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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탑>에서 생긴 일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탑>에서 생긴 일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2.12.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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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에서, 한 학생은 구경남 감독에게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 하는 이런 영화를 계속 만드냐?”고 따지듯이 질문한다. 구경남은 “내 영화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드라마나 서사도 없고 교훈이나 메시지도 없거나 불확실하다. 예쁘거나 좋은 화면도 없다. 내 능력과 기질은 하나밖에 못 하는 거다. 정말로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정말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내가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과정이 나로 하여금 계속 뭔가를 발견하게 하고 나는 그걸 수렴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홍상수가 어떤 공간 또는 배우를 만났을 때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영화가 시작된다. 그의 영화에 유난히 공간(우물, 강원도, 극장, 해변, 북촌, 다른 나라, 언덕, 강변, 호텔 등)과 관련된 제목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탑>(2022) 또한 그 4층 건물을 만났기 때문에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영화 포스터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의 이미지는 그 건물이 일종의 주요 인물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관객이 인물들을 따라 그 건물에 들어서게 되면, 그곳의 나선형 계단에서 연상되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과정에 시간이 모호하게 개입하기 때문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시간은 공간만큼 중요한 모티브로서, 시간(밤, 낮, 미래, 지금, 그때, 그 후 등)과 관련된 제목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해옥은 병수와 정수에게 건물 곳곳을 보여준다
해옥은 병수와 정수에게 나선형 계단이 있는 건물 곳곳을 보여준다

<탑>의 첫 장면에서, 영화감독 병수(권해효)는 딸 정수(박미소)를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건물주인 해옥(이혜영)에게 소개하기 위해 찾아온다. 해옥은 병수와 정수를 1층부터 꼭대기까지 데리고 다니며 건물 자랑을 하고, 병수는 특히 3층의 실내공간과 옥탑, 그리고 옥상을 마음에 들어 한다. 해옥은 병수에게 이사를 오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병수는 결국 3층에서도 살고 옥탑에서도 살게 된다. 어떻게 해서?

홍상수 영화에서 롱테이크 장면이 커트 되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는 주의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거나, 생각/상상/희망 또는 꿈인지 모호한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탑>은 더 그렇기에 관객은 뭔가 미궁에 빠진 느낌이 들게 된다. 기타 소리가 음향효과로 들리고 장면이 바뀌면,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인물들의 상황은 아주 많이 달라져 있다. 바로 전 장면에서 해옥으로부터 2층에서 음식점을 하는 선희(송선미)를 소개받았던 병수는 다음 장면에서 그녀와 결혼해 3층에서 산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병수는 “나는 혼자 사는 게 맞는 사람이야. 혼자가 편해”라고 반복해서 혼잣말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병수는 선희와 헤어지기는 했지만, 옥탑에 살면서 부동산업자인 지영(조윤희)을 애인으로 두고 있다. 3층의 병수는 건강을 위해 채식을 고집했는데, 옥탑의 병수는 건강을 위해 소고기를 먹는다. 2층에서 선희를 처음 만났을 때, 선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자 병수는 “종교는 사람이 너무 두려우니까 필요해서 만든 것 같다”고 이견을 보였다. 그러나 3층의 병수는 “옥상의 공중에서 하나님을 봤다”면서, “하나님이 제주도에 내려가서 12편의 영화를 찍어라”라고 큰소리로 말씀했다고 간증하며 지영을 감격하게 만든다. 이전 장면에서 계속 와인을 마셨던 병수는 “와인은 나한테 안 맞는 것 같다”면서 소주를 마신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근사했던 공간이었던 3층은 비가 새고 옥탑 화장실은 악취가 나는 상태다. 또, 월세를 절반 또는 안 받겠다고까지 했던 해옥은 월세를 올릴 뿐만 아니라 집의 하자도 잘 고쳐주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먼저 시간의 개입으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정수는 음식점에서 일하는 쥴(신석호)과 담배를 피우게 되는데, 쥴은 해옥에 대해 “유명한 사람이나 말 잘 듣는 사람만 좋아한다”고 뒷담화를 한다. 병수가 영화사 대표를 만나러 간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 ‘아빠’라는 호칭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예를 들면, 아빠 대신 “안에 계신 분”이라고 지칭한다) 정수는 해옥에게 병수에 대한 뒷담화를 들려준다. “겁이 많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다. 여우 같은데, 사람들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모를 거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3층과 옥탑의 시퀀스는 쥴과 정수가 얘기한 뒷담화의 진위 여부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 같기도 하다. 따라서 해옥이 처음과 달리 병수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유명 감독이었던 병수가 3층에 살 때는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기로 결심했고, 4층에 살 때는 건강 문제로 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겁이 많고 어린아이 같다던 병수는 선희가 친구를 만나고 늦게 들어오는 걸 견디기 어려워한다. 옥탑방에 찾아온 지영은 산삼을 먹이면서 병수를 어린 아들처럼 돌본다.

 

이국적인 외모의 선희는 3층의 분위기에 맞는 여자다
이국적인 외모의 선희는 3층의 분위기에 맞는 여자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에서 공간과의 만남이 중요하다면, 건물의 각 층의 느낌에 따라 만들어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3층은 병수가 “외국 같다”고 반복했던 공간이므로, 병수는 이국적인 외모의 선희와 샐러드를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 옥탑의 옥상 분위기에는 화가의 작업대 같은 허름한 식탁에서 버너를 놓고 고기를 구우며 소주를 마시는 게 제격이다. 여기에는 한국적인 외모의 지영이 어울린다. 하늘이 보이는 옥상이므로, 병수는 공중에서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탑>의 시간을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는 해옥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 시퀀스마다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해옥이 그 건물에 항상 머무르면서 모든 공간을 돌아다니는 ‘지박령’ 같은 느낌이 강화될 때, 병수는 두 번째 시퀀스 이후 처음으로 건물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때, 관객은 처음으로 건물의 거의 전체 모습을 보게 된다. 병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 건물의 마법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지영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온 병수는 지영이 일하러 간 사이 건물 앞에 세워진 자신의 차를 탄다. 병수가 장면의 커트 없이 차에서 내리면 시간이 바뀌어 영화사 대표를 만나러 갔던 병수가 돌아온 설정이 된다. 그리고 와인을 사러 갔던 정수도 돌아온다. 영화가 첫 시퀀스의 마지막 장면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병수는 담배를 피우며 건물 앞에 서 있다. 그가 그 건물에 들어간다면, 아마도 다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면 그도 일종의 ‘지박령’이 되는 것은 아닐까? 선희는 병수의 영화에 대해 “동의할 수 있으면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영화”라고 평했는데, <탑>은 바로 그런 영화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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