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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탄천 동행]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오리에게도?
[안치용의 탄천 동행]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오리에게도?
  • 안치용/ESG연구소장
  • 승인 2023.04.19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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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플로깅과 강과 함께 흐르는 세상 엿보기’ 2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잠들었다. 깨보니 예상대로 창밖이 어둑했다. 비가 오려나?

알람을 끄고 다시 눕는다. 침대와 침대 밖 세상과의 거리가 가장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아직 아침잠이 많은 게 나이가 덜 들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다가 객관적으로 좀 무리이다 싶어 판단을 철회한다. 철이 덜 들어서 그렇다고 하는 게 타당하겠다.

비 오는 탄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2절이 떠오른다. 이 부분만 읽으면 나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위로를 받는다면, 나쁘진 않다. 읽고 싶은 것만 읽는다고 누가 나무랄 것인가. 문제는 전체 구절을 이미 알고 있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개역개정)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밤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것도,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니 야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공동번역)

전체 구절을 보면 잠 자체와 복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문장으로 판단하면 사랑과 잠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만약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잠까지 많다면, 철이 없다는 말을 듣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침대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다. 원래 계획은 오전에 다른 일을 하고 오후에 탄천에 가는 것이었다. 오전에 비가 오고 점심 무렵 비가 그친다는 예보를 전날 밤에 숙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개와 산책하고 돌아온 아들이 비가 안 온다고, 말짱하진 않지만 걷는 데 지장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깐의 망설임을 거쳐 채비를 갖춘 뒤 길을 나섰다.

웬걸, 분당한신교회 주차장을 지나갈 무렵 비가 듣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빗방울이 묵직해진다. 내친걸음이라 계속 갈 길을 간다. 옛날 언제인가 전철에서 구매한 5000원짜리 보라색 비옷을 입고 우산까지 썼으니 장맛비가 아닌 이상 겁날 것이 없지 않은가.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던가, 몸이 온전했지만 바지 아래쪽과 신발이 완전히 젖었다. 양말까지 축축한 상태로 탄천을 걸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신발 속 상태와 정반대로 기분이 상쾌했다.

빗속을 뛰는 사람, 우비 입은 사람, 우산을 다른 이와 함께 쓰고 어깨 한쪽은 젖고 다른 한쪽은 마른 채 걸어가는 사람. 모두 밝은 표정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봄볕에 며느리 내보낸다고 했는데, 봄비엔 누굴 내보낼까.

당초 비가 내리는 시간을 피할 요량이었지만, 비와 맞닥뜨려 대지에 주는 복을 만끽하게 되었으니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해야 할까.

집을 나서기 전에 지난번 산책에서 오리들을 만난 기억이 나서 챗GPT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서 답을 받아놓았다. 질문은 비 오는 날 하천을 걷다가 유영하는 오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였고,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보라색 비닐이 비옷이다. 신발 속에 빗물이 흥건하다.
보라색 비닐이 비옷이다. 신발 속에 빗물이 흥건하다.

비 오는 날 하천을 걸으며 유영하는 오리를 만나면,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오리들에게 말을 걸어보면 어떨까요? 오리에게 말을 걸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근하게 말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GPT는 다섯 문장을 오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의 예시로 제시했는데, 다음 문장처럼 그다지 신통하다고 할 건 없었다.

오리 친구들, 이런 날은 빗속에서 즐기는 놀이가 가장 좋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무리하게 굴러들지는 않도록 주의하는게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근하게 말해볼작정으로 오리를 찾았다. 사실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 탄천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 자주 목격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날도 멀찍이 더러 보이긴 했지만 말을 걸만한 거리가 아니어서, 또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서 계속 적당한 기회를 모색하다가 마침내 호젓하게 있는 오리를 발견했다. 반환점에 해당하는 징검다리 위에 있어서 다를 건너며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오리는 봄비를 맞는 데 지쳤는지 머리를 몸에 박고 잠을 잔다. 걸음을 멈춘다. 고개를 들면 말을 걸어야지 기다린다. 징검다리 돌이 녀석에겐 침대인 듯 일어날 기미가 없다. 대기하다가 조용히 카메라를 꺼내 그의 자는 모습을 찍는다. 그래도 미동하지 않는다.

아침에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한 내 모습과 닮은 듯도 하다. 꿀잠을 자는 중에 누가 말이라도 걸면 참 귀찮다. 이 장면에서는 귀찮게 구는 게 그치지 않고 만일 오리와 대화를 시도한다면 오리를 침대 밖으로 쫓아내는 일이 될 것이기에 더 나쁜 짓이다. 게다가 오리는 나와 대화할 마음이라곤 1도 없다.

잠 없는 챗GPT가 제시한 시답잖은 문장을 사용할 절실함이 없으니 오리 잠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돌아 나온다. 저기 물가에 하얀 페트병이 하나 보인다. 저 녀석도 잠이 없다. 기회가 생기면 마찬가지로 잠 없는 강물에 뛰어올라 바다까지 달려가려고 들 텐데. 당연히, 오리의 편의를 봐주듯 페트병 편의를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책이 끝나갈 무렵 비가 그쳤다.

 

 

·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이자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분당한신교회 전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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