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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노무현이 던진 명패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노무현이 던진 명패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3.12.2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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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깨어있는 시민의 도덕적 판단과 실천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독일에서는 진보를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로 부르고, 미국에서는 ‘리버럴’(liberal)이라고 부른다. 둘은 같은 이념을 지향하는가? 리버럴은 ‘자유적’이라는 뜻인데, 자유 지향적인 이 사람들을, 평등에 방점을 두는 진보로 불러도 되는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헷갈리기도 할 것이다. ‘독일제’(made-in Germany) 경제학자’로서 ‘미제’(made-in U.S.A) 제도경제학’을 공부하는 나 역시 그 차이를 아직 명쾌히 정리해 내지 못하고 있다.

 

제 5 공화국 청문회에서 책임 회피로 일관하는 전두환의 단상을 향해 명패를 집어 던지며 격렬히 항의하는 노무현
제 5 공화국 청문회에서 책임 회피로 일관하는 전두환의 단상을 향해 명패를 집어 던지며 격렬히 항의하는 노무현

 

사민주의와 리버럴은 둘 다 진보적이다

먼저, 경제학파로만 정리해 보면 유럽의 사민주의는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전통을 잇고 있고, 미국의 리버럴은 베블런에 젖줄을 대고 있는 것 같다. 사민주의의 경제학은 ‘(포스트)케인지언경제학’이며, 리버럴의 경제학은 ‘제도주의경제학’이다. 미국 리버럴은 케인스와도 협력 중이다. 이는 ‘노동문제’와 ‘불평등해소’가 둘의 공통과제임을 말해 준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리버럴은 전통적인 의미의 진보진영에 속한다. 총체적으로 보면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미국의 리버럴을 독일의 사민주의와 다르게, 괜히 자유만 강조하는 보수주의로 오해하면 안 된다.

더욱이 미국도 독일 못지않게 찬란한 진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 제도경제학의 창시자 베블런이 명저 『유한계급론』(1899)을 저술했을 때는 이른바 ‘도금시대(Gilded Age)였다. 부패한 공직자와 독점기업이 사치와 낭비로 미국을 불평등과 속물들의 사회로 망가뜨리고 있던 시대다. 이 시대는 미국 역사상 사회운동 및 정치개혁의 열망이 들끓었던 ‘진보의 시대’(Progressive Era, 1890년대~1920년대)이기도 했다. 진보운동은 부패한 공직자를 끌어내려 직접민주주의를 성취하고자 했고, 독점금지법을 통해 거대재벌의 독점행위를 규제하려고 했다. 진보의 시대는 미국경제학사에서 제도경제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진보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게 리버럴의 본류다. 미국을 그저 ‘코카콜라와 햄버거의 문화’로만 폄하하면 오산이다. 독일의 사민주의만큼 미국의 리버럴은 훌륭한 진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둘은 이처럼 진보적 방향에서만 같지 않다. 자연과학적 기반도 같다. 이러한 공통점은 중요한 결론으로 이끈다. 이를테면, 둘의 자연과학적 기반은 진화생물학인데, 이는 주류경제학이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자신의 자연과학적 기반으로 삼는 것과 대조적이다. 다윈의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자연은 진화(evolution)할 뿐 진보(progress)하지 않는다. 반면 만유인력법칙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우주는 기계적으로 작동하면서 조화와 균형상태를 유지한다. 궁극적으로 시장은 자연법칙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시장이 맹목적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사민주의와 리버럴 둘 다의 입장에선 누군가가 이 불완전한 시장을 통제하고 관리해 좋은 곳으로 진보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주류경제학의 경우 누군가가 나서 굳이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유인력법칙으로 시장을 이해하니 후자는 자유방임주의를 경제사상으로 신봉하지만, 진화론을 자연과학적 기반으로 삼는 전자는 시장에 대한 어떤 행위자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할 것이다. 자유방임주의에 맞서 개입주의를 강력히 옹호하는 점에서도 둘은 공통점을 갖는다.

 

사민주의의 노동자, 리버럴의 시민

사민주의와 리버럴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주요 주체로 국가를 전면에 내세운다. 둘 다 ‘큰 정부’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국가 혼자서 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다. 누구와의 협력, 곧 협치가 필요한데, 여기서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민주의는 ‘노동자’를, 리버럴은 ‘시민’을 파트너로 삼는다.

왜 파트너가 달라지는가? 각자가 보는 인간의 ‘본성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경제학의 출발점은 인문학이란 사실이 확인된다. 케인지언경제학은 인간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자로 보는 쪽에 가깝다. ‘사회’에 관심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기주의자와 개인주의자는 통상 ‘공리주의자’이기도 하다. 개인의 성공과 이익에 올인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물론 노동자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니 협치파트너인 노동자는 공익과 공동선, 곧 사회정의와 도덕에 그리 큰 관심을 갖지 못한다. 도덕은 국가의 몫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회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는 데 있어, 사민주의적 노동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진보적 정부가 힘이 딸릴 때나 정부가 실패할 때, 노동자들은 의무를 다하거나 헌신하기보다 권리를 주장하거나 분배를 요구하는 수가 허다하다. 하지만 베블런에서 출발하는 미국의 제도경제학은 인간의 본성을 ‘다중적으로’ 이해한다. 곧, 우리 종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공리주의적일 뿐 아니라 이타적이며 사회적이며 도덕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과학인 인지심리학, 뇌과학, 신경생물학이 밝혀낸 진실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본성도 다중적이며, 공장과 사무실을 나서면 노동자는 ‘사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시민’이다!

공적공간에서 활동하는 시민이 반드시 반사회적이며 공리주의적일 수만은 없다. ‘시민으로서 노동자’는 공동체의 공익과 공동선, 그리고 사회정의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그게 시민인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염려하고 헌신하는 이 ‘시민정신’은 수십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모든 시민의 본성에 선택되어 있다.

​제도경제학은 ‘케인지언 민주정부의 경제학’을 넘어, 마이클 샌델이 언급한 ‘시민정신의 정치경제학’이다. 제도경제학에서는 경제에 대한 시민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와 통제를 주장한다. 시민들은 이사야 벌린이 언급한 '적극적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제도경제학에서 행위자는 노동자도 정부도 아닌 적극적으로 자유를 행사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이다. 이게 바로 미국의 ‘리버럴리스트’들이다! 나는 이들을 ‘진정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노무현을 떠올려 보라.

 

까칠한 이타주의자, 곧 정의로운 호혜주의자가 필요하다

내가 보기에 『도덕경제학』(새뮤얼 보울스 지음, 박용진, 전용범, 최정규 옮김, 2020, 흐름출판)은 이런 ‘시민정신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론적, 방법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책이다. 새무얼 보울스는 전 미국 매사추세츠 에머스트대학의 교수로 경제학을 게임이론과 이타주의적 관점으로부터 구축한 저명한 경제학자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적 선호’, 곧 이타주의적 본성과 행동이 ‘좋은 경제’에 얼마나 기여하며, 주류경제학의 ‘경제주의’와 ‘인센티브’제도가 시민들의 훌륭한 본성을 파괴해, 사회와 경제를 나쁜 방향으로 몰아가는 점을 수많은 실험과 자연과학적 연구성과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경제에서 도덕은 중요하고,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경제적 인센티브제도는 시민들의 선한 덕성을 몰아낸다”(‘crowding out’).

 

『도덕경제학』(새뮤얼 보울스 지음, 박용진, 전용범, 최정규 옮김, 2020, 흐름출판)
『도덕경제학』(새뮤얼 보울스 지음, 박용진, 전용범, 최정규 옮김, 2020, 흐름출판)

세상은 대충 ‘사악한’ 이기주의자, ‘사람 좋기만 한’ 이타주의자, ‘까칠하고 정의로운’ 호혜주의자로 뒤섞여 있다. 새무얼 보울스를 비롯한 많은 게임이론가들이 공공재실험을 실행해 보았다. 공공재 실험이란 특정 실험 조건아래서 구성원들이 공공재 공급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알아보는 게임이다. 실험결과는 이랬다. 예상한 것처럼 이타주의자들은 공공재에 많이 기여했다.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기주의자인 무임승차자들은 공공재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착취하기만 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 그런데도 이타주의자들은 이들의 무책임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 중 아무도 분연히 나서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던 것이다. ‘애고, 난 모르겠다. 내 일만 할 뿐이다. 하늘이 알겠지.’ 분위기가 이러니 호혜주의자들도 나서지 않는다. ‘좋은 게 좋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

이기적 행위자, 이타적 행위자, 호혜적 행위자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이처럼 호혜주의자들이 무관심하거나 이타적으로 되면, 무임승차자들에 대한 처벌의지가 전체적으로 감소한다. 정의가 메말라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이타주의자들이 기여한 공공재의 양은 호혜주의자의 이런 유화적 태도로 줄어든 공공재 공급 규모로 상쇄된다. 총체적으로 공공재 공급량은 줄어 버렸다.

뿔이 난 채로 호혜주의자가 퇴장해 버린 상황도 실험해 보았다. 선하기만 한 이타주의자들과 기회주의적인 악한 이기주의자들만 시장에 남게 된 것이다.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선과 악이 대립하는 이 시장에서 공공재는 급감하고 말았다. 선한 개인과 악한 개인이 대결하면 악이 선을 이긴다. 물론 그 결과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사회는 공공재, 곧 공익과 공동선으로 비로소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이런 죄수들의 딜레마에 항상 빠지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정의로운 호혜자가 항상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글에 정의로운 호혜주의자들이 추가되자 공공재의 공급은 증가하였다. 호혜주의자의 추상같은 정의가 뒷받침되자 이타주의자의 헌신은 물거품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호혜주의자가 공공재공급에 반대하지 않는다. 이타주의자와 협력해 그는 더 많은 공공재를 공급하고자 했다. 선과 의는 이처럼 강력한 보완관계를 갖는다.

세 부류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좋은 삶(공공재의 공급, 공동선의 제도)을 이룩하려면, 선한 이타주의자뿐 아니라 정의로운 호혜적 행위자, 곧 ‘까칠한’ 이타주의자의 존재가 반드시 요청된다. 우리 사회의 좋은 삶을 위해 깨어있는 시민이 얼마나 요청되는지를 알 수 있는 실험이다.결국, 사악한 이기주의자, 정의로운 호혜주의자, 선한 이타주의자가 공존하는 시장에서 진보와 좋은 삶을 위해, ‘깨어있는 시민’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유럽의 사민주의와 미국의 리버럴은 둘 다 진보주의다. 그러나 전자는 ‘민주국가’를 행위자로 내세우면서 거기에 도덕적 의무를 전담시키는 반면, 후자는 ‘깨어있는 시민’을 내세우면서, 공동선과 공익을 위한 이들의 ‘적극적 자유’의 행사를 기대하며 촉구한다. 시민들의 도덕적 의무에 기대를 거는 ‘도덕경제학’! 독일제 경제학박사가 미국산 제도경제학에 큰 관심을 갖는 이유다.

요즘, 대한민국 진보진영, 특히 민주당이 도덕적 멍에를 벗어던지지 못해 발악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그리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토록 스스로의 타락을 자초하는지 모르겠다. 노무현이 살아 있었더라면 명패를 던졌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이자 리버럴리스트로서 그는 항상 도덕적 가치에 충실했다.

 

 


글 · 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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