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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쥴 앤 짐>,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초상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쥴 앤 짐>,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초상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4.1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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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느낌, 생각, 평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았는지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영화를 접한 나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최근에 이와 같은 경험을 안겨 준 영화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 앤 짐>(1962)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처음 보았던 이 영화를 얼마 전 재개봉 한다는 소식에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쥴 앤 짐> 포스터

여전히 훌륭한 점. 할리우드 영화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26살의 오슨 웰스는 <시민 케인>을 연출하면서, 1941년까지 등장한 모든 영화 기법을 ‘뉴스 언더 마치’ 시퀀스에 자신 있게 버무려 넣었다. 마찬가지로 한창 기세등등했던 30살의 트뤼포는 <쥴 앤 짐>에 1962년까지 등장한 모든 영화 기법을 담아내는 시도를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전혀 흐트러짐 없이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한다. 또 쥴(오스카 베르너)과 짐(앙리 세르), 그리고 카트린(잔느 모로) 사이의 얽히고설킨 삼각관계를 다루면서도 유쾌한 톤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간다. 밀당과 질투, 경쟁과 집착 따위의 복잡한 감정이 인물들을 감싸고 있지만,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쥴과 카트린의 어린 딸 사빈을 데리고 놀 때, 강가로 놀러 갈 때는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즐거움과 행복이 화면 밖까지 전해진다. 여기에는 나레이션과 음악의 적절한 사용이 크게 기여했다. 트뤼포는 내러티브의 전달을 위한 연출이 아니라 시각 매체로서의 영화의 예술성을 증명하면서, 자신이 주창한 ‘작가주의’를 실천해냈다. 그 결과 영화에 대한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 정말 아름다운 영화가 탄생했다.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 점.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쥴과 짐이 아니라 카트린이다. 젊었을 때 본 카트린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유 분망하게 살아가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다시 보게 된 카트린은 완전히 다른 인물로,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로 다가왔다.

 

쥴과 짐은 매혹적인 조각상을 닮은 카트린에게 빠져든다
쥴과 짐은 매혹적인 조각상을 닮은 카트린에게 빠져든다

끈끈한 우정을 나누며 즐겁게 살아가던 독일인 쥴과 프랑스인 짐은 어느 날, 알베르의 집에서 사진으로 접한, 미소 짓는 여인의 조각상에 완전히 매혹된다. 그리고 곧 두 사람 앞에 그 조각상을 꼭 닮은 여성, 카트린이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그들이 그저 아름다운 조각상을 감상하듯 그녀의 매력을 만끽했다면, 삼각관계의 균형이 깨지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이 얽혀든 삼각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건 불가능하다.

카트린은 자신에게 정신없이 매혹된 쥴을 만나면서, 한편으로는 짐과 기나긴 밀당을 시작한다. 쥴은 나약하고 수동적인 인물이기에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지만, 짐은 까칠하고 단호한 면모가 있어서 사로잡기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카트린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남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녀는 약속을 잡고, 짐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다. 짐은 약속 장소에서 50분 정도 기다리다 자리를 뜬다. 아마도 쥴이었다면 그녀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난 카트린은 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무렇지 않은 듯 쥴을 선택한다. 짐이 그녀를 계속 기다렸다면,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카트린은 그들의 중심에 자신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쥴과 짐이 게임에 열중하느라 카트린의 말에 집중하지 않자, 그녀는 쥴의 뺨을 때리면서 그들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이렇게 그녀는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야 만족하는 ‘나르시시스트’로서, 자신의 허락 없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남자를 용납하지 못한다.

 

​카트린은 쥴과 짐이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다
​카트린은 쥴과 짐이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다

카트린은 일종의 ‘가스라이팅’ 수법을 통해 남자를 지배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그 사례이다. 쥴과 짐과 함께 본 연극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카트린은 느닷없이 물에 뛰어들어 두 남자를 경악하게 만든다. 그녀는 충격에 빠진 두 남자를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띤다. 이러한 극적인 행동은 특히 마음 약한 쥴에게 특효를 발휘한다. 쥴은 자신과 결혼하고 딸을 낳고 나서도 내키는 대로 바람을 피우는 카트린을 내치지 못한다. 그녀를 상실하는 고통과 다른 남자 품에 안긴 그녀를 지켜보는 고통 가운데, 후자의 고통이 차라리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카트린에 대한 쥴의 태도는 가스라이팅 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쥴은 카트린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았을 때, 물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그 대가로 그녀가 자살을 포함한 어떤 극단적인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질질 끌려가게 된다.

이렇게 남자들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카트린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영화에서 그녀와 비교할만한 인물로는 테레즈가 있다. 테레즈는 쥴과 짐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하층계급 여성으로, 자신의 미모를 자산으로 어떤 관습의 제약도 없이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녀의 삶은 한없이 가볍고 발랄하다. 반면 카트린은 귀족 가문의 프랑스인 아버지와 서민 출신의 영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카트린의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충동이 어머니 신분의 영향을 받았다면, 여전히 인습에 얽매여 있는 그녀 삶의 무거운 측면은 아버지 신분의 영향이다. 평소의 카트린은 언제나 상류층 여성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고 우아하게 행동한다. 그녀는 남성처럼 꾸미고 나서야 껄렁껄렁하게 행동하며 달리기를 할 수 있다. 어쩌면 어머니의 신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카트린은 더 심각한 나르시시스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카트린은 짐이 자신에게 전혀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카트린은 짐이 자신에게 전혀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좁은 세계에 갇힌 미숙아이다. 따라서 카트린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굴복하지 않는 짐을 쿨하게 떠나보내지 못한다. 짐에게 임신했다고 호소하거나 보란 듯이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퍼포먼스를 통해 끊임없이 가스라이팅 작업을 시도한다. 또 짐 앞에서 멜로드라마의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급기야는 총까지 겨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짐은 점점 멀어져간다. 짐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카트린은 나이를 먹어가는 현실에 절망을 느낀다. 그런 가운데 짐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상류층 여성 질베르트와 더욱 가까워진다(이 영화는 세 명의 여성 인물과 세 명의 남성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질베르트는 언제나 짐을 기다리면서도, 질척거리는 법 없이 쿨한 태도를 유지한다. 성숙한 그녀는 짐 같은 남자를 다루는 방법을 유치한 카트린 보다 훨씬 잘 아는 것 같다.

 

​카트린은 짐을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카트린은 짐을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카트린과 완전히 헤어진 몇 개월 후, 짐은 극장에서 우연히 쥴과 카트린을 만나게 된다. 이때 짐은 자신에게 카트린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반면에 카트린은 짐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짐을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과감하게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녀는 예전에 물로 뛰어내렸을 때처럼 승리의 미소를 띠며 짐을 쳐다보면서 그를 태운 자동차를 몰고 강바닥으로 직진한다. 갖지 못한다면 파괴해버리는 편이 낫다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선택이다.

쥴은 카트린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녀에게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러나 쥴은 짐과 함께 사랑보다 더한 우정을 만끽했던 즐거움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에게 딸이 남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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