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비정한 진보, 따뜻한 보수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비정한 진보, 따뜻한 보수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3.10.24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정한’ 진보는 21세기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난 2년간 우리는 코로나19의 깊은 터널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재난이었다. 그와 함께 치른 대통령선거는 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에 관한 선택이기도 했다. 이재명 후보는 먼저 기본소득정책을 대선공약으로 내세웠고, 모든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해 이 재난을 극복하자는 정책을 제시했다. 기본소득은 부자나 빈자 모두에게 똑같이 조건 없이 지급되는 현금이다. 나아가 전국민재난지원금 역시 기본소득과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재난을 입었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그 경중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를 지급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사회적 약자와 재난을 입은 동료 시민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는다. 조금 박하게 표현하자면, 비교적 좋은 행운을 얻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해 내 몫을 내어주기 싫다는 것이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이런 정책과 태도는 좀 비정하다. 그런데도 총투표자 중 47.83%가 이 정책에 찬성했다. 이재명은 보수적인 윤석열에 대항하자고 출마한 명색이 진보진영의 후보였다.

더 큰 재난을 입은 동료 시민의 처지에 마음이 아팠던 문재인 대통령은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1차 재난지원금을 기부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체 지급액 가운데 1.9%만 기부로 돌아왔다. 진보정권을 지지한 유권자 47.83%에, 원조진보라고 자칭하는 심상정 후보의 지지자가 2.37%, 그러니까 나이롱진보(!)든 진짜진보든 모두 합해 진보가 무려 절반에 이르는데도 말이다. 참 비정하다. 도대체 진보가 뭐기에 대한민국 진보는 이토록 비정한가?

 

진보는 원래 비정하지 않다

진보란 무엇인가?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보수가 ‘과거’와 ‘옛것’과 관련되니, 진보는 ‘미래’와 ‘새로운 것’을 추구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단지 앞서고 새롭다고 해서 추구할 만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보수든 진보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헌신적으로 추구될 것이다. 형식적 진보가 아니라 ‘가치적 진보’가 진정한 의미의 진보라는 말이다. 혼재하는 여러 가지 가치들 가운데 도덕적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 도덕적 가치는 다른 모든 가치를 지도하는 ‘메타가치’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역사적 개념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역사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현실은 개별적일 뿐 아니라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진보는 불완전하며 개략적일 수밖에 없다. 진보라는 단어는 근대적 개념이다. 정치사적으로 볼 때 근대의 시민혁명 중 가장 진보적이면서 대표적인 사건은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일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은 단지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보적인 이유는 민주주의라는 정체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온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가치 위에 서 있다. 이처럼 처음부터 진보는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도덕적 가치를 지향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매우 바람직하며 보편적으로 수용될 만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은 자유, 평등, 우애로 대표된다. 셋 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평등과 우애는 도덕적 가치와 가장 가깝다. 도덕적 기준으로 뒷받침될 때, 불평등은 한층 더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정신만으로 평등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일설에 의하면 우애(fraternity)는 19세기 후반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이라는 진보적 일본 학자에 의해 박애(philanthropy), 곧 ‘인류애’로 오역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오역(!) 마저 진보적 근대일본인의 도덕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진보의 이념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진보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시공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만 그렇지 않았다. 독일의 사민당은 ‘연대’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거기에 노동자끼리의 기계적 연대는 물론 약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오해하고 있다. 상업적 코카콜라 문화, 천박한 소비주의 문화, 무자비한 자유경쟁, 몰인정한 개인주의, 탐욕스런 이기주의, 몰가치적 공리주의, 그 결과 극심한 빈부격차, 살인적인 의료가격, 낙후된 사회복지, 파괴된 공공교육 등이 미국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강한 진보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대략 1897년과 1920년 사이의 미국은 ‘진보의 시대’(Progressive Era)로 불린다. 그 시대에 소스타인 베블런은 진보적 ‘제도경제학’을 열었고, 철학자 존 듀이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다졌다. 둘은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여야 한다는 ‘도구주의’에 찬성했다.

뿐만 아니라 베블런은 불평등이 유발한 ‘유한계급’의 “낭비적 과시소비”를 신랄히 비난했고, 듀이는 ‘플라톤적 엘리트’를 단호히 거부하고 “민주적 공중”이 중심이 되는 “참여민주주의”의 건설에 헌신했다. 그들의 이론과 실천은 일관되게 ‘빈자와 민중’을 향하고 있었다. 도덕적 가치, 그중에서도 우애, 연대, 박애의 정신이 강력히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의 뉴딜정책은 이런 도덕적 문화 위에서 시행되었다. 존 듀이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지지했고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로 불렀다. 사회학자 밀스(C.W.Mills)에 의하면 듀이는 “전문적 학술 저널이나 대학 강의실의 차갑고 기술적인 담론보다는 공동체를 향해 공익을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한, 민주주의에 헌신한 사상가이며 마지막 공공 철학자”였다.

이러한 전통에 힘입어 미국적 진보인 ‘리버럴’이 도덕적 가치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자유뿐 아니라 평등, 더 나아가 ‘공동선’을 중요한 미국적 가치로 내세운다. 물론 서양의 기독교문화가 습관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으나 내가 보기에 20세기의 진보세력이 이웃사랑의 도덕을 의식적으로 높게 평가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진보세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덕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정하지도 않았다.

 

따뜻한 보수와 비정한 진보

 

『 사회적 타살입니다』(권종호, 2023, 산지니)
『고독사는 사회적 타살입니다』(권종호, 2023, 산지니)

『고독사는 사회적 타살입니다』(권종호 지음, 2023, 산지니)는 현직 경찰관이 20년 가까이 고독사 현장을 접하면서 얻은 체험과 느낌, 그리고 나름의 대안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어조로 수록한 책이다.

“눈을 돌려 두어 평 남짓한 방 겸 거실을 본다. 벽에는 깨끗한 양복이 애처롭게 걸려 있다. 옷 주인은 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꿈을 키웠을 것이다. 밥상 위에는 TV가 올려져 있고 바닥에는 담요와 전기장판뿐이다. 검소하다고 표현하기에는 세간살이가 너무 없다. ... 청년의 어머니인가 보다. 엄마가 운다. 차라리 큰 소리로 울었으면 좋겠다. 흐느끼는 소리가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힌다.”(p.66~69) 29세의 착한 청년은 옥탑방 벽에 양복을 걸어 놓은 채 일산화탄소의 무게 아래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죽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죽기에는 너무 서글프다. 무섭기도 하다. 하소연할 곳이 없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으면 청소업자에게 전화해서 아침 일찍 청소를 의뢰했을까. 말은 청소 의뢰이지만 자신의 시체를 발견해서 정리를 해달라는 거였다. 우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p.97)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꽃 한송이는 그렇게 속절없이 지고 말았다. 켜진 컴퓨터 화면의 이력서는 그녀의 몸부림과 절규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고발한다. “17년 전 나는 국가유공자의 참혹한 고독사현장을 보았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고독사(병사)로 종결되었지만 나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오늘날의 사회를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인지하고, 그들이 방치한 죽음을 고발하고자 한다.”(p.10) 그의 모든 문장은 고독사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소외된 이웃에 대한 강한 연대와 뜨거운 사랑으로 넘친다.

사회적 약자로 향하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도 다정하다. 도덕적 책임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마치 자기 일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속단일 수도 있지만, 책에서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아 저자는 보수적 입장에 가까운 것 같다. 도덕적 책임을 다하고자 몸부림치는 보수와 그것을 외면하는 진보 가운데 누가 더 바람직한 사람일까? 누가 더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까?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쪽에 지지를 보낼까? 굳건한 진보주의자로서 내게 탈도덕적이며 비정한 진보보다 도덕적이면서 다정한 보수에 더 마음이 끌리는 건 속일 수 없다.

 

새로운 자본주의, 새로운 진보

자본주의는 근대를 넘어 21세기에 진입했다. 그 속에서 근대와 다른 새로운 모습들이 등장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유례없이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 불안한 비정규직도 급증하고 있다. 부의 세습으로 인해 불평등은 한층 심화되고 있다. 낙오되고 방치된 ‘잉여인간’은 늘어만 가고 있다.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도덕적 감수성도 그중 큰 몫을 차지한다. 새로워진 자본주의에서 도덕이 없는 진보는 설 자리가 없고, 비정한 진보는 참다운 진보가 아니다! 한국의 진보는 새롭게 변해야 한다. 21세기에서 도덕은 보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연대와 박애가 없는 진보는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을뿐더러 경제적으로도 쓸모가 없다. 경제학자가 도덕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다.

 


글 · 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