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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인권’
  • 박혜정 | ‘인권’ 이달의 칼럼 가작
  • 승인 2017.12.0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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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멜라스’는 한 소녀의 희생을 담보로 행복을 누리는 마을이다.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한 이도 없고, 나서서 제물을 바친 이도 없다. 그러니 여기에는 상호 강제적이라는 수식이 생략돼 있다. 주민들은 (말귀를 알아듣게 된 나이라고 인식되는) 8~12세에 자신들에게 보장된 안녕의 실체를 듣고, 이를 목격하러 간다. 그들을 향해 ‘내보내달라’고 빌던 소녀는, 언젠가부터 말을 잃었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뢰도, 그에 따르는 희망도 잃었다. 그녀를 알게 된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것이 조건이다.’

 어슐러 K. 르귄의 단편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 세계에서 양심은 양식을, 인권은 이권을 넘어서기 힘들다. 이들은 결코 특별한 이들이 아니다. 연민을 느낄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죄악을 방기한 채 죄책감을 대물림하고, 차마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마을을 떠난다. 불편한가. 익숙한가. 혹은 익숙해서 불편한가. 낯익은 것이 단지 양심의 딜레마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엄격하고 절대적인 계약은, 실상 사회적 ‘협박’에 해당한다. 그래서 개인의 분노는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한다. 소녀에게 베푸는 아주 작은 친절, 심지어는 말을 거는 행동만으로도 사회 전체의 안락함을 빼앗긴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어느새 선(善)은 곧 위험한 것, 자신 혹은 모두에게 손실을 끼칠 수 있는 것이 됐다. 암묵적으로, 양심적 행동을 사회악으로 규정해 교육한 것이다. 반면 비양심적 행동에는 보상이 주어진다. 나서지만 않으면 된다. 비겁한 어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런 세뇌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조악한 덫을 만들어 더러운 지하방 한구석에 던져 놓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오멜라스의 주민들은 이를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눈앞에서 공포를 지휘하는 왕도, 경찰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강력하다. 공통의 선을 위한 희생양이 필요악이라는 사실이, 일견 인간 본성의 선택에 따른 생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립된 질서 속에서, 인권은 이기심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 누가 이 거울을 정면으로 마주할 것인가. 오히려 이 불쾌한 물건을 깨트려 버리고 싶지 않을까.  

 이 단순하고도 정교한 법칙이 현대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세뇌는 상당히 편리한 지배이념이 된다. 지배자는 부조리를 불가피한 손실로 포장해 피해자를 제외한 모두의 동의를 구할 수 있고, 피지배자는 양심의 가책을 더는 동시에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체제에 순응한다.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다면, 다수의 안정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지목해 미움을 받게 한다. 더 좋은 방법은 그들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의구심을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수법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까지 바보로 만드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발휘한다. 자, 이제 허락을 구할 때가 아니면 질문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호기심을 가질 수 없을 때, 사고는 무뎌지고 행동은 순응적이 된다. 그들에게 변화는 곧 손해를 의미한다. 가난하다면, 이를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빠진다. 우리는 이렇게 사유의 힘을 잃어버렸다. 

 같은 원리로, 현대사회의 세분화된 집단은 끊임없이 소수를 희생하며 연쇄적인 먹이사슬을 이룬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먹이사슬의 개체 수가 상위로 올라갈수록 적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겉으로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생리 구조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최대다수는 최소한의 행복조차 위협받으며 살아왔다. 이는 사회를 이끌기 위해 내거는 캐치프레이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언어는 마술적 힘을 지닌다. 프레임이 화두가 되는 이유다. 

 세계 성인인구 중 최상위 부자 1%가 전 세계 자산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하위 50%는 1%를 나눠 가지는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떠올려보자. 세계 최고 부자 10명의 자산이 세계 5위 경제 대국의 수준과 맞먹는다는 것도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기형적인 수치는 갈수록 극대화돼가고 있다. 
 이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고, 변화는 혼란을 초래한다는 주장의 실체가 보인다. 그들의 지지층은 결코 오멜라스와 같은 행복을 보장받은 이들이 아니다. 현실의 보상은 이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하다. 그나마도 한시적이다. 게다가 거의 모두가 상위집단의 단계적 속죄양으로서 존재한다. 서러움이 켜켜이 쌓여 분노가 된 혐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가상의 적을 향해 분출된다. 마침 곳곳에 적당한 입간판들이 준비돼 있다. 분풀이에 논리 따위는 없다. 이 미스터리를 풀지 못하면, 사회는 불신과 불안에 물들어 절망에 빠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행복을 보장한다던 정치의 미래다. 엄청난 배신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는 신기루를 좇는다. 누구의 인권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문장에는 직접적인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인권이야말로 최대다수의 실질적인 이득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주술에서 먼저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위해 투표한다. 그래서 불평등을 감수한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지, 이제는 명확하다.  
 암담한 미래의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이상(異常)이다. 

 약육강식이 동물의 본능이고, 우리도 이런 자연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과연 그럴까. 인류가 그려온 선택과 변화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날개 없는 인간이 우주를 향해 날고,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하나의 페이지로 단축했던 역사를. 그렇다면 인간의 성품 또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호모 엘리겐스(Homo eligens), 즉 선택의 순간들을 통해서 말이다. 전쟁의 산물인 경쟁체제와 다른 환경이 생긴다면,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과학기술을 성장시켜온 지적능력과 달리 인격은 진전될 수 없다는 주장은, 인류에 대한 모욕이다. 반성을 통해 번영을 이룩해온 선조들에 대한 결례다. 시대에 따라, 인간도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야 옳다. 그래야 기술의 악용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놀라운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권을 강조하는 연유다.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은가. 핵심은 인권이다.

 인간은 스스로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국 오멜라스라는 환영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 할 곳은 알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떠난 지성인들이, 길목마다 인권이라는 푯말을 세워두었으니 말이다.   

글‧박혜정 noahonthehill@naver.com
"직장인 십년차. 일상을 살고, 관찰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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