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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유서를 쓰기 전에 먹는 라면' 끓이는 법
프롤로그: '유서를 쓰기 전에 먹는 라면' 끓이는 법
  • 안치용
  • 승인 2024.01.02 0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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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1

 

사람은 죽는다. 자연사, 사고사, 그리고 자살. 아마 거의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살을 행하는 생명종일 것이다. 가장 고등한 지적 생명체인 인간이 생명을 종료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자살은 인간성의 고유한 지표로 거론된다.

학문적 담론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한 자살에 관한 긍정적 묘사는 대체로 금기에 속한다. 그러나 사회를 위해선 이 금기가 필요하지만 때로 삶에서 전혀 활로를 찾지 못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에게도 무조건 살아내야 한다고 윽박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당신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해라. 그렇게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져. 고맙다. 옆에 있어 줘서

배우 이선균의 죽음과 함께 그가 주연한 2018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사들이 다시 주목받으며 추모 등 다양한 맥락에서 인용되고 있다. 이 대사가 그 중 특별히 많이 인용된다. 우선 고 이선균의 명복을 빈다.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죽고 싶을 만큼 힘든 누군가에게 이런 설득이 가능한 맥락은 그에게 당신 괜찮은 사람이라고 응원해주고 옆에 있어 주는 어떤 사람이 있어서이다. 반대로 죽고 싶은 와중에 모두가 욕을 하며 등을 돌리고, 친하게 굴던 사람이 모두 떠나 옆에 응원하는 사람 하나 없을 때 살아갈 힘을 내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너무나 절실하게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라고 말해줄 단 한 사람이 옆에 보이지 않을 때 스스로 거울을 보며 파이팅을 외치기는 매우 어렵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고3 시절 나는 자살했다. 자살했으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유령이어야 하기에 정확하게는 자살을 시도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3짜리가 정리할 게 많지는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 일기장 등 그때까지 살아오며 남긴 다양한 끄적거림 뭉치를 전달하고는 결행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 정확한 의학지식이 없어서 치사량에 못 미치는 양을 섭취한 탓에 곧 삶에 복귀하였다.

자살을 시도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3이라 학교공부가 힘들었다거나 입시 스트레스에 짓눌려서 그랬던 건 아니다. 남달리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던 그때 갑자기 생이라는 게 살아내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한번 뇌리에 들어와 똬리를 튼 이후 계속 커지다가 마침내 행동으로 폭발한 듯하다. 그런 충동을 막아낼 만큼 전두엽이 충분히 성장하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그때의 유서를 떠올려보면 매우 막연한 삶에 대한 회의나 실존적 좌절이 들어 있었다. 삶이 실제로 힘들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 유서가 그렇게 막연하고 추상적일 수밖에. 견딜 수 없이 힘든 삶의 고통은 절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소설 중에서 자살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다. 젊은 괴테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작품으로 독일어 원제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Leiden’을 슬픔으로 번역했다. ‘Leiden’은 슬픔보다는 고뇌, 고통, 번민이란 의미에 가까우며 그 자체로 죽음이란 뜻을 포함한다. 베르테르가 처한 상태는 슬픔보다는 확실히 고통이었다. 베르테르가 겪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감안할 때 한국어 책 제목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지만, 이미 굳어진 제목이어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소설 주인공 젊은 베르테르가 못 이룬 사랑으로 소설 속에서 자살한 후 그의 죽음을 모방한 자살이 현실에서 줄을 이었다. 당시 베르테르 열병(Werther-Fieber)’라 불린 현상이다. 그때 모방자살한 사람이 20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열병의 강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74년에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이 현상에 주목해 유명인이 자살하고 나서 모방자살이 확산하는 사회현상에 베르테르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베르테르를 따라서 죽은 사람들의 모든 자살 동기가 지금은 간단하게 정리된 베르테르 열병때문이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열병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의 고통(Leiden)이 베르테르의 고통보다 덜한 것이었으리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소설에 공감해 단지 열병때문에 자살했다면 구체적 고통이 아니라 내가 고3에 시도하였듯 다분히 추상적인 염세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소설 대 현실의 비교라서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지만 그래도 해보면 그렇게 결론이 나지 않을까. 물론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고통의 무게를 재고, 말하자면 타당한 죽음인지를 논하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무례한 일이 될 수 있다. 모든 삶이 존중받아야 하듯 죽음 또한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죽음보다 삶이 더 소중하고 더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정말로 절실한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삶을 인위적으로 중단하기에 타당한 명분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전술한 고3 시절 자살의 기억은 내 인생의 대표 치기로 남아있다. 치기 속에 당시 나의 기준으로 나름 진지한 성찰이 있긴 했다. 문제는 유치찬란한 내 유서에 고통(Leiden)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고통 없는 성찰이 장식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긴 세월이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도래했다.

그 뒤로 이날까지 나는 자살을 시도한 적이 없다. 주변에서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는 건 몇몇 사례를 보았다. 드라마 대사처럼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죽지 마라고 손을 잡아주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로 숨 쉬는 쪽을 선택한다. 하지만 정말 길이 안 보이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한다. 또는 죽음만이 현실적으로 유일한 해법일 수도 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않고 가족 지인 등과 어울려 살아가기에 자신의 호흡만을 기준으로 고통의 타개책을 단독으로 찾아내지 않는다.

내 판단에도 참으로 그 길밖에 없을 때 무조건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라고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반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이후로 나는 유서를 쓰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인생이 술술 잘 풀린 건 아니다. 적어도 외통수에 걸리지는 않았다. 만일 외통수에 걸려 그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유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라면 그런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유서를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얹는다.

유서가 쓰고 싶을 때를 대비한 내 행동매뉴얼이다. 매뉴얼에 많은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다. “화가 나면 속으로 10까지 세고 말하라같은 게 어릴 땐 있었으나 지금은 꼭 필요한 것만 있다. 화 중에는 즉시 터뜨려야 하는 종류가 있어서 무조건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이 든 이후에 빠졌다. 그렇게 하나둘 빠지다 보니 정말 필요한 것만 남았는데 예컨대 유서를 쓰기 전에 라면물 얹기 같은 성격의 매뉴얼이다.

가족력으로 당뇨병을 물려받은 나로서는 라면물을 얹는 데에 큰 결단이 전제된다. 원래 라면과 같은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다가 나이 들어 당뇨 판정을 받고 멀리하는 상황이어서 라면물을 얹는 건 나름의 중대결심에 해당한다. 가끔 내가 야밤에 몰래 라면을 끓여 먹음으로써 어쩌면 유서 쓰고 싶은 마음을 원천 차단하는 효과를 거둔 건 아니었을까.

남한테도 똑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유서를 쓰고 싶으면 라면물을 얹으라고.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려는 게 아니다. 어차피 쓸 유서라면 라면 한 그릇 끓여 먹고 쓴다고 달라질 건 없지 않은가.

단 사발면이 아닌 봉지라면을 제대로 끓여 먹어야 한다. 파가 있으면 꼭 넣고 계란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나는 간 마늘이 있으면 반드시 한 숟가락 정도 투척한다. 그리고 반드시 김치를 꺼내 곁들일 것. 유서를 쓰기 전에 먹는 라면은 생애 마지막 라면이 될 수 있는 만큼 김치를 빼고 대충 먹는 건 곤란하다.

라면을 먹고 난 다음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나로서도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장은 유서가 쓰고 싶을 때 라면물부터 올리고 볼 일이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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