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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난하라, 그러면 복지를 주마
계속 가난하라, 그러면 복지를 주마
  • 백승호
  • 승인 2010.08.06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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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ée 특집] 소득보장제도의 새 패러다임

현재의 복지국가 시스템에서 소득보장제도는 사회보험과 공공부조, 그리고 각종 수당제도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득보장제도는 사회보험료를 재원으로 하는 공적 사회보험이다. 사회보험제도는 주된 목적이 빈곤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실업·노령·사망 등으로 인해 노동자가 소득을 상실했을 때 대응하기 위한 소득보장제도다. 각종 수당제도는 아동·장애인 등 특수한 욕구를 가진 집단만을 대상으로 하며, 장애 등으로 인해 추가적으로 비용이 발생할 때 이에 대한 보전 성격을 갖는 소득보장제도다. 마지막으로 공공부조제도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최후의 안전망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빈곤정책이다. 이 소득보장제도들은 자본주의적 축적 구조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사회 정책적 조절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빈곤 및 소득불평등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주요한 제도적 기능이다. 전자는 소득보장제도의 경제적 조정 기능이며, 후자는 소득보장제도의 복지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

▲ <방>, 2009 - 이강혁
사회보험, 공공부조, 수당제도

문제는 본래 목표대로 소득보장제도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복지 기능 측면에서 소득보장제도의 유용성을 살펴보자. 소득보장제도의 복지적 기능은 소득재분배 목표의 달성과 관련된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소득보장제도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에서 시작됐다. 빈곤 문제의 해결은 초기 근대국가가 형성된 뒤 가장 중요한 사회정책 과제였다. 영국의 경우 이미 14세기부터 빈곤정책의 법제화가 진행됐고 1601년 엘리자베스빈민법으로 기존 빈민법들을 집대성해, 빈곤 문제 해결이 국가의 책임임을 명시한 뒤 관련 기구를 정비했다. 이렇듯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은 사회정책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돼왔다.

그러나 국가는 긴 시간에 걸쳐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보험 등 공적 소득이전이 적용된 경상소득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 이하인 사람들의 비율, 즉 상대적 빈곤율이 16%가 넘으며, 노인의 경우 그 비율이 50%에 육박한다. 서구 국가도 마찬가지다. 특히 세부적인 프로그램의 효과를 분석해보면, 가장 대표적인 빈곤정책인 공공부조제도가 빈곤 및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나쁜 성적표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소득재분배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기본적으로 재분배 예산의 크기가 커야 하는데, 선별주의적 방식의 공공부조제도는 제한적인 인구 계층만을 대상으로 해 재분배 예산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소수의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선별복지 정책은 대중의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 그 결과 재분배 예산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결국 빈곤 및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경제적 조정 기능 측면에서 현행 소득보장제도가 사회정책적 조절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존 소득보장제도는 변화된 자본축적 구조에 충분히 조응하는 시스템이 없다. ‘케인시언 복지국가’라 부르는 기존 복지국가는 포디즘적 생산양식과 노동시장 구조를 전제로 설계돼 발전했다. 포디즘에 기반한 대량생산 시대는 제조업에 정규 고용된 반숙련 산업노동자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의 주된 관심은 안정적 시장임금의 확보와 산재·노령·실업 등 소득 상실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임금 확보였다. 한편 자본가의 주된 관심은 노동비용을 줄이고 노동생산성을 높여 지속적인 자본축적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산업노동자의 소득 상실과 노령, 그리고 상병이라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보장제도는 유효수요를 창출해 자본축적에 순기능을 하기 때문에 자본가에게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자본과 노동의 이런 이해관계는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회보험을 핵심적 소득보장 프로그램으로 도입하는 과정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 결과 ‘복지국가 황금기’라고 불린 1950~60년대의 서구 복지국가는 사회보험제도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사회적 욕구를 해결하고 자본축적을 원조하는 시스템을 제도화했다. 이런 시스템은 사회보험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실현, 나아가 노동자 계급의 성장을 촉진해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선별복지, 결국 빈곤 해결 못해

그러나 1970년대 복지국가 위기 이후 사회·경제·정치적 변화는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운영돼온 전통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위협했다. 탈산업화로 인한 비정규직 고용 증가와 장기 실업 증가, 인구 고령화는 사회보험의 기여 기반을 축소해 보험 재정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과거의 노동자는 대공장의 정규직 남성이 주류였으며, 착취당하고는 있어도 노동 자체는 안정적으로 지속해나갈 수 있던 반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노동시장의 급속한 유연화는 노동 자체가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를 양산시켰다. 이에 따라 사회보험에 기여하지 못하는 시민이 늘어나고 소득보장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커졌다.

그리고 노동시장의 여성화(Feminis ation)와 임금 양극화의 증가, 가족구조 변화, 특히 편부모 증가는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회보험제도가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을 확대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양식은 혁신과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생산 전략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받았고, 그 결과 공급 중심 경제 시스템으로 전환됨으로써 전통적인 소득보장제도를 통한 유효수요의 창출과 완전고용 테제가 더 이상 설득력 있게 주장되기 어려워졌다. ‘고용 없는 성장’으로 대표되는 현대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더 이상 노동과 소득을 연결시키는 소득보장 전략은 유효하지 않다.

탈산업화로 인한 총체적 복지 위기

이렇듯 기존 소득보장제도는 변화하는 자본축적 구조와 조응하지 못해 소득재분배라는 소득보장제도의 복지 기능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는커녕, 사회적 위험에 처한 인구계층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양산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사각지대 때문에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규모를 추정한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먼저 공적연금에서 사각지대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보고된다. 김교성은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탐색적 연구’에서 공적연금의 사각지대 규모를 전체 인구의 53.9%인 1564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20살에서 59살에 속한 2901만 명 중 연금 수급 자격을 유지하는 인구는 1336만 명에 불과하며, 미납·납부예외·미가입·실업·비경제활동인구가 공적연금의 잠재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혜정과 강신욱은 ‘경제침체기 사회보장제도의 대응방안 모색’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같은 제2의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사각지대의 규모가 더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제2의 경제위기가 발생할 경우 절대빈곤층이 2006년 기준 18.5%에서 31%로 늘어나지만, 기초보장 수급 가구와 고용보험에 가입된 가구는 6%에서 6.9%로 증가하는 데 그쳐 사각지대가 12.5%에서 24.1%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았다.

최후의 안전망으로서 최소한의 문화적 생활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부조제도의 사각지대 문제는 더 심각하다. 정부의 2009년 관계 부처 합동 발표인 ‘민생안정 긴급지원 대책’에 따르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 선정에서 탈락한 빈곤층 규모는 최저생계비 120%인 차상위계층까지 포함하면 200만 가구 4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을 초과해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한 경우는 60만 가구 100만 명에 달하며, 소득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차상위계층이 30만 가구 70만 명, 소득기준은 충족하지만 재산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계층은 110만 가구 24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절반이 넘는 사각지대

이처럼 현재의 소득보장제도는 경제적 조정 기능뿐 아니라 복지 기능에서도 많은 한계에 직면해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변화하는 자본축적 양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며, 복지적 측면에서는 기존 소득보장제도의 설계상 특징으로 인해 소득재분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자산 조사든 기여 기록이든 선별적 방식으로 대상자를 선정하는 현행 소득보장제도가 가지는 태생적 한계는 ‘소득재분배 극대화’라는 복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한다. 특히 산업구조의 변화로 자산 조사나 기여 기록을 충족시킬 수 없는 계층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현행 소득보장제도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을 양산하는 구조를 극복할 수 없다.

이런 한계뿐 아니라, 기존 소득보장제도는 대상자를 선별하도록 설계된 제도적 특성으로 인해 빈곤과 실업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소득이 빈곤선을 넘어서면 공공부조 수급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빈민은 노동을 통해 소득이 증가하면 수급자 탈락과 각종 복지급여 삭감이라는 부정적 경험을 하게 된다. 기존 복지제도가 빈민을 빈곤 상태에 머물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실업보험의 경우에도 실업을 벗어나면 실업급여를 수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업자가 실업의 덫에서 빠져나오려는 유인을 없앤다. 소득보장제도를 유지·관리하기 위한 행정 비용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공공부조제도든 사회보험제도든 담당 인력이 수급자의 복지 서비스 개선보다는 수급자 관리라는 행정적 업무에 매몰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행 소득보장 시스템이야말로 비효율의 상징이다. 기본소득처럼 행정 비용을 최소화하는 소득보장제도의 혁신을 통해 이 인력을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인력으로 전환시킨다면 우리나라 사회복지 서비스의 혁신적 변화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미시적 조정으론 어림없다

현재의 상황은 기존 제도에 대한 미시적 조정을 넘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기존 소득보장제도의 혁신이야말로 복지국가의 미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것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기본소득이든 어떤 다른 대안이든, 현실 가능성에 매몰되지 말고 사회복지적 상상력을 발휘해 충분히 논의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그 필요성에 대해 빙산의 일각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글•백승호 
비교사회정책과 복지국가정책을 전공했다. <한국복지국가 성격논쟁>(공저)을 쓰고, <분배의 재구성>(공역)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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