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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자발적 복종’
윤석열의 ‘자발적 복종’
  • 목수정 l 작가, 파리 거주
  • 승인 2023.02.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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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전쟁 시대에 임하는 한국의 엘리트들

“아니, 우리말을 뭣 하러 또 배우나”라고?

2023년 1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이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했다는 이 발언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경박한 언어가 투사하는 개인의 단편적 사고가 개탄스러웠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통령의 공적 언행에 담긴 메시지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화적 위기를 신랄하게 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인들은 급부상하는 K-컬처를 보며, 자국이 문화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칸느와 헐리우드에서 상을 타고, 한국의 드라마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서 사랑을 받으며, 한국의 젊은 가수들이 세계 곳곳에 구름 팬을 형성하며 폭풍 성공을 거두는 현상은 한국문화의 지구촌에서의 위상에 급변동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변화는 나의 일상에도 전해졌다. 몇 년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청이 끊이지 않아, 몇몇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다. 

 

5세기 만에 나온 국어사전, 놀라는 외국인들

우리말을 외국인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마치 나 자신을 제3자처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비로소 내 모국어의 현주소를 냉정한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한국어 수업을 시작할 때면, 나는 항상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이유와 그 이후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하고, 한글이 담고 있는 철학적인 바탕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진다. 한 성군이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만든 전무후무한 문자 체계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최소한의 사전지식이며, 한글을 외국인에게 가르치게 된 한국인이 세종에게 바치는 소박한 예의의 표현이다. 

나와 수업을 한 프랑스인들은 한글이 1443년 창제되고, 1446년 반포됐음에도, 최초의 국어사전이 500년 후인 1947년에 나온 『조선말 큰사전』(제1권)이라는 사실에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한글 창제 자체를 당대 엘리트들이 결사반대했고, 창제 후에도 업신여겼으며,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야, 뒤늦게 극소수 엘리트들의 노력을 통해 해방 후 첫 국어사전이 나온 역사도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그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어가 처한 현실이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 어휘 중에는, 영어 단어를 한글로 음차해 놓은 것이 많다. 외래어의 유입 속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빨라지고 있다. 한번은 ‘웨’라는 글자의 예시로 ‘웨딩드레스’라는 단어를 들었다. 결혼식 때 신부가 입는 옷이라고 설명하자, 한 학생이 한국어에는 결혼을 뜻하는 단어가 없느냐고 물었다. ‘닭’이라는 단어를 배웠건만, 한국인들은 양념‘닭’이 아니라, 양념‘치킨’을 좋아한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나는 그럴듯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수많은 외래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며 우리말 단어를 대체하는 현상은 “역사를 잊은 민족이” 불과 반세기 만에 또다시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현장일 뿐이므로. 

우리말을 가볍게 여기는 대통령의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6월에는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우리말로)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다”, “미국 같은 선진국일수록 거버먼트 어토니(미 정부 검사 또는 법무부 공무원)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정·관계에 아주 폭넓게 진출하고 있다” 등의 신중하지 못한 발언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조선이 전쟁도 거치지 않고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것은, 사대주의에 길들어있던 타락한 엘리트들 때문이었다. 제 나라 글이 버젓이 있음에도, 백성들로부터 우월감을 유지하고, 지식을 독점해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몰두했던 그들에게 한자는 지배의 도구였다. 아랫것들의 반란을 억누르는 것, 그리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 것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였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일본군에게 진압을 요구했던 왕실의 선택이 바로 그런 조선 엘리트들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까지도, 국내 일간지들은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고 있었고, 신문의 이름도 한자로 적힌 것이 더 많았다. 1989년을 기점으로 한글 표기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며 한글 전용에 불이 붙기 시작했으나, 세기말 닥쳐온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영어와의 혼용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그 끔찍한 경제전쟁이 우리에게 문화전쟁이고 언어전쟁이기도 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완벽히 백기를 들고 항복하기로 서명한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고개를 돌리면 우린 아주 쉽게 영어가 우리의 생활공간을 점령해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학가 간판의 74.6%가 외래어

2015년 발표된 대학가 간판 분석에 따르면, 외래어 간판이 33.6%, 외래어와 우리말 혼용 간판이 31.6%으로 나타난 바 있다. 이젠 대로변 뿐 아니라 주택가 골목길까지 들어선 프랜차이즈 상점들 중 알파벳으로 적히지 않은 상호는 찾아볼 수 없다. 

전 과목 영어전용 수업을 강행하던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에 이어 자괴감에 빠진 교수까지 목숨을 던지자, 영어 수업을 강제하던 서남표 총장이 사표를 내며 비극을 마감한 사건(2013년)도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화라는 시대적(!!) 구호 속에, 한국 대학들의 영어 강의에 대한 강박은 전혀 수그러들 줄 모른다. 그것이 득인지 실인지를 따져볼 겨를은 그들에게 없어 보인다. 

코로나가 지배했던 지난 3년간, 우리가 전염병과 관련해 새로 접한 수많은 어휘들 대부분도 영어 단어를 한글로 쓴 것이었다. 부스터 샷, 코호트 격리, 드라이브 스루, 위드 코로나 등…. 정부도, 언론도, 과학계도 새로 등장한 개념들을 한국어화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제 이런 현상에 익숙해졌다. 

한편, 한국어는 점점 더 많은 세계인들이 배우려는 언어이기도 하다. 한국어 능력시험에 응시한 외국인의 수만 봐도 알 수 있다. 1997년 1차 시험에 2,600여 명이 지원했으나, 2021년에는 32만 8,000여 명이 지원해 24년 만에 무려 126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자신들이 배우는 한국어의 상당 부분이 영어의 한글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한국인 교사는 자신의 모국어가 겪는 반복되는 역사를 목격하며 당혹해 한다.

내게 한국어를 배운 프랑스인들 중 2명의 중학생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인들은 K-팝에 완전히 무관심했다. K-드라마에도 언어 습득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볼 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문화, 예술, 사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무궁무진한 미지의 세계가 K-팝, K-드라마라는 협소한 거울에 갇히는 현상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한다. 

유럽의 문화 수도라 할 수 있는 파리에 일본 서점, 중국 서점은 3~4개씩 있지만, 한국 서점은 없다. 일부 소설들과 만화들이 한국번역문학원의 지원에 힘입어 번역돼 소개될 뿐, 한국의 뿌리 깊은 문화를 소개하는 다방면의 책들, 한국 사회를 투영하는 인문 사회과학 분야 저서의 번역은 전무한 상태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라는 생각에 젖어있는 정부의 관심은, 가장 요란한 반응들이 드러나는 대중문화의 마케팅에 치중돼 있을 뿐, 본질적인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는 여전히 게으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모국어 교육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내 딸이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받은 공교육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단연 프랑스어다. 매년, 프랑스어에 배정되는 시간 면에서도 그렇고, 고교졸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 프랑스어에 바치는 시간과 정성도 이런 면을 입증해준다. 철학을 비롯한 다른 모든 과목들은 4일에 걸쳐 고등학교 3학년 말에 보지만, 프랑스어만 별도로 2학년 때 시험을 본다. 

프랑스어는 압도적으로 긴 시간이 소요되는 시험 과목이기 때문이다. 제시된 문학 작품의 일부를 읽고 논술형 글을 4시간 동안 작성하는 필기시험 외에, 20여 편의 문학 작품들 중 제비뽑기한 한 작품에 대해 구두로 소개하고, 교사의 질문에 답하는 구술시험에 모든 수험생이 1시간씩 소요한다. 이런 방식 때문에, 국내의 모든 프랑스어 선생들이 동원돼 시험을 치러도 프랑스어 구술시험을 마치려면 2~3주가 걸린다.

프랑스가 이토록 많은 공을 들여 프랑스어 시험을 치르는 것은, 국어 능력이야말로 모든 지적 능력의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줬듯, 국어 능력이란 단순히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을 발화하는 능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분야의 글을 읽고 이해하며, 내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고, 말로 내 뜻을 남에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당연하게도, 그 능력에는 다양한 차원이 존재한다. 

며칠 전, 미술사학과 박물관학 등을 가르치는 국립대학 ‘루브르 학교(École du Louvre)’의 입학설명회에 가서, 입학 요강을 설명하는 학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입학시험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능력은, 미술사에 대한 지식보다 명확한 어휘와 문장으로 작품을 표현하고 분석할 수 있는 잘 벼려진 프랑스어 구사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지성을 쌓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잘 닦인 모국어 실력’이라는 사실을 굳이 더 많은 사례를 통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언어전쟁을 경고하는 세계의 언어학자들

르몽드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 2022년 겨울호(프랑스어판)에서는, 전권에 걸쳐 ‘언어의 무기화’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구촌 최강국이 가진 정치권력, 군사권력, 경제권력은 그들의 언어를 무기 삼아 타민족의 문화를 무력화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촌 전체가 대량 문화파괴의 전장에 돌입하게 하고 있음을 다양한 필자들이 다각도의 긴장된 어조로 설파하고 있다. 브렉시트와 함께 영어는 더 이상 유럽연합에 속한 어떤 나라에서도 제1언어가 아님에도 영어가 여전히 유럽집행위에서 유일한 행정 언어로 사용되는 사실을 고발하며, 마크롱 정권 하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공적 영역에서의 영어 남용의 현실을 심각한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현재 지구촌에 남아있는 언어는 7,000여 종이나, 언어학자들은 이번 세기를 거치며 50~90%의 언어가 사라질 것으로 예견한다. 한 언어의 소멸은, 그 언어에 담긴 인간 공동체의 정서와 문화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 유네스코는 이런 현실을 언어에 대한 <대학살>로 규정한다. 

지구촌의 다양한 언어들이 빠른 속도로 소멸돼 가는 것은, 그 소멸을 촉구하는 절대적 지배 언어의 압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배 언어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패권을 통해 자신의 언어로 다른 언어들을 밀어내는 중이다. 이는 지구상에서 생물종 다양성이 급격히 축소돼 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소멸을 촉구하는 주체와 과정,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박형준 부산시장은 부산을 영어상용도시로 만들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부산은 이중 언어 지역이 될 것이고, 그 성공은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열망을 불어넣을 공산이 크다. 한글과 한국어가 온전히 존재하면서, 또 다른 언어가 공존한다면 다른 문제겠으나, 작금의 현상은, 영어가 한국어의 자리를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가는 모습이다.

사회적 유기체인 언어는 멈춰있는 법이 없다. 팽창하거나 소멸한다. 팽창을 멈춘 언어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소멸에 가깝다. 물론 공동체의 자각과 저항은 운명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압제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20세기 초 조선인들이 깨어났듯이. 그러나, 한국인인 우리가 학교에서 왜 한국어를 몇 년 동안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설파하는 인물이 절대권력을 가진 국가에서, 한국어가 처한 운명의 향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모두가 그의 언설이 지닌 함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글·목수정 
작가, 파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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