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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전생들: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2023)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전생들: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2023)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4.03.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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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스트 라이브즈>의 연극성

한국계 미국 감독 셀린 송(송하영)의 첫 장편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 2023)는 기록적인 숫자의 상들을 휩쓸며 2024년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로 선정되는 놀라운 성과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화제작이다. 이러한 화려한 데뷔는 자신의 더블이라고 할 수 있는 나영(노라, 그레타 리)처럼 극작을 본업으로 한 ‘글쟁이’ 송감독이 쓴 각본의 탁월성 때문에 가능했다. 연극성을 부각시키며,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을 활용한 서사 구성과 전개에서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연극성을 지향함으로써 성공한 메타연극적 영화라고해도 지나치치 않을 것 같다. 예컨대, 해럴드 핀터의 메타영화적 구조를 가진 연극 『배신』(Betrayal, 1978)의 영화 각색 버전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작품은 연대기적 시간의 질서를 벗어난 극적 시간의 구성과 삼각관계의 등장인물들의 등장이라는 유사성을 갖고 있다. 특히 엔딩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의 첫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의 배치와 거기서 마주친 나영의 시선은 『배신』의 혼란스러운 시간의 배신과 주인공 엠마의 모호한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관객을 향하게 놓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연기를 하는 연극 무대 위 배우들 같은 세 사람, 그들을 보고 있는 관객의 존재를 시사하는 보이스-오버로 오프닝 시퀀스는 연극적 스펙터클을 구축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서서히 관객을 향하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클로즈업된 나영의 혼란스럽지만 당찬 시선은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주연 배우임을 말해준다.

 

처음과 엔딩에서 발견한 나영의 슬프고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시선은 사뮤엘 베켓이 핀터에게 보낸 『배신』에 대한 한줄 평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베켓이 말한 “빛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어둠 속에서 그 첫 마지막 시선”, 바로 그 시선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배신』은 엠마, 로버트와 제리의 삼각관계의 불륜과 배신을 주제로 한 연애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연극이 아니다. ‘배신’은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시간의 지속 속에서 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미끼일 뿐이다. 이 영화 또한 삼각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세 사람 사이의 엮인 관계, ‘인연’을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의 영화적 기법으로 극적 시간의 질서를 벗어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 사람과 그들의 관계를 보도록 만드는 화두로 삼고 있다.

 

2. 플래시백과 보기를 위한 ‘사이’

 

이 영화는 처음부터 관전 포인트를 제시하는 친절을 관객에게 베푼다. 새벽 4시에 뉴욕 이스트빌리지 한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특이한 조합의 세 사람을 보고 있는 보이스-오버의 영화 속 관객은 도대체 이들은 어떤 관계이고 누구일까라는 미스터리를 쫓도록 관객을 유도한다. 이어 나영의 모호한 ‘첫 마지막’ 시선을 클로즈업한 카메라는 관객을 플래시백을 통해 24년의 시간과 태평양을 가로질러 서울로, 나영과 해성(유태오) 뿐 아니라 이들의 대화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서(존 마가로)까지 세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는 과거의 시공간으로 데려간다.

이 영화는 연극적 스펙터클로 연극성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플래시백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시간-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출현시킬 수가 있다. 사실 들뢰즈의 르누아르에 대한 평가처럼 연극성은 시간-이미지의 영화로 진입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극복해야할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플래시백의 창조적인 활용으로 연극성의 한계 뿐 아니라 장점을 강조할 수 있음을, 즉 두 매체의 상호매체성을 통해 연극과 영화 각 매체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강점을 확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은 그 근거에 두 가지 흐름, 지나가는 현재와 보존되는 과거로의 흐름으로 구별되는 동시에 공존하는 두 가지 흐름을 감추고 있다. 영화는 스크린에 공존성과 동시성의 질서 속에 출현하는 각각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매체이며, 플래시백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영화적 시간 기법이다. 플래시백은 기본적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그리고 다시 우리를 현재로 되돌리는 폐쇄 회로에 갇힌 시간의 흐름을 담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단지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액션에 미치는 결정론적인 액션의 서사로, 즉 나영과 해성의 이루지 못한 사랑 또는 억압된 강렬한 욕망의 이야기로 서사를 완결하여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된 기법이 아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플래시백을 넘어서서 이 영화는 플래시백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단 이 영화의 시간 기법 플래시백은 나영과 해성의 과거 기억-이미지들을 이들의 사랑 이야기 안에서 현재의 액션-이미지들과 통합시키는 것보다는 기억 그 자체, 즉 보존된 과거 그 자체를 소환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플래시백의 1차적 관객은 바로 나영과 해성, 그리고 아서이며, 우리는 그들의 보기를 보는 관객으로 그들과 함께 그들이 누구였고, 누구이며, 누구일까라는 미스터리를 쫓는 탐정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세 사람의 보기는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보기의 시간으로서 현재는 지나가는 현재가 아니라 탈현실화된 현재이다. 즉 보기는 연속의 시간 질서 밖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 사건의 체험은 연극의 막 혹은 막들 사이의 ‘사이’(pause)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세 사람을 그 사이, 텅 빈 시간으로, 보기의 시간으로 인도한 것은 나영의 떠남에서 시작된다.

3. 잃어버린 시간 찾기와 진실 찾기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에서 이 긴 소설 쓰기가 엔딩에서 시작한 시간 탐구의 여정임을 시사하며 끝을 맺는다. 영화화되지 않은 핀터의 각색 『프루스트 영화각본』 또한 마르셀의 보이스-오버, “시작할 때였다”로 끝난다. 이 영화 또한 “빛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어둠 속” 엔딩에서 잃어버린 시간 찾기가 시작된다.

24년 전 나영의 갑작스러운 떠남은 그에게 예측할 수 없는 간극과 폭력을 초래한다. 들뢰즈의 프루스트 읽기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에만 진실을 찾아 나선다. 해성에게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것은 어떤 폭력을 겪을 때만 진실을 찾아 나선다. 나영이 “확 가버려서 열 받았던” 해성에게 그녀의 떠남은 그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 찾기,” 즉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존하고 있다. 12년 전 SNS를 통해 해성이 나영 찾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군대 훈련 장면이 시사하듯이 그 시점에서 그를 사이의 시간으로 몰고 간 것은 군대생활이라는 일종의 강압적 강요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해성이 마침내 뉴욕으로 그녀를 찾아 온 것 또한 결혼의 압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나영이기는 하지만 해성 또한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주체로서 이 영화의 서사를 끌어가는 나영못지 않은 비중을 가진 인물이다.

 

24년 전 12살 나영의 떠남은 부모의 이민 결정에 의한 떠남이다. 그러나 그 당시 어린 나영의 캐나다로의 떠남은 노벨상 수상의 꿈을 이루기 위한 그녀 나름의 그 당시 선택이었다. 해성은 나영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선택에 따른 2번의 떠남을 경험한 셈이다. 24년 전, 그리고 12년 전 SNS 상에서 그가 나영을 찾았을 때, 그녀는 2번째 이민으로 오게 된 뉴욕에서 작가로서 퓰리처상 수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그를 떠난다. 그녀의 떠남은 자신의 커리어를 추구함으로써 창조적, 예술적 자유 또는 실질적인 자유를 얻은 여자의 선택이다. 자신의 큰 꿈을 위해 좁은 한국과 해성을 떠나고, 뉴욕에서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하여, 다시 해성을 떠나기로 선택한 나영이지만, 뉴욕으로 그녀를 찾아온 “너무도 한국적인 남자”, 매력적인 남성다운 한국 남자로서의 해성에 대한 강렬한 감정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자 때문에 일을 포기하는 일이 없는 그녀가 선택한 취향이 같고 글에 대하여 조언을 해줄 수 있고 뉴요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아서와의 결혼 생활이 현재 그녀의 삶이고, 그녀가 있어야 할 곳임을 자신의 2번의 떠남을 돌아보는 현재 시간의 역동적 동요 속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의 다시 당김과 미래에 대한 현재의 미리 당김 속에서 깨닫고 선택한다.

해성이 보존된 과거의 보기를 통해 확인한 것은 “너[나영]는 너라서 떠나갔고, 너라서 좋아했고,‘ ”너는 떠나는 사람“이라는 진실이다. 그녀의 떠남은 현재의 창조적인 행위,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결국은 세 사람의 과거를 구원하고 미래를 생성할 수 있는 것을 선도하는 행동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해성은 이번 생에서는 이제 나영을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4. 보존된 과거 속에서 되찾은 전생들

 

24년전 떠났던 그때 나영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나영의 말은 잃어버린 시간, 지나가는 시간이 변화시키고 없애버린 존재를 의미한다. 24년의 시간과 태평양이라는 빌런이 초래한 마모, 소모, 파괴, 상실의 부정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존재했고, 없는 것이 아니며, 다만 두고 온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되찾은 시간, 우리에게 절대적인 근원의 시간으로 영원성의 이미지를 주는 보존된 과거에 남겨 둔 그녀의 존재를 의미한다. “또라이” 해성이는 나영이 두고 떠난 그 아이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은 시간의 부정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되돌아보는(look back) 동시에 앞을 내다보는(look forward) 보존된 과거의 보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창조적 플래시백으로 이 영화는 기억 그 자체의 창조로 되찾은 전생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송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처럼 그녀의 미국 남편과 어린 시절 첫 사랑의 한국 남자 사이에서 “다른 차원이 하나로 연결된 것 같은 기이한 감정을 경험한"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12살의 나영이었지만, 12살이 아닌, 그러나 해성은 그 12살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보존된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 찾기를 통해 이질적인 지속들이 공존하는 현재와 미래로 진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보존된 과거 속에서 되찾은 전생들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관계와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이러한 어색한 상황에 낄 줄 몰랐다고 해성에게 말하는 아서 또한 해성의 잃어버린 시간 찾기 덕분에 그가 들어갈 수 없는 한국어로 잠꼬대를 하는 나영의 마음 속 일부분을 보게 된다. 따라서 12살 나영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해성과의 만남은 두 남자 또한 서로 엮인 관계, 인연을 맺는다. 이제 유대인 작가 아서와 결혼해 뉴욕에 정착한 비교적 성공한 극작가 나영은 지금은 무슨 상을 받고 싶으냐고 묻는 해성에게 토니상이라고 마지못해 대답한다. 이 데뷔 영화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송감독은 이제 아카데미상 수상을 꿈꾸는 영화감독이라는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을 성공적으로 착수하였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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