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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노무현이 그토록 부끄러운가?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노무현이 그토록 부끄러운가?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4.03.2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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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정말로 시민이 깨어있어야 할 시간이다

경제학에서 도덕을 제거하라

18세기에 등장한 고전파경제학에 맡겨진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과제는 경제학에서 ‘도덕적 가치’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1714)는 이기심과 악덕을 찬양한 대표적 저서다. 꿀벌은 그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꽃에서 꿀을 채취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꽃가루가 이동하니 꽃은 열매를 맺고 씨를 마련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연은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진다. 이기심은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도덕적 아름다움, 뛰어남, 참된 가치 같은 것들은 유행과 관습을 따라 바뀔 정도로 불안정하다.” 그것은 사회발전을 가로막은 악덕이며 죄, 더욱이 기껏해야 위선일 뿐이다. ‘도덕을 조롱하면서 이기심을 적극 발휘하라. 이타심과 도덕은 위선이며 이기심과 악덕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이 우화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레미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서설』(1789)에서 ‘쾌락주의’와 ‘공리주의’를 제창했다. 공리(功利)란 성공과 이익의 줄임말인데 이는 쾌락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쾌락, 곧 성공과 이익을 추구하며,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이루는 과정에서 소수자의 손실과 실패 그리고 고통은 용인될 수 있고, 심지어 그 방법이 아무리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이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콜로세움 극장에 운집한 로마시민의 쾌락 총량이 최대화된다면 기독교인들이 사자밥이 되어 비참한 고통을 겪는 상황은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하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러한 비도덕을 오히려 도덕적 태도로 칭송하였다. 비도덕이 도덕이라? 헷갈리기도 하지만 근대인들에겐 사이다발언처럼 유쾌하게 들렸다. 도덕적 멍에와 이타적 연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약속한 이 새로운 복음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도덕으로부터 자유, 도덕의 조롱 그리고 악덕의 찬양, 이 모든 것은 당시를 풍미한 시대정신이었다. 일베는 그때도 많았다. 이 시대정신에 힘힘어 고전파경제학은 공리주의를 철학적 기반으로 삼았다. 고전파경제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경제학에서 사람을 제거하라

두 번째 과제는 경제학의 ‘과학화’였다. 공리주의만큼 자연과학도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객관화를 추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따라서 과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에서 ‘주관적 요인’을 제거하고자 했다. ‘행위자 없는’ 경제학, 곧 ‘사람 없는’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의 꿈이었다! 행위자란 어떤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주체다. 더욱이 그러한 행위자는 감정에도 충실하다. 이런 행위자가 경제학 모델에서 추방되면 예측할 수 없는 충동과 창조적 의지도 추방되어 모델은 기계체제, 곧 메커니즘으로 바뀔 수 있다. 더욱이 행위자의 존재로 인해 경제학에 여전히 남아 있는 ‘도덕적 잔재’를 일소할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수학’은 이를 마무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벌어진 ‘가치판단논쟁’과 ‘방법논쟁’, 후속되는 ‘한계혁명’을 거쳐 이러한 탈도덕과 탈행위자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다. 이와 함께 오늘날 주류경제학으로 불리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완성되었다. 이 경제학파는 공공의 이익, 공동선, 사회적 연대, 인권 등 도덕적 가치를 '위선'으로 조롱한다. 더욱이 이것은 시장을 ‘탈인격적 기계체제’ 곧 메카니즘으로 객관화시켜 버린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도덕과 행위자, 곧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경제학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경제학을 진리로 학습하고 있다. 보수는 시장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주류경제학자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얻어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습한다. 하지만 진보는 한편으로 자기도 모른 채, 다른 한편으론 알고 있지만 대안을 몰라서 학습한다.

 

도덕을 중시한 철학자들

그러나 도덕이 없는 경제학에 모든 경제학자가 환호하진 않았다. 공리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자유론』(1859) 등 여러 저작에서 존엄성, 휴머니즘, 인격 등 도덕적 이상을 강조하였고, 비참한 삶에 허덕이는 노동자와 부당하게 차별받는 여성들의 고통에 강력하게 연대했다. 물론 확고한 공리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이면서도 도덕적 이상과 사회적 연대를 통합하려는 밀의 경제학적 시도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무튼 공리주의자 밀에게도 도덕적 이상과 연대가 결핍된 경제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근대사회에서 도덕을 고수하려는 노력이 철학자를 비켜갈 리가 없다. 2세기 전 이미 임마누엘 칸트는 『실천이성비판』(1788)에서 도덕을 인간이 무조건 지켜야 할 정언명령으로 선언한 바 있다. 이성에 따라서만 사유하는, 자율적이고 독립된 ‘자기입법적 존재’라면 마땅히 도덕을 실천해야 한다. ​물론 그가 염두에 둔 도덕의 기준은 ‘옳음’(right)이다. 그의 도덕에서 ‘좋음’(good)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다. 옳기 때문에 도덕적 실천에 나서지, 좋기 때문에 실천하지 않는다.

​칸트에게 있어 공감, 동감, 이타심에 기반하는 연대와 헌신, ‘사랑의 실천’은 비도덕적이다!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여기겠지만 어떤 목적과 관계, 그리고 값싸고 유약한 휴머니즘에 오염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의 이런 ‘냉정함’이 칸트도덕의 요체다! 내가 굳이 칸트 도덕의 냉정함을 들추어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의’(right)와 ‘선’(good)을 구분하는 것은 비주류경제학, 특히 제도경제학을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 개인

헤겔은 칸트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칸트적 개인과 같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은 이 세상에 없고, 그런 모습으로 인간은 하루라도 살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얽혀 있으며, 공동체의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인간은 ‘세계 안에 나’일 뿐이다. 사회 없이 인간 없다!

홉스와 로크가 상상한 ‘사회 이전의 자연상태’는 존재할 수 없는 이론적 가상에 불과하며, 칸트가 애써 발견(!)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은 터무니없는 창작물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상호주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인간은 권리를 행사함은 물론 서로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진다. ‘인륜’이라 부르는 이 도덕적 의무는 합리적 판단과 이기적 욕구에 의한 ‘사회계약’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 시민사회, 국가는 대표적인 “인륜 공동체”에 해당한다.

내가 보기에 이 가운데 근대사회의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는 ‘시민사회’는 헤겔의 『법철학』(1821) 체계에서 인륜 공동체가 비극적으로 몰락하지 않도록 해 주는 완충지대이자 해독제로 설정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시민사회는 반성적 사유와 상호대화의 역량을 갖춘 ‘개인’들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헤겔로부터 전체주의적 성향을 우려하는 분들을 위해, ‘헤겔은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주제화한 최초의 독일인이며,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강력히 옹호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상호주체성과 공동체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심각히 침해될 우려는 충분히 인정되지만, 헤겔은 그러한 경향성에 대한 방어벽을 나름 구축해 놓았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써 온 과정으로부터 내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곧, 우리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와 함께 자유주의 그리고 공리주의와 탈도덕주의를 근대적 정신의 요체라고 믿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쾌락(공리)에 대해 도덕, 곧 의와 선을 주장하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대해 공동체와 이타주의를 강조하는 ‘또 하나의 근대적 흐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너무나 잘못 배우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 학교는 ‘자본주의 문화의 정훈훈련소’며 대학은 자본주의적 전사를 사육해 내는 ‘부르주아사관학교’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공동선에 헌신하는 깨어있는 시민

우리는 ‘깨어있는 시민’을 자주 언급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쓴 말이다. 물론 '노동자'를 주체로 생각하는 분들한텐 별로 환영받지 못할 말임을 잘 안다. 하지만, 요즘 노동자로부터 사회변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물론 노동자의 변혁적 역할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 역량과 사유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왜 그런가? 노동자는 본래 벤담적 공리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띠라서 공익, 공동선, 헌신, 사회적 연대와 같은 도덕적 이상을 기대하는 건 그들의 역량을 넘어선다. 모든 노동자로부터 밀, 칸트, 헤겔이 역점을 둔 도덕적 이상(가치, 정의, 인륜)을 지나치게 요구할 수 없다.

이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 인류의 지성들이 고수해 온 도덕적 이상은 도대체 누가 책임지며, 궁극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이것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내 머리 속을 항상 맴도는 질문이다. 제도경제학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처럼 시장 메커니즘에 기대거나 케인지언 경제학처럼 모든 것을 정부에 일임함으로써 행위자가 자유로워지는 경제학이 아니다. 제도경제학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공동선을 목표로 시장을 감시하고 정부에 참여하는 ‘행위자의 경제학’이다. 나는 『진보집권경제학』(2020)에서 철학적 연구방법을 적용해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행위자를 부각시켰다. 내 연구의 방향은 나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정되어 있다. 최근 읽고 있는 책도 모두 이 주제에 맞춰져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와 관련된 다수의 철학 서적을 깊이 있게 탐독할 기회를 가졌다. 그중에서도 논리적으로 깨끗하기만 한 극단주의를 거부하면서, 자유와 공동체를 함께 고민하는 한나 아렌트와 마이클 샌델은 내게 많은 통찰력을 제시해 주었다. ​특히 “시민정신의 정치경제학”을 상상하는 샌델의 잠정적 지침은 나의 혼란을 많이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그리고 마이클 샌델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지성사적 공백이 너무 크다!

 

『근대 사회정치철학의 테제들』(연구모임 사회비판과 대안 엮음, 2021, 사월의 책)

노무현이 꿈꾸고 그린이 기획한 깨어있는 시민

최근 며칠 동안 『근대 사회정치철학의 테제들』(연구모임 사회비판과 대안 엮음, 2021, 사월의책)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면서 그 공백을 채워줄 사람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힐 그린(Th. H. Green)이다. 영국 철학자 그린은 독일 철학자 헤겔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자유주의’를 기획하였다. 그린은 홉스, 로크, 칸트로 이어지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거부한다. 그런 편협하고 외골수형 자유는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 “끝없는 의식”의 “시민”들이 연대와 헌신, 곧 도덕적 실천으로 구축하는 “공동선”(Common good)이 사회발전의 동력이다. 헤겔이 발견한 근대사회의 인륜적 공동체인 시민사회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발휘하는 '도덕적 시민정신'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그린의 생각이다. 그것은 광포하고 비도덕적인 고전적 자유주의와 황량하고 무책임한 사회주의의 경계에서 사회개혁을 이뤄낼 윤리적 이념이기도 하다. 이것은 미국의 진보적 철학자 존 듀이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1935)에서 18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는 이미 기득권을 옹호하며,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진화해 버렸다고 일갈했다.

 

「토머스 힐 그린, 새로운 개인의 탄생과 자유의 재정립」(박성진, p.271~304)
「토머스 힐 그린, 새로운 개인의 탄생과 자유의 재정립」(박성진, p.271~304)

작은 논문이지만 「새로운 개인의 탄생과 자유의 재정립」(박성진)은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을 희구하면서도 『자본론』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모순 때문에 쭈볏거리며 번민하고 있을 진보적 동료시민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요즘 깨어있는 시민(conscious citizen)과 행동하는 양심을 입 밖에 내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유감스럽다. 노무현과 김대중이 그리 부끄러운가?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에 의해 새롭게 옷을 갈아 입으면서 이런 기류가 한층 강화되고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불편해지는 이 흐름이 과연 정상적이며 바람직할까? 감정을 조금 자제하고 냉정히 바라볼 여유를 한번 가져보자.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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