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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둘이 함께’가 의미하는 낙관과 비관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둘이 함께’가 의미하는 낙관과 비관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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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잠>이 의미하는 것

유재선 감독의 영화 <잠>에서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가훈’이 등장한다. 가훈의 내용은 바로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이다. 수진(정유미)은 렘수면 행동 장애를 앓고 있는 남편 현수(이선균)를 보고 그 가훈의 문구를 가리키며 용기를 북돋는다. 그렇다면 이 부부에게 발생하는 장애는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되면서 ‘공포’를 조장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함께 극복해야 할 ‘공포’가 되기도 한다.

 

수진의 가훈

여기에서의 장애와 공포에는 확실히 공통점이 있다. 흔히 말하듯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것. 하지만 이것이 중세시대 마녀사냥에서의 확신에 찬 신념처럼 작동하면 위험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현수에 대한 수진의 태도는 마치 그 시대의 마녀사냥 때 자행되던 모습을 점점 더 연상케 만드는데, 그러다가 급기야 둘이 함께 극복해야 할 장애는 어느 하나를 없애야 하는 긴박한 공포로 돌변한다. 이때 현수의 행동 장애는 불확실한 메시지를 계속 보여주므로 해석자 격인 수진은 그 불안감에서 오는 공포를 확신에 찬 행동으로 대체하려 몸부림 치기 시작한다.

 

수진의 불안감

그러다가 수진의 불안감에서 유발되는 행동들은 결국 ‘신경증’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 영화는 가훈에서 읽을 수 있는 ‘둘’의 의미가 식별 불가능한 결과임을 암시하기 때문에 그 신경증의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수진의 신경증을 유발하는 '둘'의 의미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읽어낼 수 있다.

 

현수의 행동장애

첫째, 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가훈에서 ‘둘’의 의미는 수진과 현수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현수와 현수의 집에 몰래 들어온 누군가(아래집 노인의 원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극복해야 할 대상, 아니 제거의 대상은 수진이 된다. 깊어지는 수진의 신경증적 증상은 이에 대한 몸의 반응일지 모른다. 이런 해석은 현수가 배우라는 사실 때문에 더 강화된다. 수진은 현수의 연기를 극찬하는 사람이다. 연기 한다는 것이 그저 흉내 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수진의 신경증의 원인을 이해하기 훨씬 쉬워진다. 수진은 현수가 현수의 몸을 장악한 누군가를 연기한다면(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둘을 식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의 렘수면 장애

둘째, ‘둘’의 의미가 수진과 수진의 집에 몰래 들어온 누군가일 수 있다. 영화의 주된 서사는 사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래 집에 살던 노인이 현수를 없애고 수진과 함께 살고자 했다는 진술에서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니 수진이 과도하게 현수의 행동 장애를 극복해 내려고 광기 어린 행동을 한 것(자칫 현수를 죽일 수도 있었던 일)은 자신도 모르게 아래 집 노인의 뜻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수진은 애초부터 자신의 의지와 노인의 의지를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진의 불안

이 영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바로 ‘둘’의 의미가 이렇듯 어딘가에서부터 무지불식간에 식별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진의 신경증은 현수의 렘수면 행동 장애와 아랫집 노인의 원혼 사이에서 그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식별해 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상황을 그저 수진의 광기라고만 치부하면 우리는 이 영화가 가진 진짜 ‘미스터리’한 이유를 놓칠 수 있다.

 

수진의 공포

진짜 미스터리한 이유는 이렇다. 지금까지 ‘둘이 함께’라는 의미가 막연하게 보통 사람들의 선한 관계와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상기시켜 왔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말은 오히려 맹목적인 신념을 극단적으로 유발할 수도 있는 식별 불가능한 상태를 뜻할 수도 있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요컨대 인간관계에 있어서 ‘둘’이 지닌 의미는 그것이 뜻하는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다른 차원의 공포와 광기를 불러 세울 수도 있다.

 

맹목적 신념

그러므로 수진과 현수의 다음 이야기에서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둘이 함께’가 초래한 식별 불가능한 관계가 무너뜨린 둘의 관계 즉 붕괴된 신뢰는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게 할 것인가? 유재선 감독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현수의 연기력을 남겨 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현수가 연기를 통해 수진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빠였어?” 수진의 이 말은 어떻게 보면 현수가 연기로써 수진을 확실하게 보듬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신뢰의 관계

인간관계에서 이런 식별 불가능한 상황은 극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수진과 현수는 연기가 현실을 가려도, 아니 가짜가 진짜인척 하더라도 둘이 함께 극복할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은 '둘이 함께 하면 극복 못 할 문제가 없다'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치명적인 한계가 있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일은 언제나 모호한 상태(가짜와 진짜를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생기기 마련이라고. 그러고 보니 이것은 요즘 우리 사회 속 인간관계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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