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겨선 안될 승자의 세레머니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겨선 안될 승자의 세레머니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23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용감한 시민>이 불편한 이유들

*스포일러가 살짝 있음.

한 영화에서 어떤 악행은 더 할 수 없이 극사실적으로, 그에 대한 어떤 복수는 더 할 수 없이 판타지적으로 다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기에 더해, 그 악행은 현재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그 복수는 어디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라면 통쾌할까 허무할까?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영화 <용감한 시민>에서 학폭 가해자는 소시오패스나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악랄한 악마로서, 일말의 양심도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여기에 신체 능력도 출중하고 게다가 무소불위의 법적 권세를 앞세우니,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근래 본 악당 캐릭터 중에서 단연코 압도적이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반면 이런 악당에게 당하고만 있는 피해자는 상대적으로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책망하는 모습으로 일관되게 그려진다. 가해자의 악행은 오히려 피해자의 무기력한 모습 때문에 더더욱 악랄하게 보이기만 한다. 극단적인 이 대립관계는 ‘통쾌한 한방’이라는 홍보 문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그런데 놀라운 건,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히는 극단적인 폭력에 비해 그토록 기다렸던 ‘통쾌한 한방’은 잘 와 닿지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현실에서 학폭 가해자가 우월한 법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를 방어하고 피해자를 거침없이 조롱하며 유린하는 모습, 급기야 철저하게 희생시키는 방식은 너무나 꼼꼼해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역대 급 분노만 일으킬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가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동안에도 그 말이 너무 공허하게 다가왔다는 거다. 아마도 학교 폭력의 문맥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 일방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쪽은 너무 과했고 다른 한쪽은 너무 물렀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이 영화는 ‘살고 싶다’는 피해학생의 소리 없는 절규에 제대로 응답하기까지 대리 복수자의 결단을 그리는 영화다. 대리 복수자인 주인공 소시민(신혜선)은 정교직 교사에 목을 매고 있는 발랄한 인기 여교사(사실은 기간제 교사)인데 마침 복싱 등 각종 격투기에 능한 사람으로 나온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하지만 소시민의 사적 배경(정규직을 지독히도 원하고 있으며 복싱계에서 왜 은퇴하게 되었는지 등등)은 사족으로만 느껴지는데, 이는 웹툰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부작용 같은 것이기도 하다. 긴 웹툰의 서사를 압축하다보면 생기는 부작용이어서 앞뒤 맥락을 끊어 내면 이런 배경이 사족으로 보일 때가 있다. 

 

출처_네이버
출처_네이버

그럼에도 대리 복수자와 피해자와의 라포 형성은 매우 중요한 일일 텐데, 오히려 이 부분은 부실하다. 그건 우리 사회가 미리 규정해 놓은 학폭 피해자에 대한 인식 때문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학폭 피해자는 가난하며, 편모 혹은 편부 슬하 아니면 조부모와 함께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공식과도 같은 그 규정 말이다. (그런 식의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그래서 이 영화는 피해자를 묘사하기위해 거쳐야 하는 치열한 고민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피해자가 직접 복수하는 방식에는 관심이 없고 더 나아가 진실된 사과를 받아 내겠다는 윤리적 결말에도 역시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대리 복수자의 승리, 그것만이 중요하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이 영화가 매정해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피해자 캐릭터를 위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대리 복수자의 승리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 악마와도 같은 가해자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피해자를 너무도 빤한 공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 여기에 덧붙는 문제가 또 하나 있다. 가해 학생의 막무가내식 행동의 근원에는 부모의 권력이 있다는 것. 절망스럽게도 영화는 이를 타고난 환경일 뿐이라는 식으로 처리해 버릴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의 꼭대기에 가해학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무리수를 둔다. 학폭관련 이슈는 이제 법적 공방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며 치를 떠는 교사들의 대화에서 이런 절망감은 절정을 이룬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은 가해자의 강력함이 구축되는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이는 무맥락적으로 영웅 신화를 담고자 하는 모방욕구만 자극한다. 극적인 영웅 신화는 오로지 극단적인 빌런, 절대강자를 필요로 한다. 영웅과 빌런의 대립을 극단으로 높여 놓으면 그 만큼 복수는 통쾌해질 수 있다고 믿어서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하지만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소시민에게 복수의 쾌감을 위탁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해자를 위해 피해자를 희생시킨 영화라도 문제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영웅 소시민을 위해 희생, 아니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영화적 공감의 역할은 설 자리를 잃는다. 대리 만족을 의도한 속 시원한 복수의 강렬함도 명분이 약해진다. 그러다 급기야 강해도 너무 강한 가해자의 편에 서게 되는 이상한 동일시가 일어나기도 한다. 가해자의 캐릭터를 영웅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대립의 서사는 대부분 강자에게 동일시하게 만드니까. 

 

출처_다음
출처_다음

학교 폭력 문제는 늘 심각한 것이니 이를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서 여러 각도로 바라보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은근히 가해자의 악행을 해명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경계해야한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영화 마지막, 가해학생은 구속된다. 제보된 학폭 동영상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까지다. 현실에서 그 증거는 법정 증거로 채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라고 몰아붙이면 법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생길 것이 확실해서다. 법적 다툼의 여지에서 승리하는 쪽은 늘 법적 지위가 우월한 강자들이다. 현실에서도 이 논리로 많은 가해자들이 법망을 빠져 나가지 않았나. 자기 얼굴이 정확히 녹화되어 있어도 아니라고 하면 그만일 정도니 말이다. 

고로 악마와 같은 가해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풀려날 것이다. 이 영화가 다 담지 못한 결말은 그럴 것이다.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그 사실은 우리 사회의 치부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가 제시하는 그 한방은 느리고 물렀으며 통쾌하지도 않다. 그러고보니 가해학생의 악행, 잔혹한 폭력의 격한 그 모션들(니킥, 어퍼컷 등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른바 ‘법적 다툼의 여지’에서 늘 승리하는 승자의 자축 세레머니로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던 이유는 그 모션이 누군가를 선명하게 연상시켜서이기도 했다.)

 

출처_다음
출처_다음

한 영화에서 어떤 악행은 더 할 수 없이 극사실적으로, 그에 대한 어떤 복수는 더 할 수 없이 판타지적으로 다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글 첫머리에서 던진 내 질문에 답할 차례다. 어떤 일이 벌어지긴... 승리자의 그 세레머니를 동일시 한 채 나의 승리로 여기거나 아니면 맹목적으로 바라보거나 그도 아니면 내 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바라보겠지. 그렇게 우리는 학교 폭력, 아니 모든 폭력에, 더 나아가 모든 기득권의 폐해에 점점 더 무뎌져 가기만 한다.

부언: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응원한다. 한국영화를 새롭게 접하는 다른 이들에게는 현실 묘사의 세기가 이처럼 강렬한 영화는 처음일테니 말이다.(2023년 10월 25일 개봉)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