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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속으로서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 김현정의 <흐르다>(2021)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속으로서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 김현정의 <흐르다>(2021)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1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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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을 기반으로 만든 독립영화 <흐르다>

문학사에 있어서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문학 장르의 위대한 전통은 주류 계층 출신 작가들보다는 주변인적 입지에서 그 전통의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로 만들어진다. 문학의 한 장르이자 좋은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비중있는 요인이기도 한 각본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제43회 영평상 각본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흐르다>(2021)의 각본 또한 <은하비디오>(2015,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우수상), 〈나만 없는 집〉(2017,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 〈입문반〉(2019, 서울독립영화제 대상)과 같은 탄탄한 단편영화들을 서울이 아닌 변방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 독립영화계의 신예 감독으로 떠오르고 있는 김현정 감독이 쓴 작품이다.

김현정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 <흐르다>는 30대에 접어든 취업준비생 진영(이설)을 주인공으로 하여 경상도 가정의 부녀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가족드라마 여성영화로 불릴 수 있다. 지역의 정서가 담긴 “서울이 아닌 변방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영화이지만, 그 이야기는 센터가 아니라 주변인적 입지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경험과 중요한 관심사들을 응축하여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에 적절한 영화의 형식과 매체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창조적 성과가 평가될 수 있다.

 

2. 서울이 아닌 변방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

 

이 영화는 진영이 겪는 청년세대 취업절벽과 아버지가 겪는 지방 자영업자의 몰락을 교차하면서, 서울이 아닌 변방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영화의 배경인 대구는 한때 섬유도시였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공장처럼 제조업 하청업체 위주로 재편된 지역경제 체제로 변방으로 전락한 지방도시이다. 아버지의 중소 제조업 공장은 숙련 노동자가 아닌 외국인 노동자로 겨우 돌아가는 중이고 언제든 과도한 대출로 파산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상태다. 진영은 공장에서 가끔 알바를 하며 용돈을 벌지만 공장 돌아가는 사정에는 무관심하게 모르는 척한다. 그녀의 취업 목표는 대구를 벗어나, 가능하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직업을 구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향해 자격 연령 상한인 서른 살에 걸린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를 지원해 겨우 합격해서 출국 준비를 하면서, 실질적으로 공장을 운영해온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매사에 진취적으로” 나아가야한다고 믿는 아버지의 무분별한 공격적인 투자는 결국 그를 넘어뜨리고 만다.

진영은 학벌천국 대한민국 생존 지침서로 베스트셀러가 된 자기계발서 『날개가 없다, 그래서 뛰는 거다』(2012)를 쓴 대구지역 지방대 출신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개척한 두 청년이 보여주는 취업에 필사적인 모습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는 취준생이다. 그녀는 스터디 모임에 나가고 인터넷 영어회화 강의도 들으며 성실하게 취업 준비에 나름 노력은 하고 있지만 무기력한 인상을 준다.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변화한 21세기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요구하는 성과 사회에 길들여져 자발적 자기 착취에 여념이 없는 취업에 필사적인 취준생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오랜 취업 준비로 지친 기색이 드러난 장수생 처지의 자신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는 세상과 아버지의 시선을 진영이가 견디는 시간이자 진영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배워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3. 지속으로서의 시간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는 자 되기

영화의 제목 ‘흐르다’는 베르그송이 일상적인 용어로서 시간과 구별되는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지속, 흐름, 지나가는 것이란 개념과 이를 전유하여 설명한 들뢰즈의 현대 영화의 직접적 시간-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일상적인 용어로서 시간은 일정한 점들이 이어진 ‘궤적’으로 표현되고 측정되며, 따라서 일상적 시간은 점들이 이어지는 선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일상적 세계의 상식적인 시간은 항상 일정한 행위와 연결된 개념으로, 일정한 행위의 경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포착된다. 즉 시간을 행위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개념에 근거한 영화를 들뢰즈는 상식적인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제공하는 “감각-운동 도식”(sensori-motor schema)에 따라 운동-이미지와 운동으로부터 추출된 간접적 시간 이미지를 생산하는 고전 영화로 분류한다. 고전 영화가 생산하는 운동-이미지와 간접적 시간 이미지는 우리의 습관적인 관심과 욕구에만 이르게 하는 지각 방식을 유도하여 사회적인 지각 습관들을 구성하고 있는 클리셰, 진부한 것들만을 보게 만든다(Cinema 1 63).

베르그송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선으로서 시간은 그 자체가 완결되어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는 구조이지만 지속으로서 시간은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며 ‘모두가 되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을 전유하여 직접적 시간-이미지와 새로운 사유 방식에 의한 사유-이미지를 생산하는 현대 영화의 이론을 전개한다. 현대 영화의 시간-이미지의 구조와 작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결정체-이미지”(crystal-image)는 그것을 구성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식별불가능한 공존 관계로 가장 기본적인 시간의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결정체-이미지가 드러내 보이는 시간의 감추어진 근거는 매순간 현재와 과거로 그 자체를 분리하는 두 개의 이질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즉 지나가는 현재와 보존하는 과거로의 흐름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흐름이다. 따라서 결정체-이미지는 공존성과 동시성의 질서 속에 출현하는 각각 과거와 현재를 중심으로 하는 두 직접적 시간-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지나가는 현재와 보존하는 과거로 구별되는 두 가지 흐름 가운데 지나가는 현재는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향해 질주하는 것으로 오히려 ‘죽음의 무도’를 형성한다. 반면에 보존하는 과거는 지나가는 현재들의 수평적 연속과는 달리 각각의 현재가 다른 현재로 이루어진 과거와 결합하듯이 자신의 고유한 과거와 심연으로 결합하는 수직적 선이 만나 구성되는 공존 속에서 구원과 탈주의 가능성, 즉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시작과 또 다른 거듭된 시작의 모든 가능성들을 확보할 수 있는 보존하는 과거는 자신의 심연 혹은 측면에 새로운 현실의 도약, 삶의 분출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Cinema 2 92). 따라서 현대 영화는 행동을 하는 “행위자”(agent)가 아니라 구원과 탈주의 실마리는 찾는 “보는 자”(seer)의 영화(Cinema 2 126)라고 한다. 또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고, 어떤 기존의 사유 방식으로도 사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보는 자는 결국 새로운 사유방식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한 새로운 사유방식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믿음을 다시 갖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에 주인공 진영을 등장시킨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세계와의 단절을 직면한 그녀가 보는 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보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사회적인 통념들이 만들어낸 클리셰 속에서 비로소 본질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영은 서른이라는 나이가 상식적인 시간의 ‘시간표’에 따르면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은 때라는 사회 통념에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회의가 초래한 딜레마에 빠진 진영의 보는 자 되는 이야기는 바로 감독 자신의 삶의 면면들을 반영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른에 시작한 그녀의 영화 작업의 시도 자체가 자신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힐링의 과정이었다고 한다.

4. 가족 드라마 여성 영화로서 <흐르다>

이 영화는 비교적 넓은 아파트에서 각자의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채 한 공간에 있기를 되도록 피하는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경상도 가족, 아버지 형석(박지일), 어머니 해수(안민영), 진영의 휴일 아침 광경으로 시작한다. 샤워를 하고 욕실에서 옷을 입고 나온 진영은 거실에 있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자기 방으로 곧장 들어가고, 거실 바닥에 깔린 이불에 누워 아버지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외출하려고 안방에서 나온 아내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경상도 방언 화자들인 세 사람의 감정 표현이 부재한 직설적인 단축 화법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소통, 타협과 조정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지방 특유의 언어 습관이자 개인의 성향을 드러내는 화법이다.

서먹하기 짝이 없는 경상도 부녀, 진영과 아버지는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다. 사실 진영은 아버지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고개를 푹 숙이거나 허공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자주 화면 바깥을 향해 있다. 그러나 진영이 시선을 교환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어머니이다. 자동차, 목욕탕에서 그리고 어머니의 침대에 누워 두 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할 수 있다. 꽃무늬 침구와 꽃분홍 지갑으로 소녀 감성을 표현하는 어머니는 진영과 아버지 사이의 시선의 중재자 역할을 맡아왔다. 어머니는 부녀 사이의 중재자 역할 뿐 아니라 가족의 안과 밖에서 고집 세고 권위적이지만 배짱만 부릴 뿐 아무 것도 제대로 꼼꼼하게 할 줄 모르는 경상도 마초 아재인 남편을 도와 빈자리를 메우며 공장을 운영하는데도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느닷없이 전체분량의 1/3 정도 흐른 시점에서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발생시킨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1927)의 ‘램지 부인’처럼 가족 모두에게 ‘모른 척하지 않고’ 완벽할 역할을 하지만, 그녀 자신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는 자신의 부재에 대하여 허무를 느낀다. 피곤해서 일찍 퇴근하여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쓸쓸한 모습, 어렵게 남편의 허락을 얻어 가게 된 동창회를 앞두고 흥분과 함께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허무감을 표현하는 그녀의 죽음은 램지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울프가 램지 부인의 죽음을 괄호 안에 지문으로 서술하듯이, 이 영화는 몇초 간 지속되는 블랙아웃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나가는 현재처럼 처리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과 같은 극적인 사건들을 생략하고, 죽음의 이유도 밝히지 않는다. 속초로 동창회에 가서 꽃밭 앞에 소녀처럼 환하게 웃고 찍은 어머니가 보낸 사진들을 휴대폰으로 보다가 마지막 무표정한 사진에 진영이가 보낸 “언제 오노?”라는 메시지에 응답이 없다. 사실 어머니의 소진된 상황은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냈고, 그래서 죽음으로 소멸한 것이다.

잠시 지속된 블랙아웃에 이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의 잔재인 유리 파편에 찔려서 난 발바닥 상처가 거의 아문 것을 확인하는 진영, 언니 소영(강진아)이 진영과 함께 동사무소에서 사망신고를 하는 장면에서야 우리는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의 이름이 해수라는 것도 알게 된다. 중재자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 가족은 거듭된 혼란과 위기를 맞게 된다. 아버지와의 적당히 거리두기와 모른 척 하기로 일관하던 진영 또한 이제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적 시나리오의 가족 드라마와는 달리, 이 영화가 다루는 부녀 관계는 오이디푸스적 경쟁이 아니라 잔잔한 듯 그러나 실제로는 격렬하게 벌어지는 대립과 갈등이 타협 없이 그냥 흘러간다. 그러나 그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진영도 아버지도 모두, 나이의 차이 때문인지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천천히 변하여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텅 빈 침대에 진영은 누워 본다. 형석 역시 아내가 없는 침대에 마침내 혼자 누워 본다. 부녀는 슬픔과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처연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과거 속에 보존된 어머니의 죽음과 기억들과 회한들을 소환하여 그 속에서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탈주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제 부녀가 앞을 보며 앉아 있는 차안에 긴장감과 함께 연대감의 기운도 흐르고, 구름처럼 공기 중에 꿈이 떠가기도 하고, 꾹 담아 놓았던 슬픔이 한계치를 넘어 대낮 담벽에 기대고 주저앉은 채 진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진영의 오열 이후 몇초간 지속된 블랙아웃에 이어 이 영화는 낯선 캐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가족사진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가 한가득 흘러 퍼지는 진영의 얼굴을 포착한 장면을 엔딩으로 맺는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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