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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해자의 영화를 본다는 것,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해자의 영화를 본다는 것,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2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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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오늘날의 러시아 영화, 더 나아가 노어권 영화를 감상하는 일에 있어 우러 전쟁을 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 영화가 우러 전쟁과 유관하든 아니든, (최소한 나는) 영화 속에서 전쟁의 이미지를 본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낌은 궁극적으로 전쟁의 해결에 대한 긴급함을 향한다. 다시 말해, 러시아 혹은 노어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전쟁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필요와 조급함을 느끼는 일이다. 조급함의 동기는와 같이 보편타당한 명제를 부정당한 것에 대한 일수도 있고, 보편타당한 명제가 실천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다. 다만,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관망자의 입장에서 혹은 먼 곳으로부터 부당함과 공포를 보게 되는 일은 필연적으로 전쟁의 당사자들을 대상화하는 일이다. 이는 종종 조급함이나 공포로 인해 개입해야 한다는 성급한 현실 참여 독려의 감상으로 귀결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날카롭지 않은 프로파간다를 생산하며 실재를 호도하거나 오독하게 만들며 어려운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 해결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며 종종 현실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만 한다. 때문에 관망자의 입장에서 러시아 혹은 노어권 영화를 보고 감상하는 일은, 오늘날 복잡하고 난감한 일이 되었다.

이 경우, 난감함을 우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감상 혹은 대상을 은유 혹은 우화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창작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유로마이단' 이후 로즈니차가 보여주었던 다큐멘터리 작업들이 대표적인 예시일 수 있겠다. 2014년 푸티지를 통해 유로마이단의 진행 과정을 효과적으로 전시했던 <마이단>을 마지막으로, 로즈니차는 많은 영화들에서 아카이빙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톧아보는 작업을 수행하는 방법론을 보여줬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맹렬히 (종종 비난으로 변하게 되는 수준의) 비판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국제영화제에서 러시아 영화를 보이콧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인해 리투아니아로 추방된 본인의 처지로 인한 작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방관자의 자리로 쫓겨난 창작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알렉세이 추포프, 나탈리아 메쿨로바 부부의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로즈니차의 정 반대 방향에서 우화적 관점을 견지하는 방법론을 수행한 사례로 보인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이미 오진우 평론가를 비롯한 많은 평론가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의 큰 맥락을 이루고 있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추락의 테마들이다. 영화의 주인공 볼코노고프를 비롯한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삶의 자리에서 추락하는 중이거나 이미 추락을 경험한 이들이다. 숙청을 피해 달아난 볼코노고프 대위를 추격하는 골로프냐 소령 역시 상승의 자리인 줄 알았던 진급에서 자신의 상급자의 과오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추락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반대로 볼코노고프 대위가 용서를 빌고, 구원을 받기 위해 찾아가는 인물들 역시 볼코노고프 대위가 속했던 비밀경찰 엔카베데에 의해 삶의 자리에서 추락을 경험한 이들이다. 그리고 볼코노고프 대위 자신 또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벌어지는 숙청을 피하지 못하고 추락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는 종종 이미지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이 보게되는 이미지는 엔카데베의 일원이었던 그보즈데프 소령의 추락이다. 그의 추락이 가져온 결과는 엔카데베에 의해 신속하게 은폐된다. 그리고 추락의 은폐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은폐한다는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다시 추락에 동원된다. 

볼코노고프 대위 역시 추락으로 인한 은폐, 그리고 은폐로 인한 추락의 악순환의 사슬에 의해 삶의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를 다른 인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볼코노고프 대위가 보는 환상들이다. 볼코노고프 대위가 환영을 보게 된 순간은 엔카데베에서 도망친 이후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직후다. 따라서 볼코노고프 대위를 다르게 만드는 이유가 그가 보는 환영, 즉 베레테니코프의 유령에게 있다면 볼코노고프 대위를 다른 인물로 만든 원인은 그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추락의 자리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킨 그보즈데프 소령,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골로프냐 소령과 다른 모습이다. 그는 숙청을 피해 자신의 애인을 찾아갔다가 밀고를 당하고, 결국 그는 거리의 부랑자로 밀려난다. 이후 그는 시체를 치우는 노역에 동원되는 데, 거기에는 모스크바의 삶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리고 그가 찾아가는 사람들 역시 정체성을 일부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즉, 볼코노고프 대위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경위는 실체가 유령에게 계시를 받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기능이 부전된 용서를 받는 것이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때문에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실체가 없는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우화로 보인다. 이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러시아 영화로서, 러시아의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전략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볼코노고프' '골로프냐' 등의 인물들이 지명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작품 내에서 확인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의 인물, 상징 등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물론, 관객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추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서 가장 명료한 것은 상황이다. 볼코노고프 대위는 생존을 위해 도망친 자리에서 밀고를 당하고,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피해 시체매립지에 몸을 숨긴다. 볼코노고프는 시체 매립지에서 은폐를 위해 활용되는 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숙청당한 베레테니코프 대위의 시체를 본다. 그러나 볼코노고프 대위도 베레테니코프와 다른 처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볼코노고프 대위가 구원의 계시를 받는 순간도 바로 거기에 있다. 볼코노고프는 은폐를 위해 활용되던 자리에서 밀려난 순간부터 "너가 고문해서 죽였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으라"는 베레테니코프의 계시를 받는다. 볼코노고프와 베레테니코프의 차이는, 베레테니코프가 말하듯 "운이 좋은 것" 뿐이다. 볼코노고프가 어쩌다가 도망치게 된 것처럼, 베레테니코프는 어쩌다보니 죽어있었을 뿐이다. 다만, 볼코노고프는 베레테니코프의 계시를 무시하지 않고 용서를 받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여기에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설정한 상황이 있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에는 이유가 없고, 이상한 세파를 피할 방법 또한 마땅치 않다. 어차피 운명은 인간을 덮칠 것이고, 피하는 방법은 없으니 오직 육체를 통해 무용해보이는 계시를 수행하는 것으로만 그나마 가능한 구원의 길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구원조차 객관적일수 없고, 인물의 주관에 불과하다는 것. 이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오늘날의 러시아를 바라보는 관점이자,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계승한 우화인 듯 하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2023 게임제네레이션 게임비평상. STRABASE 객원연구원,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현재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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