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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파시스트가 되었는가?
그는 어떻게 파시스트가 되었는가?
  • 로랑 케스텔
  • 승인 2014.12.0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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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파시스트가 되었는가?

 

철강노동자 출신으로 공산당 당수를 지낸 자크 도리오는 1936년 6월 프랑스 인민당(PPF)을 창설했다.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도 타파하고, 히틀러뿐만 아니라 스탈린과도 싸우겠다던 그는 결국 대표적인 나치 부역자가 되었다. 프랑스식 파시스트가 되기까지 그가 겪은 부침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함정들을 발견하게 된다.

 

로랑 케스텔 | 작가

 

우리는 흔히 자크 도리오(Jacques Doriot: 1898~1945)의 역정을 그 결말에 비추어 재구성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즉 무수한 표변 속에서 일관성을 찾고 이념적 변천 뒤에 숨겨진 논리를 모색하려 든다. 그의 권력욕, 좌절된 야망, 프랑스 공산당(PCF)에 대한 원한을 두고 심리학적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그가 정치적 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그의 전향이 마치 순결한 사상들로 구성된 숭고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양 설명하는 것도 피해야 할 암초이다.

1930년대 초만 해도 도리오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인물 중 하나였다. 언론은 26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에게 재빠르게 관심을 보였다. 소련을 추종하던 그는 논쟁뿐만 아니라 거리투쟁에도 능했다. 그는 특히 리프 전쟁(1)을 계기로 일어난 반(反)식민지 투쟁을 통해 명성을 떨쳤고, 덕분에 프랑스 공산당뿐만 아니라 제3차 인터내셔널(2)에서도 중책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혁명을 꿈꾸던 그도 권력투쟁을 겪으면서 결국에는 제도권에 매몰되고 정치적 계산에 익숙해지고 만다. 1930년 소련 공산당은 자크 도리오 대신 모리스 토레즈를 프랑스 공산당 당수로 택한다. 그러자 언론이 그간 입에 칼을 문 볼셰비키 지지자로 묘사해온 도리오는 자신의 지역에서 확고한 지지를 얻는 하원의원이자 시장으로 변모하며 제3공화국 엘리트 정계에 입문한다. 공산당이 참패를 당한 1932년 총선에서도 그는 1차 투표에서 파리 북쪽 생드니 시장에 재선된다.(3)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그는 토레즈 공산당 서기장이 추구하는 방향에 난색을 표하더니 급기야는 대놓고 반대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사회주의자를 ‘사회파시즘’ 운동가로 규정짓는 토레즈의 계급투쟁노선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상부에서부터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할 것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그는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수차례 받았다.

폭동이 일어난 1934년 2월 6일 저녁,(4) 그의 제안은 뜻밖의 반향을 얻는다. 각종 정치·노조단체들이 난립하던 당시, 그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노동총연맹(CGT)과 통일노동총연맹(CGTU, 공산당 계열) 조직원들까지 규합한 반(反)파시즘 감시위원회를 생드니에서 발족시킨다. 그는 시장직을 사퇴하면서 무리수를 둔다. 공산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던 그는 노동자 계급에게 판정을 의뢰했고, 결국 75%가 넘는 이들이 그에게 지지를 표했다. 하지만 투표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는 6월 27일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만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도리오의 “변절”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토악질”을 맹비난하던 토레즈 공산당 당수는 사회주의자들과 행동통일협정을 체결한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간의 형제살육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이 협정은 인민전선 발족의 토대가 된다.

이리하여 도리오는 고립무원에 빠졌고, 그의 정적들은 그의 정치적 위치를 마음대로 규정하게 됐다. 옛 공산당 동지들은 그를 제3차 인터내셔널의 이탈자, 즉 ‘트로츠키스트’ 또는 ‘프롤레타리아통일당(5)을 따라간 배신자’로 취급했다. 반면 1934년 2월까지 그를 공공연히 지지하던 사회주의자들은 그에 관해 양분된 입장을 보였는데, 지도자들은 새로운 동반자인 공산당의 내부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려 몸을 사렸고, 좌익은 1935년까지 산발적으로나마 그의 편에 서주곤 했다. 프랑스 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좌파들은 도리오를 그런대로 인정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인민전선 구축 과정에서 사실상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1935년 10월 상원의원 선거에서 도리오와 그의 지지자들을 공산당 마르셀 카섕이 이끄는 좌파 단일후보 명단에서 공산당 후보의 이름을 제거하는 술수를 부려 피에르 라발의 당선에 기여했다. 훗날 비시정권 내각 수반을 지내기도 한 피에르 라발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는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구했다. 도리오는 인민전선과 각종 산하조직에서도 배제되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그를 당의 배신자일 뿐만 아니라 인민전선의 반역자라고 보았다. 도리오의 지지자들과 공산당원들은 생드니에서 대결을 벌였고, 공산당원들은 도리오를 ‘파시스트’라고 규정했다. ‘파시스트’는 지금도 공산주의자들만 사용하는 표현이다. 1936년 선거 당시 생드니에서 출마한 공산당 소속 후보 페르낭 그르니에는 도리오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며 선거운동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도리오가 간발의 표차로 하원의원에 재선된다. 흥미로운 것은 1936년 초까지만 해도 우파에서는 도리오를 ‘저항하는 공산주의자’ 정도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의 정치세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도리오는 딱히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게 됐다. 대신 그는 ‘우파도 좌파도 아닌’ 노선을 택했다. 1935년 말부터 그는 옛 공산주의자, 신(新)사회주의자, 급진당의 혁신세력, 비(非)순응자, 파시스트 등 온갖 진영에서 배척당하고는 기존 정당체제의 와해를 꿈꾸는 이들을 규합해왔다. 덕분에 그의 노선은 보다 수월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결국 옛 노동자, 상류층 부르주아, 귀족들로 이루어진,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의 지도세력이 탄생했다.

프랑스 인민당은 1936년 5~6월 대규모 총파업이 발생하고 한 달쯤 지나서 발족했다. 인민당은 기본강령에 따라 공산주의를 원칙적으로 배척했고, 우파의 사회보수주의도 미약하나마 배격했으며, 파시즘과 반(反)유대주의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반(反)의회주의적 성향을 띤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아울러 프랑스 식민제국 경제를 높이 평가하고, 계급 간의 협력을 중시했는데, 당이 해외투자은행들과 제철업위원회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두 요소의 공이 크다.

어쨌든 이러한 요소들 가운데서는 좌파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오는 심지어 과거의 신념을 공개적으로 포기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인간이 온전히 경제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믿은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 실수이다. (…) 인간은 일정한 자연법칙을 따르며, 이들 법칙은 늘 재생산되어 왔다.”(6)

‘우파도 좌파도 아닌’ 노선은 기존 정치구조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아웃사이더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도리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릇된 정치적 구분’을 초월하는 ‘통합자’의 위상을 차지하고자 했다. 특히 인민전선이 ‘불의 십자가’를 해산시킨 후 프랑스 사회당(PSF)을 창설한 프랑수아 드라로크 대령이 대표적 인물이다. 도리오와 드라로크는 이내 적수가 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사소한 차이들의 나르시시즘”(7)이란 표현이 걸맞을 만큼 미미했다. 뿐만 아니라 인민전선은 이들을 ‘파시스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부르며 한통속으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도리오가 발전시킨 주제들을 보며 모든 좌파는 프랑스 인민당이 기업주와 외세에 종속된 파시스트 집단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하지만 보수주의 정당과 신문들은 이러한 인식에 공감하지 않았다. <레코드파리>는 도리오가 “전쟁의 씨앗”인 공산주의를 상대로 벌이는 십자군전쟁을 칭송했고(1936년 6월 29일자), 유력 일간지인 <르탕>은 이에 못지않은 찬사와 함께 1936년 11월 개최된 인민당 첫 전당대회를 보도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프랑스 인민당을 반(反)공산주의라는 프리즘을 벗어나서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반유대주의 단체들이 초기에 이 정당을 유대인, 프리메이슨, 공산주의 변절자들의 소굴로 여겼던 것을 떠올리면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프랑스 인민당의 모호한 정체성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37년 3월 16일 인민당은 사회당이 파리 북쪽 교외 클리 시에서 개최한 집회에 맞서 항의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경찰과의 정면충돌로 비화되어 다섯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이에 노동총연맹은 반나절 동안의 총파업을 선포했고, 공산당은 사회당과 인민당의 해산을 요구했다. 그러자 도리오는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자유전선’을 제안했다. 그리고는 사실상 모든 원내·원외 우파 정당들뿐만 아니라 인민전선과 동맹을 맺은 두 정당, 즉 사회공화연합과 급진당에게까지 이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외형적으로나마 ‘좌파도 우파도 아닌’ 노선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공화연합과 급진당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자유전선은 전형적인 반공산주의 우파연대의 모양새가 되고 만다. 루이 마랭의 공화연맹(우파) 당원들과 도리오는 드라로크 대령이 이끄는 사회당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목표를 품고 있었다. 통합자를 자처하는 드라로크를 통합의 대상으로 삼아버리자는 것이었다. 자유전선이 몇 차례 발족회의를 가지면서 정치권은 들썩였다. 그러나 중도 우파의 주요 정당인 민주동맹과 인민민주당은 한동안 망설하더니 결국 전선에 불참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마음이 홀가분해진 드라로크도 6월 9일 탈퇴를 선언한다. 정작 사회당이 떠나가자 자유전선의 미래는 상당히 불투명해진다. 결국 6월 20일 실시된 생드니 보궐시장선거에서 도리오는 공산당 소속 오귀스트 질로에게 패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레옹 블룸 내각이 물러나고 급진파 카미유 쇼탕이 총리직에 복귀(8)하면서 ‘붉은 혁명’의 위협은 멀어졌다. 도리오는 모든 전선에서 패하고 만다.

선거에 패배한 저녁, 도리오는 자신의 하원의원직을 포기한다. 바로 얼마 전 이탈리아 파시스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람치고는 고상한 처신이었다. 이제 프랑스 인민당의 지지기반이라고는 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를 주축으로 하는 주간지 <주쉬파르투>, 그리고 샤를 모라스의 정치평론지 <악시옹 프랑세즈>가 전부였다. 인민당은 ‘파시스트’라는 낙인에 점점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자유전선이 실패로 돌아간 지 1년 후, 마침내 인민당은 반유대주의를 표방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도리오는 1939년 달라디에 총리가 이끄는 제3차 내각의 밀사로 활동하며 프랑스 정부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인정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이기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는 그가 수행한 수많은 공작 중 하나에 불과했다. 모라스와 마찬가지로 도리오도 비시 정권의 출범을 “신이 주신 놀라운 선물”로 여겼다. 나치와의 협력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도리오는 볼셰비즘에 저항하는 프랑스 의용대 창설에 가담했고, 독일군 제복을 입고 동부에서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2월 22일 그는 독일 지그마링겐 부근에서 최후의 나치 부역자 및 프랑스 파시스트들과 차량에 피신해 있던 중 비행기의 폭격을 받는다. “프랑스의 무력화를 바라던 이들을 위해 봉사한 변절자가 남기는 것이라곤 오직 추억뿐이리라.” 1937년 5월 24일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에 실린 글이다. 도리오가 사망하기 8년 전에 작성되었지만 마치 그를 위한 추도사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글의 예지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정치적 정체성은 말, 표현, 정서, 감정 투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권력 투쟁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적 구축물이라는 사실도 이처럼 명민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글·로랑 케스텔 Laurent Kestel

저서로 <La Conversion politique. Doriot, le PPF et la question du fascisme français (정치적 전향. 도리오, 프랑스 인민당, 그리고 프랑스 파시즘의 문제)>(Raisons d’agir, Paris, 2012) 등이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naver.com

 

(1)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모로코 리프 공화국을 두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벌인 식민전쟁

(2) ‘코민테른’이라고도 불리는 제3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새로운 소련체제를 지지하는 각국 공산당을 모스크바가 중심이 되어 규합했다.

(3) 도리오는 1924년 센(Seine) 지역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931년에는 생드니(Saint-Denis) 시장에 선출됐다.

(4) 민족주의 단체들이 파리에서 벌인 반(反)의회주의 시위이다. 시위대와 진압세력이 격렬히 충돌한 이 사태를 계기로 에두아르 발라디에 총리 내각이 퇴진한다.

(5) 프롤레타리아통일당(PUP)은 공산당에서 갈라져 나온 정당으로 1930년대 활동했다.

(6) Jacques Doriot, <프랑스는 노예의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 Flammarion, Paris, 1936년

(7)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1930)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8) 1937년 6월 20일 프랑스 상원은 블룸 내각을 퇴진시켰다. 그 뒤를 이은 카미유 쇼탕 총리는 한층 전통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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