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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금, 작은 공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 영화 <빅슬립>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금, 작은 공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 영화 <빅슬립>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20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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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잘 곳이 없는 이에게,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이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잘 곳과 먹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차분히 실력을 쌓고 미래를 그려야 지금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이랍시고 늘어놓는 말들은 그들의 피곤함과 배고픔을 당길 뿐이다. 게다가 이를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버릇을 나쁘게 할 뿐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게 만들 뿐이라고 사후적인 판단을 내리며 그들의 현재에 눈감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혹은 신체적 죽음을 당기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된 이들에게 자꾸 그 다음을 위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살아남는 것과 멀어지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처해있는 당장의 위기를 지금의 사회는 이렇게 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영화 <빅슬립>이 내놓은 건네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잠시 말했던 것처럼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빅슬립>은 바로 이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 방법이 그리 어렵지 않으며 도움을 받는 이에게도, 먼저 손 내민 이에게도 분명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구부정한 걸음걸이, 아무렇게나 걸친 작업복과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수염, 적은 말수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기영(김영성)의 모습은 왠지 불안정해 보이고 피해야 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러한 기영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되었던 그의 면면은 한 겨울 그가 사는 빌라 앞 평상에서 작은 히터를 켜 놓은 채 웅크리고 잠든 길호(최준우)를 대하는 모습에서 확신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길호를 ‘야’라며 함부로 부르고, 반응이 없자 평상에 발길질을 해대며 길호를 깨우거나, 길호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평상을 치우라 화내고 히터의 전기세를 말하는 모습은 분명 거칠고 누군가에게 연민 따위 품지 않을 이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영이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던 길호는 기영에게서 다른 모습을 본 듯하다. 기영이 오해로 치워놓으라 했던 평상을 치운다면 이곳에 와도 되냐고 묻는 길호의 행동은 그에게 이 정도의 관심이라도 보인 이가 기영이 처음이었을 것이라는 점, 이렇게 말이라도 걸어준 관심이 반가운 것일지 모른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아직도 그곳에서 웅크리고 잠든 길호에게 기영은 갈 데가 없으면 들어오라며 잘 곳을, 그리고 먹을 것을 내어준다.

 

사실 영화 <빅슬립>의 시작과 끝, 모든 것은 바로 이 장면에 있다. 이렇게나 무심했던 이가 보였던 관심과 그것으로 변화를 꿈꾸는 이의 미래, 그리고 두 사람에게 스미는 안정. 이 장면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것이 그렇게나 많은 고려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누군가의 숨통을 틔는 일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서로를 경계하다 차츰 서로에게 의지하며 관계를 쌓아나가는 과정은 바로 내가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를 판단하는 시간들과 맞닿으며 나의 변화를 추동한다. 기영이 자신에게 말 걸어온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찜찜했던 일을 거부하는 것이나, 길호가 불안한 이들에게서 떨어져 다시금 기영에게 돌아오는 것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의 불안을 회복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대를 도움으로서 내가 회복되는 것, <빅슬립>은 이처럼 인간관계에 내재한 긍정의 끈을 단단하게 붙잡는다.

물론 서로를 통해 서로가 회복되는 스토리가 그리 드물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빅슬립>이 그리는 이야기가 성취한 지점은 이 작품이 인물들이 품은 각자의 아픔을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태도이다. 영화는 기영이 겉으로 뿜어내는 무심함만으로 그의 전사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기영이 몇 사람과 나누는 간단한 대화나 길호의 시선으로 기영의 집에 걸린 사진을 훑는 것만으로 그가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설명된다. 길호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의 아이가 밖에서 잠을 자고 다른 이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보호해야 할 어른이 부재하거나, 있다해도 없는 편이 나은 어른뿐이었을 것이라는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빅슬립>은 그들의 과거를 그저 이쯤에 놓아 둔다. 현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그들의 과거를 파헤치는 것은 결국 지금에 이를 만큼의 아픈 상처를 묘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고통이 재현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비슷한 아픔이나 눈물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바로 그 환상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빅슬립>은 연민의 전시를 단단하게 차단하며 당장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아이에게 내 한편을 내어주는 것을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풀어 놓는다.

 

많은 설명을 하지 않고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두 배우의 호연이 크게 작용한다. 김영성 배우와 최준우 배우를 오가는 팽팽함과 느슨함, 날카로움과 나른함은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예민하게 보여준다. 네가 불쌍하게 생각해야 불쌍한 것이라거나 17살이면 네 인생을 살 수 있으니 방법을 찾으라는 기영의 냉정해 보이는 말들은 툭툭 던지는 김영성 배우의 말투를 통해 따뜻하게 보였지만 결국은 품어주지 않는 말들과는 거리를 둔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불안은 최준의 배우의 온몸으로 발산된다. <빅슬립> 속 두 사람의 삶은, 그리고 치유는 이와 함께 성립한다. 누군가 혼자 있지 않는 것이 낫다는 그 생각, 특별하지 않은 듯하지만 아무런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특별한 생각으로 만드는 것은 굳이 상처를 들추지 않고 그들을 지금의 그대로 보아주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빅슬립>(2023.11.22. 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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