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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코고나다의 포개진 얼굴들 <애프터 양>(2022)
[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코고나다의 포개진 얼굴들 <애프터 양>(2022)
  • 이하늘(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0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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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 양 포스터.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영화 '애프터 양 포스터.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하늘을 나는 우주선, 외계인과의 조우, 인간과 대척점에 선 기계들에 대한 이미지는 SF의 짙은 잔상이었다. ‘Science fiction’이라 불리는 SF는 그 기반을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발달에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무언가를 개발하고자 하는 욕구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초점이 쏠려있다. <에일리언>(1987), <토탈리콜>(1990), <인디펜던스 데이>(1996), <매트릭스>(1999) 등은 위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는 대표 사례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창조해낸 복제 인간과 인공지능 코드는 19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며 공포라는 감정으로 극대화되었다. 흔히 이 시기의 공통분모인 두려움은 인간 자신이 창조한 것에 의해 세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녔고, 반면 인공지능은 자유의지가 통제된 죽음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가 지배적이었다. 인간과 기계의 대립 양상의 실타래를 푸는 것은 오랜 숙원 사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2022)은 SF라고 부르기에는 아주 모호한 구석이 있다. 공식과도 같은 SF의 이미지들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불특정한 시기와 도시 공간은 모호함을 증폭시킨다. 인공지능을 가족으로 구입하는 <애프터 양>의 세계는 인물들의 언어로 세계의 규칙이 노출이 될 뿐, 표면 위로 가시화되지는 않는다. 인공지능 양의 외양은 인간과 식별되지 않는 포스트 휴먼(Posthuman)에 가깝다. 2019년을 배경으로 설정한 1993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도 인간화된 기계를 이미지화한다. 이들을 구분하는 한 가지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기억으로 촉발된 감정이다. 노예 기능을 수행하는 복제인간 넥서스 6는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자 탈출하고,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 형사는 그들을 좇는다. 그 과정에서 데커드는 일련의 테스트를 하게 된다. 인터뷰 형식의 테스트는 인공지능의 존재를 알린 앨런 튜링의 튜링 테스트를 그 원형으로 삼고 있으며, 감정의 폭이 넓지 않은 인공지능은 테스트를 통해 실체가 판가름 난다. 판단의 척도인 감정은 오랜 시간 쌓아온 과거가 없는, 즉 실체가 없는 기억이 삽입된 채 살아가는 인공지능을 구분 짓는 잔인한 테스트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사진을 모으고, 데커드는 “왜 복제인간들이 사진을 모으는지”에 대한 의문을 표한다.

공교롭게도 <애프터 양>의 첫 장면은 인공지능인 양이 제이크 가족과 사진을 찍는 것으로 시작된다. 기계적 작동 방식으로 찍히는 물리적 사진과 양의 기억에 저장되는 이미지로 가족의 형태는 두 가지로 나뉘고, 피사체를 찍으려는 촬영자의 시점이던 양은 “빨리 와.”라는 제이크의 손짓으로 내부자인 피사체로 뒤집히게 된다. 영화는 촬영된 사진의 상이 뒤집히는 장면을 삽입한다. 어쩌면 이는 세계의 규칙을 기존의 관습과 관념으로 바라보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려는 감독의 시선이 들어간 쇼트일지도 모른다. <블레이드 러너>의 레이첼은 3인칭으로 고정된 기억들이 주입된 채 살아가는 반면에, 양의 기억은 3인칭이 아닌 1인칭으로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기록하며 그 순간 양의 기억은 특별해진다. 일종의 아우라(aura)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애프터 양>이 SF 영화지만 기존의 할리우드 SF 영화와 다른 이유다.

 

포개지고 반사된 얼굴(들)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SF에서 공간은 시기를 특정하는 표현의 일환이자 상징물이다. <매트로폴리스>(1927)의 불규칙하게 위로 솟아오른 철조 건축물은 현대적 양식을 활용한 비전으로서 작용했으며, <1984>(1984)는 통제를 위한 사방이 막힌 공간을 통해 음울한 세계를 그려냈다. <토탈리콜>(1990)에서는 화성 내부의 불완전한 콘크리트 건물을 통해 기형적인 존재의 탄생을 만들었고, <블레이드 러너> 역시 느와르의 전형처럼 보이는 자욱한 안개와 비, 동양인의 기계적 음성이 전광판에 띄워진 고층 건물들은 냉소적인 인간상을 대변했다.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 속 도시 공간은 미국의 모더니즘 건축물로서 초록빛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공간을 멀리서 조망하는 쇼트들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제이크의 이웃집이나 양의 신체를 수리하기 위해서 방문하는 공간, 박물관 등의 내부를 비추는 쇼트들이 공간을 설명하는 유일한 요소일 뿐이다. 때문에 <애프터 양>의 자연친화적인 공간은 특별하다. 코고나다는 피사체로서 모더니즘 건축물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인터뷰에 “모더니즘 운동은 그 기원에 인간의 진실과 의미를 탐구하려는 열정을 품고 있으며 종교의 시대가 저문 뒤 서구 예술은 삶의 공허함을 탐구했고 그 감상을 건축 디자인에서도 전하기 시작한 셈이다.”라고 답한다. 감독에게 모더니즘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함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코고나다가 창조해낸 공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유리창이다. 반사된 얼굴을 투영하는 유리창은 인물과 공간을 압축해서 포개지도록 한다. 이는 미장센이면서도 기억을 구현하는 방식과 닮아있다. 집 내부, 소파에 앉은 제이크와 외부의 마당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딸 미카는 물리적으로는 떨어진 상태다. 하지만 반사된 미카의 이미지에 제이크의 형태가 포개지면서 두 사람은 공간의 거리를 넘어 마주한다. 시공간적 멂과 가까움이 일순간 교체 또는 응축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제이크는 양을 수리하기 위해 구입한 가게를 방문하고는 그 공간이 물고기를 파는 공간으로 바뀌어있음을 알게 된다. 모호한 시점으로 제시된 수족관 안에 가득한 물과 바깥의 풍경은 겹쳐져서 마치 거리의 사람들은 물속을 걷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이러한 잉여적인 숏들은 단순히 감독의 스타일로만 치부할 수 없으며, 주제를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태도로 읽을 수 있다. 기이한 형태로 접합한 이미지를 비추는 카메라는 유독 멀리서 인물과 공간을 잡고, 이는 기억의 포개짐을 형상화한다.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애프터 양>에서 양의 기억은 축적 가능한 건축물에 가깝다. 코고나다의 전작인 <콜럼버스>(2018)는 오래된 건축물과 타인의 역사가 층위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구조를 지녔다. 건축물을 보는 해설자와 방랑자의 시간을 경유하며 고통 위에 치유가 얹어지고 감정은 순환한다. 치유는 타인과 나의 포개짐이다. 자신이 미워하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위해 콜럼버스에 온 진과 어머니의 방황으로 콜럼버스를 떠날 수 없는 케이시의 만남은 움직임이 진행되는 산책과 고정된 역사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애프터 양>의 건축 양식 또한 인물들을 치유의 과정으로 들어서게 한다. 할리우드 SF와 <애프터 양>이 가장 큰 차이는 동양에서 받은 영향력이다. 한국 이민자 2세 출신인 감독은 파편화된 정체성 사이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도시 공간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세월의 잔해들은 인공적으로 직조한 느낌의 외벽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노년의 캐릭터들로 인해 보존되고, 문틈 사이에 배치된 인물들을 멀리서 잡는 카메라는 공간과 인물 사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 폭의 회화와도 같다.

하지만 코노나다는 치유의 공간에서 고장 난 양을 지체 없이 내보낸다. 신체 수리를 위해 집 내부로부터 쫓겨난 양은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차가운 테이블 위에 누워있고, 얼굴은 반사되기를 멈춘다. 사실 반사된 얼굴들은 구체적이기보다 모호함에 가깝다. 양은 이동 수단을 통해 끌려 다니는데, 얼굴에 닿던 추상적인 형체인 빛은 머무르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실체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하는 왜곡된 형태는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저울질한다. 빛은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을 그리듯이 지나왔던 공간을 스쳐 지나간다. 또한 이동 수단의 외부에는 구체적인 풍경은 소거되어 같은 구간을 반복적으로 지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양의 머물렀던 제이크의 집 풍경의 구체적인 묘사와는 상반된다. 코고나다는 “인생은 끊임없이 지나간다.”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는 빛은 삶과 죽음을 관통한다.

 

기억을 감상하는 방법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제이크는 양의 기억을 보는 감상자이다. 어두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처럼 선글라스와 비슷한 검은 안경을 끼고, 제이크가 한곳을 응시하면 양의 기억을 볼 수 있다. 생각보다 간단한 방식이다. 고정밀성, 저참여성의 지닌 영화는 통제된 시공간적 성격을 지닌다. 극장의 관람 규칙과도 일치하는 이 부분은 어린 딸 미카가 제이크를 호명하자 관람을 끝내 이어가지 못하고 중단된다. 제이크가 기억을 관람하는 방식은 지금의 극장 형태보다는 영화사의 초기 극장 형태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와 닮아있다. 관람객 혼자서 장치 속의 영화를 들여다보는 형태로 짧은 움직임을 본다는 것도 유사하다. 제이크의 아내 역시 양의 기억을 혼자서 관람하게 된다. 기억 장치 입구에는 울창한 나무들과 포자 형태로 떠다니는 유전자 배열 형태의 기억들이 배치되어 있다. 양의 기억은 3초간의 짧은 영상들로 편집되지 않은 쇼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에 위치한 수용자인 제이크의 음성에 의해 재생과 반복이 가능한 양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순차적인 배치가 아닌 파편화된 배열인 비선형적인 구조를 가진다. 우리는 기존 관념에 따라서 시간의 방향을 같은 선상 위에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선형적인 구조로 이해한다.

<애프터 양>의 시간 구조의 핵심 축은 ‘이후’라는 미래 시간이 도착한 뒤의 해석이다. 양의 기억은 제이크에 의해 해석되며, 신체가 고장 난 이후에 과거의 행위는 감상을 통해 가치 판단된다. 단편적으로 제시된 기억들은 의미를 해석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3초라는 제한된 시간과 불연속적인 배열로 인한 내러티브의 부재 때문이다. 하지만 감상자인 제이크가 지닌 기억이 양과 중첩되면서 의미는 재해석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미래에 도착한 결과들에 의해 과거는 소급적으로 판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적 용어를 빌려 설명하는 지젝은 즉자 존재에서 대자 존재로의 전환을 언급한다. 양과 제이크의 사례에 대입해 보면, 즉자 존재에 불과했던 양의 기억은 제이크가 보는 시각이 덧붙여지면서 해석이 첨가된 기억인 대자 존재로 변형된 것이다. 미래의 해석이 도착한 이후에 새롭게 결정된 과거의 기억은 이제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나온 이후에 관객들이 내부의 텍스트인 영화 외부의 것인 자신의 생각을 결합하는 것과 유사하다. 영화의 제목인 After Yang에서 After는 시간, 순서상으로 뒤를 뜻한다. 제목에서도 언급하듯 양의 기억 가치는 기록된 그 순간이 아니라 제이크에 의해서 재생된 이후의 순간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이후’라는 단어가 중요한 까닭은 뒤섞이는 감각이 결부되기 때문이다.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영화 '애프터 양' 스틸컷. /사진제공=㈜영화특별시SMC

그렇다면 양의 기억을 감상하는 제이크는 어떤 인물일까. 제이크는 다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다. 다른 존재와 섞이는 것보다 독립적인 유기체로서 단일한 상태를 추구한다. 그런 제이크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오프닝의 손님이 차를 찾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이크는 가루 형태의 차를 찾는 손님에게 단호하게 없다고 말하는데, 손님은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한다며 타박한다. 이에 제이크는 집에 도착해 가루 형태의 차를 물에 우려 보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짓는다. 코고나다는 잉여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유하듯이 떠다니던 가루가 이내 가라앉는 투명한 유리컵 인서트를 보여준다. 그런 제이크가 양의 기억을 보고 변화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뒤섞임은 문화가 융합되는 것과 동일하다. <애프터 양>의 다양성은 찻집 주인인 미국인 제이크와 중국에서 입양한 딸 미카, 전혀 다른 나무의 품종을 접목하는 행위와 함께 양이 돌봄 노동 이상의 컬처 테크노라는 사실을 관통한다. 또한 미카가 볼 안에 고추장을 넣고 섞어 만든 비빔밥의 원형은 각각의 독립적인 재료가 원본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고추장이라는 결합물을 통해서 재료는 뒤섞인다. 코고나다가 지속적으로 말하는 정체성은 다양한 색이 섞인 산물이다.

<애프터 양>이 감동적인 이유는 양의 기억이 현재의 시간 위에서 기록되는 과정이 아닌 과거의 시간이 사후적으로 재생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주체는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다시금 쌓여가는 시간들은 양의 기억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기억은 사실 불완전하다. 제이크와 양의 차에 관한 대화, 제이크 아내와 양의 나비에 관한 대화가 소리와 이미지의 어긋남이나 구간의 반복이 이뤄지는 까닭은 기억은 기록된 이후에 해석이 얹어지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이 동시간적으로 기억하게끔 되어있다. 끝과 시작이 동일선상에 놓인 애벌레와 나비처럼 기억은 변태의 과정을 겪는다. 다른 기억이 추가적으로 밀랍판 위에 기록되면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을 재생할 것이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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