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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연호의 문화톡톡] 21세기 한국대안영상예술 궤적 2: 수행성과 내부-작용
[김장연호의 문화톡톡] 21세기 한국대안영상예술 궤적 2: 수행성과 내부-작용
  • 김장연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18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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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인 것이다"

'젠더 트러블'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책에서 등장한 용어다. 19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디지털 캠코더로 여성주의 작품들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박남옥 감독이 <미망인>(1955)으로 한국 최초 여성감독이 된 것처럼, 한국영화판에서 여성이 시선의 주체가 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1970년대 <카이두>는 1974년 3월 제1회 실험영화 페스티벌을 개최하여 시선의 담지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카이두> 설립자였던 한옥희 감독은 <구멍>(1974), <밧줄>(1974), <세 개의 거울>(1975), <2분 40초>(1975), <색동>(1976) 등을 제작하였다. 남성 영역이었던 영화 장에서 여성의 영화는 '시각의 트러블'에 첫 불을 지피는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즉, 여성의 시선으로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명제와 함께 그 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영화/영상/미디어 콘텐츠들, 문화예술들이 성인, 남성, 이성애, 비장애인, 한국인의 시선에서 생산된 한정된 결과물임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트러블>에서  '젠더 수행성' 개념을 통해 반복적인 수행에 의해 관습화된 여성성, 남성성이 있을 뿐이라 밝힌다. 그리고 섹스(sex)도 젠더(gender)라 말한다.  보부아르의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이 되는 것이다'에서 섹스로서의 여성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선언은 여성계에서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한참 논쟁 중이다. 특히 성인, 남성, 이성애, 비장애인, 한국인의 시선으로 제작된 섹슈얼리티에 관한 한국영화/영상/미디어는 여성의 신체를 왜곡하거나 남성에 의한 환타지 섹슈얼리티로만 재현되었기에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부장체제에서 금기시화된 섹슈얼리티는 가시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시화하더라도 쉽게 가부장체제의 그물망에 걸려 생각지 못한 장면이 '성적 대상화'로 전락되거나, 여전히 남성과 여성의 신체로 구분된 법적 체계에 따라 획일화된 이성애 중심의 섹슈얼리티 하에서 재단이 되곤 한다.

교차성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신유물론 페미니즘은 이렇게 '여성'과 더불어 차별적 위치에 놓인 다양한 정체성으로 인해 가시화될 수 없는 다양한 여성의 몸을 본격적으로 검토해 나간다. 섹스와 젠더에 관한 작품들은 가부장 이성애중심사회에서 금기시화되었던 섹슈얼리티와 함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던진 작품을 주로 선보여왔다.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네마프)은 이러한 작품들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영상예술축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안영상예술이란 "새로운 매체에 등장하는 대안적인 영상언어로 표준체계를 다중의식의 궤적으로 변주해놓는 작품"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중의식"은 패트리샤 힐 콜린스가 논의한 개념으로 교차하면서 상호 의존적인 억압의 중심에 있는 개인의 위치에서 나아가 어떤 지배 체계가 다른 지배 체계보다 더 중요하거나 근본적인 체계로 인식하는 경향을 수정하는 것이다. 즉, 젠더, 인종, 빈부, 종교, 학력, 지역, 정적 지향, 계급 등 정체성들이 각 개인의 위치,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퀸의 뜨개질'(조한나, 2023) 사진제공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퀸의 뜨개질'(조한나, 2023) 사진제공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은 매년 새로운 대안영상예술 작품들 약 100여 편이 소개되고있다. 올해 최우수 한국 작품상을 받았던 조한나 작가의 <퀸의 뜨개질>은 뜨개질을 하면서 자신의 여/성의 정체성을 탐색해가는 작품이다. 지금-여기서 하는 행동들이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공동체의 생활양식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하게된 것인지 '뜨개질'이라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보여주면서도 개인의 수행성이 얼마나 다채롭게 변주할 수 있는 창조적 신체인지 표현한다. 또한 조금만 다른 행위를 해도 '단일민족', 또는 '공동체'의 체계에서 얼마나 쉽게 낙인화하고 주변화하고 있는지 개인의 사례를 통해 살피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의 신체는 더 이상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인 것'으로 논의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재현이 권력체계의 시각장에서 이루어진 역사라면 젠더를 수행하는 행위자의 행위, 수행, 과정 뒤에 그 어떤 존재도 없다는 것이다. <퀸의 뜨개질>에서 주인공인 '나'는 내가 해왔던 반복적인 행위의 수행과정이 타자로서의 위치를 수긍하게 하는 여성성으로 젠더화하는 양식이었음을 인식하면서 체현된 양식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작품은 그렇게 변주된 신체를 화면에 채우며 우리가 감추거나 은폐해왔던 다양한 신체, 섹슈얼리티, 생활양식 등을 가시화한다. 

 

'바람에 흩어지는 상처All My Scars Vanish in the Wind'(안젤리카 레스트레포, 카를로스 벨란디아(Angélica RESTREPO, Carlos VELANDIA, 2022)
'바람에 흩어지는 상처All My Scars Vanish in the Wind'(안젤리카 레스트레포, 카를로스 벨란디아(Angélica RESTREPO, Carlos VELANDIA, 2022) 사진제공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최우수 글로컬 작품상을 수상한 안젤리카 레스트레포, 카를로스 벨란디아 작가의 <바람에 흩어지는 상처>는 가시화할 수 없는 신체의 경험, 트라우마, 정동을 표현한 작품이다. 먼지와 같이 불어오는 흰 점들이 하나의 형상을 이루며 흰 점은 숲 속에 걸쳐져있는 원피스, 집, 숲 들로 경계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점들의 얽힘과 뭉침의 부피에 따라 형체가 가시화될 뿐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에세이가 이러한 점들의 서사를 연결해주며 관객은 흩어졌다 다시 뭉치고 흩어졌다 다시 뭉치는 형상들 사이에서 의미들의 내부-작용들(intra-action)이 외부와 연결된 채 형상화된다. 바람에 의해 끊임없이 휘날리는 점들은 외부의 바람결에 따라 작아졌다 늘어났다를 반복한다. <바람에 흩어지는 상처>는 양자역학을 실천-담론으로 끌어온 캐런 바라드의 논의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포스트휴머니스트의 수행성>에서 캐런 바라다는 재현주의에서 끊임없이 변주하고 다른 사물들과 얽혀있는 내부-작용으로서의 수행성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며 인간주의를 넘어 사물의 능동성에 대해 제안한다.   

<퀸의 뜨개질>에서 실과 바늘, 뜨개질 매뉴얼이 갖고 있는 내부-작용들은 주인공인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바람에 흩어지는 상처>들은 눈보라치는 밤의 흰눈을 연상하게 하는 점들의 내부-작용 흐름에 따라 사물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생명'에 대해 재정의를 해야한다고 하는 오늘날, 사물-인간-생명이 매순간마다 변주하는 수행성으로 해독된다면 여성과 남성의 표준화된 사회적 정의가 얼마나 억압의 족쇄로 작용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글·김장연호
문화연구학 박사. 한예종 객원교수. 시네-미디어 큐레이터,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집행위원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대외협력이사, 한국영화학회 대외협력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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