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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가 스크린 너머 예술가를 드러낼 때, <파벨만스>, <바빌론>, <라스트 필름 쇼>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가 스크린 너머 예술가를 드러낼 때, <파벨만스>, <바빌론>, <라스트 필름 쇼>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4.02.1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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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속 하늘을 나는 자전거

자전거를 탄 엘리엇이 숲속을 달린다. 산길을 달리는 자전거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롭다. 소년이 친구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자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요술을 부린다. 순간, 절벽에 다다른 자전거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른다. 두 친구를 향하던 카메라는 이내 아이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관객은 아이의 눈으로 발아래 울창한 숲을 내려다본다. 존 윌리엄스의 웅장한 사운드트랙이 두 친구를 안아 올리며 마침내 스크린은 가슴 벅찬 뜨거움으로 가득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대표작 <E.T.>(1982)의 한 장면이다. 작품 속 ‘하늘을 나는 자전거’는 영화가 선사하는 환상 세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언젠가 어린이였던 모든 어른들에게, 그리고 언젠가 어른이 될 모든 어린이에게.” 영화 포스터에 적힌 문구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연상시킨다. 스필버그는 지구를 방문한 미지의 생명체를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어른들은 자전거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영화는 그런 어른들을 동화를 믿었던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하늘을 나는 자전거’가 2024년에 영화에서 등장한다면 얼마나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영화는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필름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며 CG에 대한 기대치는 한없이 높아졌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인간의 시각을 추월한 지 오래다. 적지 않은 고프레임 영화가 개봉했지만, 관객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움(uncanny)을 느꼈다. 이제 인간을 위해 디지털 매체가 스스로 프레임 수를 조절하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유튜브는 필름을 골동품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늘어난 시청자 수에 따라 직접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동안 전문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영상 편집 기술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크로마키를 활용한 이미지 합성은 기초능력에 불과하다. 이처럼 사람들은 점점 스크린이 환상을 생산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영화가 지닌 환상의 힘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스크린을 향해 다가오는 기차를 보고 경악할 관객은 없다.

환상 세계를 위한 진입장벽이 <아바타 : 물의 길>(2022)만큼 높아진 시점에 영화의 제작과정을 그린 작품이 3편이나 개봉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나의 필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물론 영화에 관한 영화, 메타-시네마는 우리에게 낯선 주제가 아니다. <셜록 주니어>(1924)부터 <휴고>(2011), <홀리모터스>(2012)까지 수많은 거장이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따라서 작년에 개봉한 세 편의 영화가 영화계를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판 나린의 <라스트 필름 쇼>(2023), 데미언 셔젤의 <바빌론>(2023),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2023)이다.

 

<아바타 : 물의 길> 스틸 컷

1초에 24번의 죽음

<라스트 필름 쇼>는 인도의 작은 마을에 사는 아이가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극장을 찾은 첫 순간부터 사메이(바빈 라바리)는 시네마에 깊이 매료되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만큼이나 아이를 사로잡은 것은 스크린에 세계를 투사하는 영사기의 빛이다. 돈이 없어 극장에서 쫓겨난 아이는 우연히 영사실에서 일하는 파잘(바베시 쉬리말리)을 만나게 된다. 파잘은 아이에게 간단한 영사 기술과 필름 편집을 가르친다. 필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빛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필름을 상영하기 위해서는 명멸하는 빛 사이사이의 어둠을 감추어야 한다. “영화는 사람들을 속인다. 관객들은 빛 속에 얼마나 많은 어둠이 있는가를 보지 못한다.” 빛의 잔상 효과에 의해 관객은 이미지 간격마다 자리 잡은 어둠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관객 덕분에 ‘만들어진 세계’는 온전히 스크린에 구현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알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필름 상영과 대조적으로 필름이 제작되는 과정은 스크린에 펼쳐진 세계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는 곧 필름에 내재한 어둠을 들추는 일이다. 어둠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 휴고(에이사 버터필드)는 기차역 시계탑 속에 살고 있다. 자동 기계에 매료된 소년은 얼어붙은 영화의 시간을 재가동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때 조카에게 시계탑 관리를 맡긴 삼촌이 소년에게 씁쓸한 현실을 알려준다. “이젠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영화가 구현한 환상 세계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정작 그 세계를 창조한 영화인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필름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담긴 공동 작업물이다. 그러나 관객의 수동성을 중시하는 영화관은 애써 이를 외면한다. 관객이 스크린 너머 인간을 인지하면 몰입에 균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라스트 필름 쇼>의 사메이와 파잘은 영사실에서 부지런히 관객들을 위한 쇼를 준비한다. 그러나 어느 관객도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라스트 필름 쇼>가 가리킨 어둠 속에는 영사실이라는 골방 속 두 인간이 있다.

 

필름 편집 기술을 배우는 사메이(바빈 라바리)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는 필름에 움직임과 정지라는 두 종류의 시간이 공존한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1초에 24번 발생하는 정지 상태를 ‘죽음’과 연관 짓는다. 메타-시네마는 필름 상영이 엄격히 금하는 이 정지의 순간에 인간들이 갇혀 있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세계의 연속성을 위해 예술가는 의도적으로 존재를 부정당한다. 데미언 셔젤의 영화 <바빌론>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영화인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죽음이 비유적 표현에 그치는 멀비의 이론과 달리 <바빌론> 속 영화인들은 실제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코끼리를 옮기는 두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이 시퀀스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미지는 코끼리가 주인공 매니(디에고 칼바)의 머리에 흠뻑 똥을 싸지르는 장면이다. 코끼리는 이후 할리우드 파티에 다시 등장하는데 그 타이밍이 의미심장하다. 난잡한 섹스와 마약이 성행하는 파티에서 미성년자 배우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때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준비된 코끼리는 소녀의 죽음을 감추는 눈속임으로 활용된다. 이로써 영화계의 부정한 이면을 다룬 영화가 지저분한 이미지로 막을 올린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코끼리는 영화인들에게 벌어질 파국을 예고한다.

죽음을 맞이한 소녀는 짤막한 부고 기사를 통해 잠깐 다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마저도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알리는 헤드라인에 묻히고 만다. 소녀의 죽음 이후에도 <바빌론>은 영리한 전략들을 통해 거듭해서 예술가의 죽음을 감춘다. 넬리(마고 로비)의 요염한 춤사위가 파티의 모든 시선을 흡수한다. 다분히 의도된 강렬한 몰입감에 영화 속은 물론 현실의 관객들까지 소녀의 죽음을 망각한다. 우리는 그녀가 춤을 춘 무대가 ‘꿈의 공장’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파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매혹적인 춤사위를 선보이는 넬리(마고 로비)

영화 촬영장에서 엑스트라가 창에 찔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지만,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유성 영화의 촬영감독이 녹음 장비가 내뿜는 고온을 견디지 못해 사망에 이른다. 하지만 스크린은 삽시간에 ‘사운드 만세’를 외치는 흥겨운 연주로 전환될 뿐이다.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소중한 동료를 잃었을 때조차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영화의 흥행 여부에 쏠려 있다. 영화계에 몸담은 이들조차 '어둠 속 인간'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다.

예술의 그림자에서 인간은 빈번히 소외되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하면 필름메이킹은 잠시 중단된다. <바빌론>은 필름이 정지하는 순간들을 전면화하여 어둠을 들춰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어둠에서 발굴된 얼굴의 대부분은 배우들이다. 그들이 꼭 죽음으로만 수모를 겪는 것은 아니다. 조명 장비는 흑인 배우(조반 아데포)에게 블랙 페이스를 강요한다.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목소리가 매력적이지 않은 배우는 존재가치를 잃는다.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 정신 활동인 예술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바빌론>은 이를 비웃듯이 모든 죽음을 한낱 흥미로운 볼거리로 전락시킨다.

그런데 문득 배우는 필름의 어둠보다 빛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영화 세계의 외연을 담당하는 배우는 스크린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 평론가(진 스마트)는 이 같은 생각에 냉소를 보낸다. 영화계에서 인기가 시들고 모두에게 잊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에 따르면 배우는 “영화와 관련된 모두가 죽고 난 뒤 누군가 다시 영화를 봐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영화가 재생되면 배우는 다시금 스크린에 현존한다. 뒤집어 말하면 배우는 영사가 끝나는 순간 또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필름의 빛에 새겨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등장인물의 탈을 쓴 유령뿐이다.

 

<바빌론> 속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진 스마트)

영화 원초경

<라스트 필름 쇼>와 <바빌론>은 필름에 내재하는 어둠을 들춰 관객이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예술가의 존재를 드러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는 앞선 두 영화보다 훨씬 짙은 메타성을 지닌다. 거장 감독의 아우라가 상영 내내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 너머로 이끌기 때문이다. 가려질 수 없는 감독의 흔적이 스크린 곳곳에 가득하다. 따라서 이 영화가 어둠을 폭로하는 방식은 앞선 두 영화와 사뭇 다르다.

<파벨만스>에 담긴 예술가의 고통을 파악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왜 ‘스필버그’가 아닌 ‘파벨만’일까?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덕분에 관객은 손쉽게 주인공 샘 파벨만(가브리엘 라벨)을 실제 감독과 연관 짓는다. 유대인, 애리조나 출신 등 감독과 일치하는 주인공의 배경이 드러나며 스크린 안팎 두 인물 간의 연결고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감독과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파벨만이 ‘fable’과 ‘man’의 합성어라는 관점은 흥미롭다. 스필버그의 신작 <파벨만스>는 이야기꾼, 영화를 만드는 한 아마추어 감독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제목에도 유사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The Fabelman>이 아닌 <The Fabelmans>일까? 영화는 두 가지 서사의 축을 지닌다. 하나는 극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를 사랑하는 한 소년의 성장 서사이다. 갈등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파악한다면 주인공 이름 뒤에 붙은 복수형은 ‘파벨만 가족’을 의미한다. 그런데 파벨만을 이야기꾼(fable man)으로 받아들인다면, 영화의 제목은 ‘이야기꾼들’(fable mans)로 바라볼 수 있다. 영화가 최종적으로 가리키고자 한 것은 가족 간의 갈등이 아닌 영화라는 마법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이다.

 

<파벨만스> 스틸 컷

<라스트 필름 쇼>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 ‘영화 원초경’으로 막을 올린다. 1952년 1월 10일, 처음으로 극장을 찾은 샘은 <라스트 필름 쇼>의 사메이가 그러했듯 영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매료되었다. 거대한 기차가 자동차와 충돌하는 <지상 최대의 쇼>(1952)의 스펙타클은 단숨에 아이의 눈을 사로잡았고, 반복되는 충돌의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싶은 아이의 욕구는 장면을 재연하고 촬영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컴퓨터 공학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기계 예술 매체인 영화는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여타 예술가들처럼 주인공에게도 창작의 시련이 찾아온다. 어느덧 청소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서부극을 촬영하던 그는 돌연 한탄을 내뱉는다. “가짜야, 완전히 가짜.” 열정 넘치는 초짜 감독은 촬영장에서 영화의 허구성을 깨닫는다. 픽션이라는 한계는 그의 꿈을 반대하는 아버지(폴 다노)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기를 바란다. 아들의 작품에 감명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영화는 아무리 큰 화면에 상영되더라도 고작 스크린의 사각 틀 안에 머무를 뿐이다.

보리스 삼촌(주드 허쉬)의 등장으로 영화와 현실 세계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영화는 예술과 가족을 반으로 찢고, 결국 너를 외롭게 만들 것이다.” 저주와도 같은 경고와 맞닥뜨린 뒤 예술은 끊임없이 가족 간 갈등과 맞물린다. 샘이 아버지의 부탁으로 제작한 캠핑 비디오가 대표적이다. 편집을 진행할수록 베니 삼촌(세스 로건)과 어머니의 애틋한 관계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스킨십이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고 어머니의 미소가 클로즈업된다. 진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카메라는 두 사람의 부정한 관계를 프리즈프레임하며 소년을 덮친다. 가족들은 ‘금지된 사랑’이 잘려 나간 편집본에 감탄했지만, 충격에 사로잡힌 감독은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없다.

 

샘(가브리엘 라벨)이 만든 캠핑 비디오를 감상하는 가족들

<파벨만스>는 예술을 통해 현실을 개혁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말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저 영화를 만들며 소중한 것을 잃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자 한다.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있는데도 샘은 그녀의 마지막 맥박이 뛰는 모습에 주목한다. 또한 가족 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불현듯 이 순간을 촬영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와 같은 욕구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보리스 삼촌이 말한 것처럼 “예술이라는 마약에 빠졌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예술가의 정신을 일컫는 ‘예술혼’은 인간을 홀리는 주술적인 힘을 담고 있다.

이때가 바로 <파벨만스>에 필름의 어둠이 드리우는 순간이다. 주인공의 삶에서 예술과 가족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맥박의 규칙적인 움직임이 클로즈업될 때 소년은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 가족 간의 다툼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충동적인 자아는 더 이상 가족의 구성원으로 남지 못한다. 친구들의 행복한 순간이 담긴 영화 시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삶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은 예술가는 결코 그 삶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벨만스>가 묘사한 정지의 순간은 단순히 삶에서 배제된 감독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둠은 영화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픽션이 지닌 한계는 영화 역사의 시작부터 줄곧 지적되어왔다. 심지어 시네마는 현재 다른 매체와의 경쟁으로 환상의 힘마저 급격히 잃어가는 중이다. 영화가 창작자에게 즐거움을 안겨줄 때는 오직 그것을 만들 때뿐이다. 새로운 충동이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예술가는 또다시 카메라를 든다.

가여운 인간을 사로잡은 저주의 기원은 그들의 유년기 기억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라스트 필름 쇼>와 <파벨만스>, 더 과거에는 <시네마 천국>(1988)까지 메타-시네마가 감독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이유이다. 카메라를 막 쥐기 시작한 아마추어 예술가에게 거창한 목표 따위는 없다. 오직 어린아이처럼 카메라를 잡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만이 있을 뿐이다. 스필버그는 벗어나고 싶지 않은 환희를 자신만 느낀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던 것 같다. ‘이야기꾼’ 뒤의 ‘s’는 달콤한 저주에 빠진 이 땅의 모든 영화인을 가리킨다. 영화를 통해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관객만이 아니다.

 

<파벨만스> 촬영현장에서 웃고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빛의 역사

기차는 메타-시네마가 선호하는 메타포이다. 사메이는 친구들과 기차에 올라타 자신만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제작한다. 샘 파벨만을 사로잡은 첫 영화적 기억 역시 충돌하는 기차의 이미지다. 기차는 여러모로 영화를 닮았다.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기차의 힘은 폭발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기차는 또한 멀리 떨어진 두 시공간을 이어 붙이는 기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에 관한 영화에 기차가 등장할 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다소 명확하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에서 시작된 시네마의 역사이다. <라스트 필름 쇼>에서 카메라는 대뜸 스크린을 향해 다가오는 기차를 포착한다. 열차의 도착과 맞물리며 스크린은 점점 색을 얻고 과거에서 현재로의 이행을 환기한다. 왜 필름 속 어둠을 들추는 영화들은 이토록 반복해서 지나온 시간에 집착하는 것일까? 100년이 넘는 역사에는 지금껏 시네마를 유지해 온 선조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극이 반복되어도 영화인들은 언제나 다시 카메라를 쥐었다. 외로운 싸움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만큼 절실한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작년에 개봉한 세 편의 영화는 모두 동종 업계에 종사했던 선배들에 대한 헌사로 마무리된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바빌론>의 마지막 시퀀스이다. 영화의 발전과정을 총망라하는 푸티지의 연속은 이어달리기를 하듯 영화 역사 전체를 되짚는다. 화려한 색의 향연이 향하는 종착역은 스크린을 바라보는 주인공 매니의 얼굴이다. 영화계를 떠난 매니는 오랜만에 극장을 찾는다. <사랑은 비를 타고>(1952)는 유성 영화 전환기에 고달픈 영화인들의 모습을 그린다. 매니는 영화를 통해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과 그를 처음 촬영장으로 이끈 인물들을 떠올린다. 과거 한 평론가가 배우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의 눈앞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극중극의 서사가 극중 인물의 전기였다는 것이 밝혀지며 한 인물의 생애가 영화 역사 전체와 교차한다.

교차의 순간은 다른 두 영화에서도 발생한다. <라스트 필름 쇼>에서 사메이가 인도 영화의 기틀을 마련한 예술가들을 언급한다. 소년의 목소리는 어느덧 스탠리 큐브릭과 찰리 채플린, 스필버그 등을 부르는 판 나린 감독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이때 호명되는 이름이 점진적으로 겹쳐지며 다수의 시간이 공존을 이룬다. 영화 역사 전체를 다루지는 않지만 <파벨만스>도 마찬가지다. 샘이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존 포드를 만난다. 존 포드를 연기한 배우는 스필버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감독인 데이빗 린치다. 스필버그는 오랜 동료의 몸을 통해 머나먼 선배를 소환하며 과거와 현재의 예술가를 한데 포갠다.

 

존 포드 감독을 연기한 데이빗 린치

그러나 한 편의 영화에서 겹쳐지는 시간만으로는 온전한 역사성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 역사의 생성을 위해서는 연속된 관계성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라스트 필름 쇼>와 <휴고>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조르주 멜리아스에 대한 존경을 담아 <휴고>를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위대한 예술이 곤경에 처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든 것이다. 자신의 필름이 구두 뒷굽 따위로 재활용되는 걸 목격한 멜리아스는 극심한 좌절에 빠진다.

<라스트 필름 쇼>의 사메이도 멜리아스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인도에서도 어느덧 필름 시대가 저물고 극장이 디지털로 전환되었다. 골동품으로 전락한 낡은 영사기와 필름은 무참히 버려진다. 필름의 무덤에 도착한 소년은 필름을 녹여 형형색색의 장신구를 만드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그토록 사랑하던 대상의 죽음에 소년은 과거 위대한 예술가가 그랬듯 극심한 우울감에 빠진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며 예술가에 대한 경시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영사를 도맡던 파잘의 실직이 대표적이다. 필름의 어둠은커녕 이제 그들이 머물 물질 세계 자체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필름 무덤에 파묻힌 사메이(바빈 라바리)

하지만 소년은 곧 관점 전환을 통해 필름의 죽음을 극복한다. 필름은 형체를 잃었지만, 장신구의 알록달록한 색채는 여전히 소년의 눈을 사로잡는다. 영화의 빛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갔음을 발견한 사메이는 필름 예술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깨닫는다. 필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많은 영화인이 물질성의 소멸을 한탄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국에 대해 <라스트 필름 쇼>는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 여전히 시네마는 연속성 상에 있다고 대답한다.

시네마의 연속성만큼 두 영화가 나눈 대화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영화는 과거의 영화에 대답한다. 반대로 현재가 던진 질문에 과거가 답을 제시할 때도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답, 이것이야말로 시네마의 열차가 여전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역사를 이어 나가는 영화인들은 이따금 어두컴컴한 물 밖을 나설 때가 있다. 물 밖에서 바라본 풍경은 어항 속에서 바라본 것과 사뭇 다르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속한 세계를 논하기 위해선 가끔 그 세계에서 한 걸음 멀어질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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