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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순정파 소녀와 팜므 파탈, 두 얼굴의 김혜수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순정파 소녀와 팜므 파탈, 두 얼굴의 김혜수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02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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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배우 김혜수의 영화 발자취를 다양한 작품 중심으로 정리했다. 이달에는 김혜수의 상반된 이미지와 역할이 두드러진 작품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청룡영화상이 끝난 지 한참 지나기는 했지만, 이왕 시작한 글이니 마저 마무리하기로 한다.)

 

1. 해맑고 풋풋한 열아홉 살 여대생

김혜수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 섹시미를 앞세운 글래머스타로 자리 잡았다. 중년 이상의 대중들에게는 김혜수의 20대 중반 이후 ‘건강미인’ 이미지가 익숙하다. 데뷔작 <깜보>(1986) 혹은 <그 마지막 겨울>(1988)을 기억한다면, 김혜수의 이러한 이미지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김혜수는 초기 영화에서는 순수한 마음씨를 지닌 캐릭터, 가난하지만 순박한 여성, 순애보의 주인공과 같은 고전적인 역할을 더 많이 소화했다.

김혜수의 초기 대표작은 <첫사랑>(1993)이다. <첫사랑>은 주인공 영신으로 출연한 김혜수의 청순한 소녀 이미지가 스크린을 꽉 채운 작품이다. 영신은 짝사랑으로 끝난 첫사랑을 하는 열아홉 살 대학 신입생이다. 미대생이자 연극반원인 영신은 30대 초반의 연극지도 선생님을 사모한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만 한다. 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혼자 간직하는 풋풋한 여대생이다.

<첫사랑>은 이명세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과 김혜수의 깜찍하고 발랄한 연기가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이다. 한 폭의 동양화 혹은 서정시 같은 화면과 김혜수의 산뜻한 이미지가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김혜수는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처음 수상했다.

<첫사랑>의 김혜수는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을 연상시킨다. 단정하게 손질한 단발머리, 인형처럼 커다란 눈, 희고 깨끗한 피부, 발그레한 뺨이 주는 이미지는 초여름의 햇살처럼 맑고 청순하다. 영신은 어찌 보면 동화적인 캐릭터이다. 영화의 첫 장면인 시골 기차역 대합실 시퀀스를 보자. 영신은 연출가를 섭외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구두에 내려앉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고, 깔고 앉았던 손수건을 다시 곱게 접는다. 그러면서도 낮술에 취해 줄담배나 피워대는 연출가 강 선생에게 매혹된다. 멋들어지게 시를 읊고, 현실에 초탈한 듯한 강 선생이 낭만적이라고 느낀다.

 

'첫사랑'의 김혜수.
'첫사랑'의 김혜수.
'첫사랑'의 김혜수.
'첫사랑'의 김혜수.
'첫사랑'의 김혜수.
'첫사랑'의 김혜수.

 

영신은 강 선생에 대한 짝사랑으로 끙끙 앓는다. 강 선생이 묵고 있는 집의 담장 너머로 방을 훔쳐보다가 들켜서 마구 도망가고, 장독대에서 고추장을 푸다가 대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강 선생으로 착각해 뛰쳐나가고, 방에서 몰래 초상화를 그리고, 지갑을 잃어버린 척하며 강 선생만 남아 있는 연극 연습장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영신의 에피소드는 소박하고, 김혜수의 연기는 귀엽고 깜찍해서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영신이 강 선생에게 연애편지를 쓰고, 음악다방에서 혼자 기다리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강 선생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영신은 “우표가 떨어진 것은 아니겠지?”, “잉크가 번져서 우체부가 주소를 잘못 안 것은 아니겠지?”와 같은 순백의 독백을 쏟아낸다. 이 장면에서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소개된다. 바람맞은 영신은 기어이 음악다방을 나와서 강 선생의 집까지 뛰어간다. 어두운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서 기다리고, 강 선생이 취해서 귀가하는 모습을 보고 울먹거리고, 강 선생이 다가와 “미안하다.”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주자마자 어린애처럼 엉엉 운다. 곧이어 벤치에서 살짝 입맞춤하는데, 이때 김혜수는 인형처럼 눈을 깜박거리면서 엉뚱하게도 주기도문을 외운다.

물론 영신과 강 선생의 입맞춤이 사랑으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강 선생은 곧바로 부친의 환갑잔치 때문에 서울로 떠나고, 영신은 또다시 마음 졸이며 돌아올 날만 기다린다. 영신은 강 선생이 떠난 시간까지 초 단위까지 계산한다. “25시간 31분 41초” 하는 식이다. 결국 영신은 강 선생의 서울 집까지 찾아간다. 하지만 아이를 안고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는 뒤돌아서 나온다.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대문 밖에서 비를 맞고 서 있다가 엄마를 보고는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김혜수는 <첫사랑>에서 첫사랑에 빠진 열아홉 살 소녀의 감정을 매우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기뻐서 환하게 웃고, 슬퍼서 엉엉 울고, 속상해서 애태우는 김혜수의 이미지는 만화적인 화면과 조화를 이루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첫사랑>은 청순, 발랄, 깜찍, 순수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한 김혜수를 만날 수 있는 드문 영화이다.

 

2. 육체의 관능미 그리고 팜므 파탈

김혜수의 팜므 파탈 이미지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김혜수는 패션잡지 화보나 시상식처럼 작품 외적인 활동을 통해서 팜므 파탈 이미지를 구축했다. 김혜수의 이미지 전략이 대중에게 수용된 배경에는 시대 흐름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1990년대에는 독재정권의 붕괴와 함께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면 젊고 새로운 문화계층인 X세대가 등장했으며, 여성이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해졌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건강한 섹시미녀’는 김혜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김혜수는 작품 외적인 활동을 통해 섹시미를 발산했지만, 관능미가 표현된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혜수의 섹시미가 두드러지진 대표적인 영화로는 <얼굴 없는 미녀>(2004)와 <타짜>(2006)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영화에서 김혜수는 전라 베드신과 같은 과감한 노출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김혜수가 연기한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팜므 파탈의 성격을 갖고 있다.

김혜수가 영화에서 팜므 파탈 이미지의 진수를 선보인 작품은 <타짜>이다. <타짜>는 김혜수의 최고 매력으로 손꼽히는 섹슈얼리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즉 김혜수의 관능적인 이미지가 영화의 선정성을 대폭 강화한다. 김혜수의 섹슈얼리티는 팜므 파탈인 정 마담을 통해 표현된다. 김혜수의 팜므 파탈 이미지는 페티시즘을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페티시즘의 대상은 얼굴, 다리, 가슴과 같은 신체뿐만 아니라 액세서리, 의상, 구두 등도 포함된다. 느와르 영화의 클리셰인 팜므 파탈의 긴 손톱과 담배 연기도 전형적인 페티시즘의 대체물이다. 이 페티시즘의 대체물은 내러티브와 관계없이 그것 자체로 시각적인 쾌락을 제공한다.

 

'타짜'의 김혜수.
'타짜'의 김혜수.
'타짜'의 김혜수.
'타짜'의 김혜수.
'타짜'의 김혜수.
'타짜'의 김혜수.

 

<타짜>에서 정 마담은 팜므 파탈로서 다양한 관능미를 발산한다. 남자 주인공 고니와의 섹스 장면에서는 정 마담의 등, 가슴, 전신 뒷모습이 차례로 노출된다. 이 장면의 노출 수위는 2000년대 다른 한국영화와 비교해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김혜수가 평소 보여준 섹시미, 관능미, 팜므 파탈 이미지로 인해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정 마담은 느와르 영화의 팜므 파탈과는 다르다. 남성 등장인물이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정 마담의 노출은 고니의 시선과는 상관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정 마담이 뛰어난 사업가라는 점이다. 그녀는 고니의 스승인 평 경장을 대체할 타짜를 포섭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사용한다.

<타짜>에서 김혜수는 스무 차례 이상 옷을 갈아입는다. 가는 끈만 달리거나 민소매인 원피스 차림이 많다. 색상은 파랑, 빨강, 보라색처럼 원색적이며 프린트 역시 화려하다. 정 마담의 관능미가 페티시즘으로도 표현되는 장면은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칠하는 모습에서 처음 등장한다. 붉은 입술과 손톱은 줄곧 정 마담의 상징이 된다. 책상에 앉아서 흔들고 있는 다리 혹은 귀고리를 오래 비추는 카메라는 여성 신체의 물신화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레이션을 하는 김혜수의 화장 짙은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타짜>의 정 마담은 1940, 50년대 할리우드 느와르 영화의 팜므 파탈과 다른 점이 많다.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남성 등장인물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도박판 설계자로서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중심인물이다. 김혜수가 연기한 정 마담은 ‘보여지는 자’가 아니라 ‘설계하는 자’이다. 또한 경찰에 연행되어 가면서도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말할 만큼 자부심이 강하고 엘리트 의식도 갖고 있다. 수동적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팜므 파탈인 것이다.

대중스타의 이미지는 그/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배역과 작품 외적인 활동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된다. 즉 모든 배우는 영화의 캐릭터로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영화 속 배역과 구분되는 존재이다. 스크린에는 등장인물로서의 배우와 배우의 개인적인 이미지가 함께 투사된다. 스타 배우의 개인 이미지는 홍보, 마케팅 활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스타성은 영화에서의 배역 외에 신문, 잡지, TV, 광고 등 광범위한 미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타짜>는 김혜수의 개인적인 이미지와 영화의 배역이 가장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경우이다. 김혜수의 팜므 파탈 이미지는 영화의 배역보다 잡지, TV, 신문과 같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형성됐다. 당당하고 도발적인 패션잡지 화보, 파격적인 드레스 등으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런 점에서 <타짜>는 김혜수의 팜므 파탈 이미지와 섹슈얼리티가 유감없이 구사된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혜수가 각종 미디어를 활용해서 쌓아온 건강한 섹시미인의 이미지를 스크린에서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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