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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진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이지 않는 몸'으로서 영화의 지속에 대하여 -1부-
[김윤진의 시네마 크리티크] '보이지 않는 몸'으로서 영화의 지속에 대하여 -1부-
  • 김윤진(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22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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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1월 22일(월)과 2월 26일(월)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영화가 다른 예술 형식과 갖는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갖는다는 점일 테다. 회화나 조각이 전시되기 위해서 그것의 ‘크기(size)’를 수용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이 필요한 것에 반해, 영화는 상영되기 위해서 그것의 ‘지속(duration)’을 보장할 수 있는 상영 조건이 필요하다. 즉, 회화나 조각이 공간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예술 형식이라고 한다면, 영화는 시간에 기대어 전개되는 예술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회화나 조각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몸을 가지며, 신체의 물질성을 통해 관객에게 목격되고 지각된다. 그에 반해, 우리는 영화의 몸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영화의 몸을 정의해 본다면, 그것은 필름 롤 또는 디지털 파일이라기보다는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의 지속으로 정의될 수 있을 테다. 하나의 영화가 ‘미터, 인치’와 같은 물질의 척도가 아닌, ‘시간, 분, 초’와 같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된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말이다.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에는 영화의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이 표시되어 있다. (사진 출처: 메가박스 모바일 페이지)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에는 영화의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이 표시되어 있다. (사진 출처: 메가박스 모바일 페이지) *사진의 영화는 본 글의 내용과 무관함.

 일정 길이의 시간에 대한 보장을 반드시 요구하는 영화의 속성은 필름 시대에 비하여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필름 시대의 영화가 (상영되기 위해서) 영화관이라는 특정한 조건을 필수적으로 요청했던 것에 반해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재생되기 위해서) 별다른 조건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화는 문자 그대로 어디서든 재생될 수 있다. 영화는 누군가의 방에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카페나 식당에서, 거리나 공원에서 재생된다. 온라인의 개방성과 향상된 접근성은 오늘날 영화가 동시대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주요한 지점이었고, 더욱 많은 이들이 더욱 자주 영화를 보게 됨에 따라 영화 보는 일은 일상적인 활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영화는 한 가지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고유한 속성인 지속 기간에 대한 문제로, 모든 영화가 시간적 길이를 (그것도 상당히 긴 길이를) 가진다는 사실은 언제 어디서든 영화를 재생하려는 동시대 관객의 시도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처럼 영화의 지속이 관객에게 장벽으로 기능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필름 시대에서는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으로, 과거에는 영화관이 적어도 상영 시간 동안만큼은 영화의 지속에 대한 절대적 보증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관은 빛과 소음을 차단해 영화가 스크린에 영사될 수 있는, 따라서 영화가 관객에게 목격될(지각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인 동시에, 영화의 지속에 대한 다른 어떤 개입도 차단하는 장치였다. 영화관에서 일단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 영화가 스스로 끝났음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영화의 지속을 중단할 수 없었다. 빛과 소음, 그리고 관객의 움직임조차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고 난 뒤에야, 즉 ‘The End’라는 자막이 등장하거나 엔딩 크레딧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허락되었다. 영화의 지속을 견디지 못하는 관객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지속되었는데, 이 경우에 가능한 방법은 관객이 몸을 숙여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영화관을 벗어나는 방법뿐이었다. 따라서 영화관은 관객을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영화를 위한, 즉 영화의 지속을 위한 장소였던 셈이다.

 

 영화관에는 있고, OTT에는 없는 것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서 영사라는 절차를 거쳐야만 했던 필름 영화는, 따라서 (거대한) 스크린과 (완전한) 어둠, 그리고 영사기라는 특정한 조건과 장치를 (반드시) 필요로 했다. 오늘날 제약으로 여겨질 법한 이러한 조건은 사실 처음부터 제약으로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의 영화관은 새로운 경험으로 인식되었다. 팝콘과 음료를 한가득 품에 안고, 어둠이 반쯤 깔린 영화관에 입장하는 일은 그야말로 신나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영화관에 입장한 관객들은 빨간 의자에 앉아, 저마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곧이어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무엇을 기대하곤 했다. 따라서 상영관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영화는 ‘도래할 미래’였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질 영화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따라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미래의 펼쳐짐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곧이어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에 이르면 관객들은 도래할 미래가 눈앞에서 ‘현재의 실현’으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과거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단지 새로운 예술 형식의 경험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래할 미래’를 ‘현재의 실현’으로 경험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가시화된 시간의 흐름(전환)을 눈앞에서 목격한다는 점에서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미래의’ 것이 ‘현재의’ 것으로 전환되는 이러한 마법과 같은 순간에 어떠한 모순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시제(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객석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관객에게 상영 직전의 영화는 ‘미래’ 것(도래할 미래)이다. 곧이어 영화가 시작되고 미래가 현실로(현재에) 경험되는 순간, 영화는 관객에게 ‘현재’ 것(현재의 실현)이 되며, 동시에 그것은 ‘미래였던’ 것이 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상영관을 나서는 관객에게 영화는 더 이상 ‘현재’ 것이 아니다. 상영관을 나오면서 영화의 현재와 관객의 현재는 분리되고, 영화와 관객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따라서 (상영관을 나온 관객에게) 영화는 ‘미래였던’ 것으로 남겨진다. 

 관객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가는 영화관 에서 관객은 영화를 ‘미래의’ 것에서 ‘현재의’ 것으로, 다시 ‘현재의’ 것에서 ‘미래였던’ 것으로 경험한다. 따라서 관객이 영화를 자신의 현재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지속과 관객의 시간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영화관이라는 절대적 보증인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관 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보기의 경험을 통해 시제(tense)의 전환을 경험한다. 그것은 상영관에 입장하기 전까지는 ‘미래’ 것이었던 영화가, 상영관을 나온 뒤에는 ‘미래였던’ 것이 되는 경험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영화는 ‘미래’라는 속성을 잃지 않는데, 이는 영화가 하나의 시점에 고정된 단일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갖는 이미지의 연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영화가 ‘펼쳐’ 상태로서 한순간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펼쳐’ 것으로서 존재하는, 즉 시작되는 순간부터 종료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는 여전히 미래지만(is), 상영관을 나온 관객에게 그들이 본 영화는 미래였다고(was)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일이 그토록 우리에게 놀라움과 새로움으로 가득한 경험이었던 근본적인 이유일 테다. 

 이처럼 영화관 에서 관객은 미래인 영화를 자신의 현재로 취하는 경험을 하게(현재 시제로 경험하게) 되고, 영화가 끝난 뒤 상영관을 나온 관객은 미래인 영화를 과거 시제로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미래인 영화가 미래 시제로 경험되는 순간은, 즉 ‘미래의’ 것인 영화가 ‘미래로’ 경험되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관객들이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던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순간들이다: 반쯤 어둠이 깔린 상영관에 입장하는 순간, 입장하는 관객들로 인해 약간은 소란스러운 순간, 옆자리에 앉은 이들과 영화에 대한 기대를 나누는 순간, 한껏 들뜬 마음으로 영화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순간…. 이러한 찰나의 순간이야말로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일의 핵심적인 경험이자, 영화가 새로움과 놀라움으로 경험되기 위한 근본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도래할 미래’와 ‘미래의 도래함’ 사이에 자리한 사이의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래할 미래가 곧 도래하기만을 기다리는 이러한 순간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영화가 ‘완성된 (따라서 안전한) 미래’라는 사실에 기대어 있다. 영화(라는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관객이) 안전한 한에서만 예측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마법과도 같은 전환의 경험에 내재한 모순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영화가 미래(의 것으)로 경험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언제나 과거(의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관객의 앞에 도달한 모든 영화는 과거에 기획되고, 과거에 연출되고, 과거에 촬영되고, 과거에 편집된, 즉, 모든 과정을 이미 완료한 이미-만들어진-것이다. 

  영화가 영화관에서 개봉하고 상영관에서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관객들이 그것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과거에)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영화는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미래의 펼쳐짐으로 경험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상당 부분 앞서 언급한 영화관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 우리는 ‘도래할 미래’와 ‘미래의 도래함’ 사이의 상태를(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영화관의 관객들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영화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극장에 걸린 영화는 과거에 연출되고 촬영되어 편집까지 모두 끝난 이미-만들어진-것이지만, 그것은 적어도 상영관의 빨간 의자에 앉아서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만큼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것’이었다. 따라서 관객이 ‘과거의’ 것인 영화를 ‘미래의’ 것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영화관이라는 장치가, 즉 영화의 지속에 대하여 절대적 보증인으로 기능하는 영화관의 역할이 전제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영화관은 관객들이 ‘과거의’ 것인 영화를 ‘미래의’ 것으로 인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던 셈이다. 또는, 영화관은 영화가 ‘과거의’ 것이라는 본질적 속성을 ‘미래의’ 것으로 위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영화관이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OTT의 상세 페이지에는 영화의 길이만 표시되어 있다. (사진 출처: 왓챠 홈페이지) *사진의 영화는 본 글의 내용과 무관함.
OTT의 상세 페이지에는 영화의 길이만 표시되어 있다. (사진 출처: 왓챠 홈페이지) *사진의 영화는 본 글의 내용과 무관함.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떤 것도 영화의 지속을 절대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영화를 재생하는(시작시키는) 오늘날의 환경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에 앞서 기대와 설렘을 안고 음료와 팝콘을 준비해 자리에 앉아서 눈앞에 펼쳐질 미래를 기다리는 경험”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차려입고 외출하는, 여럿이 함께 모여 음식을 주문하는, 기대와 설렘을 공유하며 모두 함께 영화의 시작을 맞이하는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주는 경험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각자의 침대에 누워 가장 편안한 차림으로 넷플릭스를 켠다. 그리고 수많은 가능한 선택지 사이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그나마 볼만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별 감흥 없이’ 또는 ‘무미건조하게’ 재생할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영화 보는 경험에서 나타난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한다. 이는 어쩌면 영화의 향방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신은 넷플릭스에서 무엇을 볼지 한참을 고르다 결국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다는 자조적인 농담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실제로 필자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겪었던 (아마도 당신도 한 번쯤 겪었을)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이상 영화를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상태로 재생하지 않는다. 영화를 고르고, 선택하고, 재생하는 순간은 별다른 감흥 없이 무미건조하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표현이 다소 부정적으로 느껴진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을 전환의 순간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미래의 펼쳐짐으로 경험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다가올/도래할) 미래로 경험되는 것은 영화관의 시대에 한해서였다고 말이다. 더 이상 영화관의 시대가 아닌 오늘날, 또는 영화관의 위기가 공공연해진 현재에, 영화는 더 이상 미래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도 필름 시대와 디지털 시대, 또는 영화관의 시대와 OTT 시대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부에서 계속됩니다.

 

 

글‧김윤진
영화평론가/미술비평가.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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