어른에게서 소외당한 아이샤와 안나, 벤자민은 이 사회의 병폐를 그대로 마주한다. 휴가를 못 간 아파트야말로 빈곤층 혹은 소외 계층이 집합된 곳이어서다. 영화는 벤자민과 아이샤, 안나를 오가는 몽타주를 통해서 초능력을 시각화면서도 세 아이의 가정을 드러내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는다. 왜 벤자민이 어머니를 죽여야 했고, 아이샤가 어머니로부터 살해당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감독은 세 아이를 통해서 소외된 계층 사이에서의 사회적 비극을 넌지시 시각화하는 셈이다.

 

[출처] 영화 스틸컷
사진제공=(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 영화가 영리한 호러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무차별 테러의 시대를 조망하면서도 벤자민의 서사를 통해서 그다음 세대에도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내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낯선 타자가 아니라, 제대로 마주한 일상이지 않을까. 이 영화는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의 공포를 이해하려고 하고 거기에 사는 아이의 고통을 마주하기에 훌륭하다. 그러나 감독은 미래를 비관하지 않는다. 안나가 마지막으로 벤자민을 처단할 때 초능력을 지닌 모든 아이가 연대해서 그를 몰아내게끔 한다. 또한 이다가 스스로의 잔인함을 알아차리고 도덕과 양심, 공감을 배움으로 안나를 이해해서다. 어른은 흔히들 신세대를 타자화하고 MZ 등 세대론으로 그들의 도덕을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이 영화는 아이에게도 아이만의 도덕이 있고, 모든 순간이 그 도덕을 학습하는 과정이라고 옹호한다. 이는 어른이 아이를 관리하고 보호한다는 개념인 아동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있는 그대로의 주체로 인정하는 과정이다.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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