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머니의 세계를 그리려는 다정한 겨울의 SF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어머니의 세계를 그리려는 다정한 겨울의 SF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12.05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희에게> (Moonlit Winter, 2019)
출처-네이버 영화

이제 12월이면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와 함께 생각이 날 또 다른 영화가 있다. 바로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다. 물론 <윤희에게>가 <러브레터>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둘 다 오타루를 배경으로 하고, 아날로그 매체로부터 시작해 기억을 되감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만 <윤희에게>는 홍상수의 영화 세계와 조금 더 닮은 영화다. 이 영화가 목적으로 두른 것이 프루스트나 모디아노처럼 과거의 잔해를 조금씩 발견하며 그것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어서다. 되려 영화의 목적은  그 과거가 지금과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데에 있다. 이 영화에서는 새봄(김소혜)의 꿈을 중심으로 어머니인 윤희(김희애)의 삶을 복원한다. 이 영화는 새봄이 꾸는 꿈과 영화 속 현실을 교란해 그려낸다. 여성을 사랑한 윤희의 서사가 핵심이기는 하나, 그 서사가 어떻게 드러나고 여전히 마음에 잔존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무의식에 파묻힌 기억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영화적 시공간의 공존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몇몇 장면의 반복과 변주로 그들의 여행이 현실인지 소설인지 구분할 수 없게 한다. 중후반에 이를 즈음에는 그 둘이 뒤엉킨 세계에 관객을 초대한다. 하물며 영화는 새봄이 편지를 읽는 장면을 초반부와 후반부에 똑같은 쇼트로 배치해 영화가 앞뒤가 같은 데칼코마니 그림같은 구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영화평론가 김시선이 지적했듯, 감독은 이에 더해 윤희와 새봄이 열차를 탔을 때 그 둘은 정방향과 역방향의 열차를 타고 있다. 이 둘 사이의 엇갈림은 영화를 역방향으로 읽든 정방향으로 읽든 감상이 가능한 것이라는 증거를 마련해준다. 이 영화는 새봄에게서 시작해 윤희로 도착하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 구조다. 나는 이 영화의 낯선 시공간이 홍상수의 영화 속 시공간만큼이나 급진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형식 상으로는 <러브레터>가 아니라 <북촌방향>에 더욱 가까운 영화다. <북촌방향> 속 인물들이 '소설'이라는 술집에 드나들고, 그 술집을 중심으로 다른 시공간에 있던 인물들이 한 영화에서 만나는 꿈같은 순간이 <윤희에게>를 다채로운 영화로 만든다.

<윤희에게>는 막 고3 생활이 끝난 새봄(김소혜)이 "윤희에게..."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낯선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새봄은 그 편지를 기점으로 그녀는 그의 어머니인 윤희(김희애)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고, 그 끝에 쥰(나카무라 요코)가 그녀의 첫사랑이었음을 밝혀낸다. 이는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 구조다. 의문의 편지를 받고 범인을 찾기 시작하는 상황은 탐정소설에서 흔히 쓰인다. 그녀는 남자친구인 경수(성유빈)과 오타루로 가 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서 둘을 만나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탐정영화에서 등장할 법한 긴장감이 없다. 사건을 풀어나가며 생기는 카타르시스를 포기한 이 영화에서 새봄이 윤희의 과거를 만나는 과정은 유머러스하고 시답잖기까지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탐정의 특성이다. 탐정은 탄생할부터 사건 현장에 흩어진 단서들을 꿰어 한 사건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소설가와의 유사하다. 이 영화가 새봄의 탐정놀이, 혹은 소설쓰기는 감독의 힌트로 더 선명해진다. 쥰의 고모가 SF 소설을 같은 장면, 같은 구도로 두 번이나 보여준 것은 이 소설이 SF로 읽히기를 바란다는 신호다. 한 번만 등장한다면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있지만 감독은 <윤희에게>가 두 번씩이나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감독은 SF소설을 빌미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SF적 설정은 이 영화가 세 개의 시간이 한 화면에 겹친다는 설정에서 올 것이다. 

그 근거를 오타루의 달의 기호가 만드는 시공간의 교란으로 볼 수 있다. 새봄은 윤희에게 도착한 쥰의 편지를 읽은 뒤부터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닌다. 어머니의 과거를 주변 사람들을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윤희는 40대의 여자로, 남편과 이혼한 뒤, 공장 급식소에서 일하며 새봄을 혼자 키운다.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될 예정인 새봄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해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는 그 자신의 과거를 알려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녀가 "자신을 외롭게 하기 때문"에 그녀와 이혼했고, 삼촌은 그녀가 학창시절에 인기가 많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 두 개의 정보로 어머니가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는 다 알 수 없다. 새봄은 윤희와 오타루로 여행을 떠나자 제안하고 자신이 여행계획을 잡는다. 그 뒤 경수(성유빈)과 오타루 곳곳에서 쥰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윤희와 새봄이 오타루로 떠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긴 시퀀스가 끝나고 급작스레 화면이 꺼지고 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부터 영화는 달을 고의적으로 비추기 시작한다. 그들이 오타루에 며칠을 오갔든, 상관 없다. 새봄과 윤희, 경수가 오타루로 떠난 순간부터 그들이 며칠간 숙박하는지 관객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셋이 오타루를 오가는 동안 마주하는 달이 달라서다. 하나는 초승달, 하나는 만월, 하나는 상현달이다.

시간은 이때부터 셋으로 갈린다. 첫 번째 시간은 쥰과 료코의 시간이다. 쥰과 료코가 만날 때 뜨는 달은 초승달이다. 료코가 고양이를 맡기로 온 날, 그들은 밖으로 나와 달을 마주보며 말한다. "달이 참 예쁘네요" 그 뒤, 카메라는 3초간 달을 비춘다. 이는 I love you를 달이 참 예쁘네요라 번역했다던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인용하려 만든 장면이지만 내게는 쥰과 료코가 만나는 시간대가 따로 있는 듯 느껴지는 듯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윤희와 새봄의 시간이다. 윤희는 급작스레 여행을 가자는 새봄의 제안에 어찌할 줄 몰라 일본을 헤맨다. 새봄은 오전마다 경수를 만나고 이 둘은 오후마다 도시 어딘가를 돌아다닌다. 그때 한 사람이 달을 비추고 "만월이다!"라 외친다. 그때 카메라는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을 비추고 그것을 몇 초 간 보여준다. 그때, 세 번째 이야기가 끼어든다. 쥰과 고모의 이야기다. 그 장면을 전후로 쥰과 그녀의 고모는 상현달을 본다. 윤희가 만월을 본 뒤 다시 한 번 카메라는 그 둘이 보는 달을 비춰 그들이 같은 시간에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 세 개의 시간이 한 공간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나게끔 만들어 새봄과 윤희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시도한다. 

 

출처-네이버 사진
출처-네이버 사진

왜 새봄은 이 세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을까? <윤희에게>가 새봄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빌려서 쓴 SF소설이라는 가능성이 저변에 있다. 이 의문은 끝까지 쥰과 윤희가 서로에게 편지를 직접 쓰는 장면이 없고, 오로지 편지가 새봄에게만 읽힌다는 점에서 온다. 둘이 서로 편지를 보낼 수 없이 마음을 숨긴 상태라 하더라도 이는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사건을 계속해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새봄을 제외한 서브 캐릭터의 태도는 의혹을 키우기만 한다. 세 가지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새봄 뿐이다. 윤희와 쥰은 새봄이 먼저 움직이고 그 뒤에야 움직인다. 그리고 그들이 끝내 만나는 곳은 오타루 시계탑이다. 이 오타루 시계탑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이 둘은 만나고, 뒷모습으로 걸어다니며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거리를 걷는다. 그때 카메라가 살짝 흔들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왜 이 감독은 세 시공간이 공존하는 꿈을 만들어냈을까? 그 답을 쥰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쥰에게서 기시감을 느낀다. 그녀는 20년 동안 한국에서 한국인 어머니 아래 살아왔고, 20년 동안 일본에서 일본인 아버지 아래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며 살아왔다. 그녀는 정확히 20살에 첫사랑인 윤희를 만난다. 그 즈음 그녀의 부모가 이혼하고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들어온다. 쥰은 윤희를 잊고 살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윤희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녀는 남자를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왜 외톨이로 사느냐는 말을 듣고도 무덤덤하다. 쥰은 동물병원에서 환자로 온 한 여자를 만나, 그녀와 새 만남을 시작한다. 쥰은 20년간 살았고 부모가 이혼할 때 어머니를 택한 새봄의 거울이다. 각각 아버지가 내게 "무관심해 아버지를 택했다"라 말하는 새봄과 "어머니가 조금 더 외로워보였기에 어머니를 택했"다라고 말하는 두 인물이 거울처럼 보이는 순간은 충분히 의심스럽다. 쥰이 가진 윤희의 사진은 새봄이 외삼촌에게서 찍은 증명사진의 구도와 같다. 

몇몇 장면에서 쥰은 새봄이 윤희에게 들은 듯한 말을 고모에게 듣는다. 여기에다가 새봄이 초반부에 윤희가 펼치던 앨범사진을 펼치는 씬에서 나왔을 사진들이 영화에 반복해 등장한다. 눈이 오기를 바라는 새봄과 눈이 그만 오길 바라는 고모의 모습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러한 장면이 반복되면서 쥰이 새봄이 자신이 택하지 않은 길을 상상해 만든 인물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또한 그 서사를 발굴하고 이해해줄 사람이 후세대인 새봄이라는 것도 넌지시 암시된다. <윤희에게>는 이처럼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는 매개로, 인간의 결핍된 과거를 메울 수 있는 매개체로 만든다. 새봄은 오타루라는 꿈의 시공간에서 엄마와의 어떤 것을 해결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윤희는 혼자 어떤 술집에 가 말을 털어놓는다. "친구를 만났는데, 산책하고 같이 거리를 걷고 했다."고. 이 장면이 윤희와 쥰이 만나기 전에 나온 것은 어딘가 의아한 점을 불러일으킨다. 윤희가 그 전까지 같이 산책하고, 거리를 걷고 사진을 찍은 것은 새봄이다. 리폼하는 것이 취미인 그의 남자친구인 경수처럼 그녀는 어머니가 물려준 사진기를 고쳐 쓰는 중이며, 그것에는 새봄 본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것"만 담길 권리가 있다. 사물들의 사진들만 찍어온 그녀는 자신의 프레임에 사람을 두지 않으려한다. 그 프레임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윤희다. 새봄이 윤희를 카메라로 찍은 뒤부터 새봄의 프레임에 사람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녀가 윤희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둘 사이의 연대가 생기자 오타루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한다. 끝내 그들이 오타루에서 돌아왔을 때, 오타루를 찍어둔 사진에 쥰의 사진은 없다. 새봄과 윤희, 경수의 사진만 그곳에 있을 뿐이다. 새봄이 윤희와 쥰을 만나게 해 해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갈등하던 그 자신의 과거이자, 미처 헤아리지 못한 어머니의 과거일 것이다. 

아버지를 택했을 수도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쥰이라면, 그 당시 어머니에게 투정부렸을 자신을 참회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가진 앙금을 풀 때에야 둘은 윤희와의 화해로 새 봄이 오리라는 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봄과 윤희의 갈등은 새봄의 꿈으로 드러난다. 쥰과 윤희가 만나면서부터 새봄은 어머니와의 연대감을 갖는다. 새봄의 꿈에서 윤희는 지금껏 딸에게 말하지 못한 과거를 보상받는다. 쥰과 윤희의 만남은 동시에 "정신병원에 가야했"고, "내가 누구인지 상대방에게 밝히지 못한" 과거를 새봄이 마주보고 보듬은 과정이기도 한다. 새봄은 이 과정으로 끝내 윤희의 잃어버린 과거이면서 미래를 그녀에게 돌려주려한다. 이는 새봄이 자신의 어머니인 윤희를 보듬고, 그녀가 새로운 음식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새로운 꿈을 주는 과정이다. 영화의 말미에 윤희는 나레이션으로 "추신. 자주 네 꿈을 꿔."라 덧붙인다. 어쩌면 쥰과 윤희의 서사가 소설로 쓰임으로 이제는 둘에게도 새 봄이 시작되지 않을까.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