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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잔느 딜망>에 대한 두세 가지 생각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잔느 딜망>에 대한 두세 가지 생각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7.17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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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2022년에 실시한 ‘역대 최고의 작품’ 선정 이벤트에서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1975)이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고, 올해 1월 원고에서 다루었다. 이후, 아커만 영화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녀의 개인사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아커만의 어머니가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 돌아온, ‘홀로코스트 생존자’였으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5년 10월에 아커만이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잔느 딜망>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세르주 티스롱의 『가족의 비밀』을 보면, 제시된 여러 사례 가운데 아우슈비츠 생존자와 자녀들에 관한 경우도 있다. 장 클로드 스니데르의 아버지는 강제수용소 생활은 물론이고 그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감추려고 했다. 또 어떤 식으로든 악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부인하는 태도를 보이며, 모든 형태의 고통이나 악의, 폭력에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함구했다. 수용소 수감 경험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서 공격성을 극도로 억압한 결과, 아버지는 갑자기 극도로 화를 냈다가 온화한 태도로 돌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스니데르는 자기 내면의 공격성을 조금이라도 감지하게 되면 서둘러 억눌렀다. 그런데 억압된 공격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스니데르 자신을 겨냥하게 되어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 공격성을 느낄 때마다 이유도 모른 채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가 스니데르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르주 티스롱은 “부모가 겪은 정신적 외상이 자녀 세대에 그대로 답습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세대 간에 걸쳐서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아커만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는 (아마도 십 대 시절에)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항상 침묵했다고 한다. 어쩌면 아커만의 우울증은 얼마간 어머니가 말할 수 없었던 극단적인 고통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잔느 딜망>에서, 잔느는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 대부분은 가사 일인데, 매춘은 예외이다. 잔느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매춘밖에 없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 노동의 가치가 무시되는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롱 테이크로 촬영된 잔느의 가사 일 장면을 보면, 먼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델핀느 세리그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가사 일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 여배우에게서 그렇게 디테일한 연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낸 25살 아커만의 역량은 정말 놀랍다. 이것은 아커만이 어머니와 주변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치밀하게 관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아커만은 쉴 새 없이 일하는 어머니에게서 수용소 경험에서 비롯된 억압된 불안과 분노를 감지한 것 같다.

 

두 번째날부터 잔느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두 번째 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잔느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돈을 넣어 두는 도자기 뚜껑을 닫지 않는다거나 감자 요리를 망친다. 이러한 균열이 세 번째 날에는 더 많이 생겨난다. 은행 문은 닫혀있고, 옷에서 떨어진 단추와 똑같은 단추를 찾아다니지만 실패하고, 카페에서 언제나 앉았던 자리에는 다른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모두 사소하게 보이는 일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잔느는 한 시간 정도 할 일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자 잔느는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느낌 속에서 엄청난 불안에 휩싸인다. 따라서 그녀가 하루 종일 쉬지 않는 이유는 부지런해서라기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의식에 떠오를 수 있는 불안을 잠재우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할 일 없는 상황에 직면한 잔느는 엄청난 불안에 휩싸인다

잔느는 통제하지 못한 불안 속에서 매춘 상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성관계 장면을 보면, 잔느는 이전의 매춘에서는 경험하지 않았던 성적 쾌락을 느낀 것 같다. 아마도 그녀는 매춘 행위가 남편 없이 아들과의 생계를 꾸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 속에서 통제력을 잘 발휘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성적 쾌락이라는 통제력을 상실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녀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더욱 증폭된다.

의식으로 올라온 불안 다음에는 잔느를 완전히 붕괴로 몰아갈, 위험한 분노가 기다리고 있다. 잔느는 말수가 적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조용하고 침착한 여성처럼 보이므로 화내는 일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분노에 관련된 자료를 보면, 순교자 같은 사람의 내면에 어마어마한 분노가 억압되어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분노가 표현되는 방식 가운데, “매사에 소극적으로 행동하기,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기,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앉아 있기” 그리고 “희생적 태도” 등, 잔느에게서 발견되는 사항이 있다.

 

 잔느는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힌 채 완전히 붕괴해간다

매춘을 끝낸 잔느는 옷을 입다가 화장대 위에 놓인 가위를 보게 된다. 이때 간접적인 표현을 통해 통제해왔던 억압된 분노가 분출하면서, 잔느는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가위로 찔러 죽인다. 그런데 잔느의 불안과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들 실뱅과의 대화에서, 잔느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그녀에 관한 정보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녀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일 가능성도 생각해 보게 된다. 거실로 나온 그녀는 어둠 속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여기에는 그토록 오랫동안 억압한 분노를 마침내 폭발시킨 데서 비롯된 만족감 같은 느낌도 있다. 또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 왼쪽 가슴에 보이는 핏자국은 분노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자살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녀는 집 밖으로 탈출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불빛과 소음 속에서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힌 채 완전히 붕괴해간다.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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