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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Numbers (3) - 내로남불, 틀린 말이 아니다
안치용의 Numbers (3) - 내로남불, 틀린 말이 아니다
  • 안치용 l ESG 연구소장
  • 승인 2023.02.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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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인문학]

Wonderful Tonight

 

“I feel wonderful because I see the love light in your eyes. And the wonder of it all is that you just don’t realize how much I love you.”

 

<에릭 클랩튼(우)과 패티 보이드>

 

<조지 해리슨(좌)과 패티 보이드>

 

20세기 세계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인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이 1977년에 발표한 <Wonderful Tonight>의 가사 중 일부이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20세기 명곡을 꼽으면 꼭 포함되는 이 노래에는 감미로운 선율 뒤에 특별하다고 할지 고만고만하다고 할지, 아무튼 일화라고 하기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나(I)’는 클랩튼이고 ‘너(You)’는 조지 해리슨의 전처 패티 보이드라는 게 정설이다.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 멤버인 그 조지 해리슨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1965년 해리슨과 결혼한 보이드는 결혼 후에 남편이 자신에게 무관심해지자 질투를 불러일으킬 심산으로 해리슨과 친구 사이인 클랩튼에 일부러 접근했다가 실제로 사랑에 빠지게 됐다. 클랩튼과 보이드의 사랑이 일사천리였던 건 아니어서 클랩튼은 1971년에 발표한 <Layla>를 통해 공개적으로 보이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초기엔 클랩튼이 보이드보다 더 강렬한 사랑의 열병에 휩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곡에서 클랩튼은 “내 사랑을 받아줘”로 요약될 법한 가사를 울부짖는다. 이 노래 역시 명곡의 반열에 올랐다. 보이드는 1977년에 해리슨과 이혼하고 2년 뒤인 1979년에 클랩튼과 결혼했다. 이 결혼식에 해리슨이 참석해 축가를 불렀다고 한다. 

<Wonderful Tonight>은 사랑을 쟁취한 클랩튼이 부른 ‘사랑의 송가’여서 그런지 격정적인 구애곡 <Layla>에 비해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두 사람의 ‘Wonderful’한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고 둘은 불화를 겪다가 1988년에 이혼하였다. 해리슨과 보이드, 클랩튼과 보이드는 각각 극적인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지만 두 결혼은 이혼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별개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해리슨, 보이드, 클랩튼과 이들이 관계한 많은 사랑의 조연을 포함하여, 남들이 보기에 대체로 둘만으로도 아니 둘만 이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성숙한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지만 하나가 더 소환되어 셋이 되었을 때 그곳에서 더 간절하고 불꽃 튀는 사랑의 양상이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하는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인생에서 흔히 목격하는 현상이다. 해리슨, 보이드, 클랩튼처럼 공공연하고 대범한 삼각관계가 있는가 하면 숨은 삼각관계가 있는데 후자가 세상살이에서 더 흔하다.

요즘에는 삼각관계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NTR, 즉 네토라래(寝取ねとられ, netorare)라는 말이 떠돌아다닌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이 다른 이와 성적 관계를 갖는 상황, 그러한 성적 취향, 그러한 묘사가 담긴 작품”이라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뚜렷한 현상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하위문화 창작 소재로 애용되는 듯하다. 감정보다는 육체의 영역에서 쓰임새가 큰 말로 추측된다. 우리 말 ‘오쟁이 지다’가 NTR와 비슷하지만 같은 느낌은 아니다. 오쟁이는 바구니를 말하는데, 오쟁이를 진 상황은 아내가 남편 몰래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뜻이다. 오쟁이 지다 유래를 한국민속문학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쟁이(씨를 담는 바구니 비슷한 것으로 지역에 따라 ‘오장’ 혹은 ‘오장치’라고도 함)를 짊어진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일하고 있는(혹은 밥을 먹고 있는) 어떤 부부를 보았다. 

남자는 갑자기 그 여인과 정을 나누고 싶어 꾀를 내었다. 남자는 그 부부가 들으라는 듯이 “참 별일 다 보겠다. 일하다 말고 사랑을 하고 있냐?”라며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이에 화가 난 남편이 쫓아와 “너 뭐라고 했냐?”라고 따졌다. 이에 오쟁이를 짊어지고 가던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말하길, “여기서 이 오쟁이를 지고 보면 그렇게 보인다.”라고 능청을 떨었다. 

이에 속은 남편이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대들었고, 남자는 남편에게 오쟁이를 지워준 뒤 여인에게 다가가 정을 나누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설명이나 육담(肉談)을 다루는 민담의 투박함을 반영했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말로는 해리슨이 오쟁이 진 남편인 셈이나 자신이 그 상황을 개의하지 않았고 일견 방임까지 한 것으로 보이니 기꺼이 오쟁이를 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오쟁이 진 남자는 자신이 오쟁이 졌다는 사실을 몰라야 오쟁이를 졌다고 할 수 있기에 사실 해리슨은 오쟁이를 진 남자가 아니다. 오쟁이를 탐낸 남자? NTR에 더 가깝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오쟁이 진’ 아내는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보다 가부장제가 더 심한 옛날에 아내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육정을 나누는 일을 (실제로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외로 간주한 반면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정을 통하는 일은 다반사여서 굳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정을 통한 다른 여자에게 남편이 있으면 ‘오쟁이’가 등장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니 오쟁이 진 남자에게 오쟁이 진 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어찌 보면 현명한 관계의 해법이 ‘오쟁이’에서 발견된다. 동서양이 마찬가지인 듯, 몰리에르의 희극 <타르튀프>에서 타르튀프(Tartuffe)라는 요망한 인간이 엘미르(Elmire)라는 유부녀를 꾀며 “침묵 속에 가려진 죄는 죄가 아니다”라고 설파한다. 

당사자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오쟁이 진 남편은 대체로 오쟁이를 진 일이 없지만 ‘오쟁이 진’ 아내는 거의 오쟁이를 지게 된다. 아내와 남편 중에서 대부분 아내에게만 문제가 된 문제였다. ‘오쟁이 진’ 아내가 해리슨처럼 대범하거나 무감각할 수는 없으니 침묵 속에 가려지지 않은 ‘오쟁이’는 언제나 아내의 문제였고 고통이었다.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했다. 진영논리를 펴면 ‘오쟁이 진’ 아내가 오쟁이 진 남편에게 가소롭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침묵 속에 가려진 죄”를 범할 예의라도 갖추라고 일갈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진영논리 관점에서는 오쟁이 진 남편의 아내를 응원하게 된다. 부도덕한 발언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울어진 도덕의 운동장을 바로잡는 게 먼저일 것이라는 항변 또한 가능하다. 

이런 문답이 무의미한 게 사랑은 도덕의 운동장에서 일어나는 경주가 아니다. 

 

내로남불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이다. 사자성어처럼 자리 잡은 한국어 신조어이다. 2020년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를 채택했다. 내로남불을 한자어로 바꾼 말이다.

내로남불은 이중잣대란 뜻으로 여러 문맥에서 사용된다. 재치 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엄정하게 따지고 들면 이중잣대라는 판단은 틀렸다. 내가 하는 불륜은 실제로 불륜이 아니다. 누가 불륜을 하는가. 다만 사랑할 뿐이다. 불륜에서만 마음이 동하는 특이 취향이 아닌 한 불륜보다 사랑이 언제나 먼저다. 인종 국가 계급 나이 성 등 모든 제약을 넘어서는 게 사랑인데 결혼이란 제도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겠는가. 사랑하면서, 제약을 넘어선 ‘오쟁이’ 값을 사랑한 사람이 지불할 따름이다. 사랑은 사적 영역이고 윤리는 사회적 영역이니 애초에 다른 영역의 현상이었다.

내가 해도 로맨스 남이 해도 로맨스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당사자일 때 언제나 사랑이 우선이고 불륜이 부차적이지만, 타인의 혼외 사랑은 알려지지 않으면 모를까 알려지는 순간 사랑보다 혼외가 먼저이기에 언제나 불륜이다. 물론 그 불륜은 당사자에겐 사랑이다. 하지만 판단하는 ‘나’는 당사자가 아니다. ‘나’는 ‘나’의 입장에서만 사랑임을 선언할 수 있다. 타인의 제도권 밖 사랑은 오직 불륜이라는 해석된 사건으로서 나에게 전달된다. 

요체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불륜을 찬미하는 게 아니다. 이 남루한 세상에 아무튼 사랑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사건이 존중받고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남’의 불륜까지 사랑이라고 옹호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는 않다. 오쟁이는 무언가를 담거나 하다못해 머리에 쓰기라도 하지만 오지랖은 깃발이 아니고 펄럭여서 무엇에 쓸 것인가. 오지랖으로 오쟁이를 꼭꼭 싸서 숨겨놓는 것이 좋은 방법이겠으나 그렇다고 사랑을 영구히 묻어버릴 수는 없다. 봄이 오면 싹이 땅을 뚫고 솟아나듯, 사랑은 도무지 저지할 수가 없다. 사랑할 때 어떤 사랑인지를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주된 걱정은 사랑의 부재이다. 

 

삼식이

A가 B보다 크고, B가 C보다 크면 A는 C보다 크다. A와 C의 크기를 직접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끼니는 보통 하루 세끼다. 양보다 횟수가 중요하다. 영식님, 일식씨, 이식이, 삼식이새끼. 먹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덜 존중받는다.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끼니 공급자로서는 아주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삼식→이식→일식→영식’으로 갔다가 더 나이가 들면 ‘영식→일식→이식→삼식’으로 순서를 거슬러 올라간다. 줄었다가 늘어난다. 돌고 도는 인생. 인생의 정점은 영식이고 또 다른 영식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어릴 때는 사랑받는 삼식이였다가 늙어서 눈총받는 삼식이가 된다. 이러한 전락은 끼니의 공급자와 수요자를 분리하는 우리 세태에서 더 두드러진다. 전락을 피하려면 분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 A가 B보다 크고, C가 B보다 크면 A와 C 중에서 누가 더 큰지는 알 수 없다. A와 C의 크기를 직접 비교하는 수밖에 없다. 한데 A와 C 중에서 누가 더 큰지 꼭 알아야 하나. 공급자가 누구이냐의 문제이지 누구나 결국은 일반적으로 삼식이일 수밖에 없다. 또한 마침내 영식님이 된다. 존귀한 영식님이 되는 그날까지 우리 한남 삼식이여, 그리고 만국의 삼식이여 굶지 마라. 죽으면 어차피 굶는다.

 

삼위일체

삼위일체보다 위에 있는 여인

예수 탄생에는 많은 논란이 존재하지만, 마리아가 불변의 상수라는 사실은 확고하다. 부활 사건의 유일한 실체가 ‘빈 무덤’이듯, 탄생 사건의 유일한 실체는 ‘성모’이다. 즉 포유류 혈통이 오직 모계로 확증되듯이, 예수 탄생 사건에서 논란은 마리아란 유대 여성을 예수의 어머니로 확인한 가운데 도대체 그의 생물학적 또는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것이다.

고대 기독교 교회가 발전하고 기독교가 지중해의 세계종교가 되면서 마리아와 관련한 의혹 또는 예수의 혈통에 관한 질문은 원천적으로 금기시되었고, 대신 전쟁을 방불케 할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 가운데 마리아의 신학적인 지위 문제가 뜬금없이 대두된 적이 있다. ‘성모’로 뭉뚱그려진 마리아에게 기독교 신학에서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토론으로,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인 만큼 불가피하게 다른 신학 주제와 얽히게 된다.

이러한 토론은 기독교가 박해받는 종교에서 지배자의 종교로 변모한 4세기 중반 이후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초기 기독교의 3대 신학 학파 중 안디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고대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논쟁에 불을 붙인 인물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년)였다. 이 논쟁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은 마리아의 호칭이었지만 그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근본에 관한 대립이었다.

A.D 428년 성탄절 설교에서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낳은 분’(크리스토토코스, Χριστοτοκος)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그리스도를 낳은 분’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왜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을까. 왜 이 일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몰려 감독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이집트 유배생활 중 사망하게 되었을까.

당시 교회에서 마리아의 공식 호칭은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Θεοτόκος)였다(테오토코스는 라틴어 ‘마테르 데이(Mater Dei)’로 번역되어 가톨릭교회에서 아직 쓰인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냐, 하나님의 어머니이냐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 흔히 예수가 인성을 의미하고 그리스도가 신성을 의미한다고도 받아들이는데, 엄격하게 말해 유대인의 어휘에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임금과 같은 세상 지배자 성격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신성이 가미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성 자체는 아니며 더군다나 마리아 호칭을 통한 간접 정의(定義)일 때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 비해 예수의 신성을 더 확고하게 드러낸 게 사실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던 것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바꿔 부르게 되면, 애초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어서 신성 박탈 및 인성 본격화란 반응을 불러오기에 십상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론에 따라 마리아 호칭이 달라진 사건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빈 무덤’ 의미가 부활과 시체탈취라는 사전 확증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과 흡사하다. A가 B보다 크고, B가 C보다 클 때만 A는 C보다 크지만, B가 C보다 작아도 A와 C를 직접 비교하지 않고 같은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세상사에서 흔한 모습이다.

말장난에 불과하겠지만,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어머니’란 호칭을 통해 마리아는 천지만물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가 되었다. 마리아는 자신 사후에 이런 논쟁이 벌어지리라고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칭에 숨은 신학과 교회정치와 무관하게 마리아가 예수의 생물학적 어머니이자 생물학적 아들의 죽음을 비통하게 지켜본, 참척 본 비운의 인물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를 보는 장면을 「요한복음」 19장 26절은 이렇게 묘사한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그의 시선 끝에서 죽어가는 아들 예수를 지켜보는 마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더 마음 아프다. 마리아는 확실히 예수의 어머니였다.

예수는 초대 교회 교인들의 고민 속에 또 구약 및 유대교와 관계 속에 삼위일체로 정립된다. 형식논리학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된 진술로 가득 찬 삼위일체 교리는, 그래서 비기독교인 물론 기독교인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 교리는, 예수를 이해하고 신앙하고자 한 초대 교회의 절절한 분투의 결과로 이해하여야 한다. 난점은 그러다 보니 마리아가 하나님 위에 있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Mother Mary Comes to Me…Let It Be”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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